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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내리는 눈 Nov 03. 2020

[시카고] 대인 커뮤니케이션의 기초 수업 (2)

픽션 에세이 (fiction essay)

 디얼 프로페서, 는 바라지도 않는다. 왜 빠졌는지 이유라도 설명해 줘야지. 쏘리도, 땡큐도, 베스트 리가즈도, 그 어떤 인사말과 겉치레도 쓰여 있지 않은 한 줄짜리 이메일이라니. 나의 상식으로는 이런 경우 학생의 이메일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  


‘친애하는 강사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선생님의 대인 커뮤니케이션의 기초 수업을 듣는 아무개라고 합니다. 제가 시합에서 부상을 당했는데 너무 큰 통증으로 어젯밤에 응급실에 실려 갔다 와서 부득이하게 오늘 중간고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미리 사유서를 제출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만 중간고사를 따로 혼자 볼 수 있을까요? 혹시 안 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중간고사를 대체할 방법이 없을까요?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협조해 주실 것에 미리 감사드리겠습니다. 아무개 올림’


 나의 상식이 그녀의 비상식이 될 수 있고 그녀의 비상식이 아마도 이 바닥의 상식인가 보다, 하며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다양성을 존중하기엔 이 메일은 잘못되어도 너무 잘못되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A부터 Z까지, 동해안부터 태평양까지, 서울부터 LA까지. 괘씸한 것을 떠나서 다른 학생들과의 형평성을 생각하면 그녀에게만 이유도 모른 채 중간고사를 뒤늦게 보는 특혜를 줄 수 없다. 게다가 이미 다른 학생들이 시험 문제를 알고 있기 때문에 혹시라도 어떤 문제가 나왔더라, 하고 그녀에게 공유할 수도 있으니 모든 시험 문제를 새로 내야 할 판이다. 이 서술형 문제들을 내기 위해 몇 날 며칠밤을 새웠는데 앨리스 한 명을 위해 또 그만큼의 노력으로 시험 문제를 새로 내야 한다고? 컴 온...... 이건 조크야. 이럴 순 없어.  


 바로 앨리스에게 답장을 해서 ‘NO!’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하루살이 강사 목숨이니 학과의 눈치를 봐야겠기에 학과장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이런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경험이 많은 학과장이 잘 알려 주겠지. 그가 하지 말라 하면 하지 말 것이고, 하라 하면 할 것이다. 나에게 있어 그는 신적인 존재다. 이 학교에서 내 운신의 명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니 말이다. 어쩐지 그가 학생이 해 달라는 대로 해 주라고 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혹시 아주 작은 확률로 ‘단호하게 대해, 게으르고 무례한 학생에게 특별 응시의 기회를 줄 필요는 없어’,라고 말할지도 모르니까 일단은 그에게 물어보는 게 좋은 생각 같다.   


 학과장인 매튜는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대가인데 사람 만나기를 극도로 꺼린다. 천성이 내성적이고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 스트레스를 받는 천재 타입인 매튜는 워커홀릭인데 일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No를 못하기 때문에 그에게 와서 일이 쌓이기 때문이다. 누가 ‘이 논문 좀 리뷰해 줄 수 있어?’ ‘이 학생 좀 맡아서 지도해 줄 수 있어?’ ‘이 저널의 에디터가 되어 줄 수 있어?’ ‘이 과목 좀 가르칠 수 있어?’라고 물어보면 남과 협상하고 실랑이 벌이면서 스트레스받느니 차라리 빨리 그 상황을 벗어나 혼자 그 많은 일들을 해치우는 게 맘이 편하기 때문에 항상 모든 요구에 Yes,라고 하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대인 커뮤니케이션에 서툴면서도 학계에 이름을 널리 알린 이론의 주창자가 된 이유는 인간관계의 문제 해결 방식으로는 꼭 적극적인 소통이 답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회피 (avoidance)’가 효과적인 극복 메커니즘일 수 있다는 신박한 이론을 실증적으로 검증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농담 중 장인 이야기가 있는데 자기 장인은 월마트에 가서 1달러짜리 나사못 한 상자를 사면서도 계산대에서 낮은 목소리로 ‘얼마에 줄 거요? 80센트?’라고 협상을 시작하는 타고난 협상가이고 그 기질을 그대로 닮은 그의 딸과 사는 자신은 아무것도 협상하지 않고 포기하고 사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포기란 전염이 빠른 질병인지 매튜가 이끄는 학과에서 지난 3년간 일을 하면서 나도 어느새 포기가 빨라졌다. 이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 재계약이 된다든지, 혹은 다른 학교에 정교수가 되어 부임하게 된다든지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게 신뢰도 95% 수준의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자명했고 비관은 중간값, 낙관은 이상치 (아웃라이어 outlier)인 나날들 중에 오늘은 부쩍 더 힘든 날인 것 같다.  


 ‘그냥 그 학생이 해 달라는대로 재시험의 기회를 주렴. 그게 그녀가 학교 사무실에 쫓아가 항의하는 걸 지켜보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나한테도 그런 일이 늘 벌어지는데 어쩔 수 없어. 시험 문제 다시 낼 필요 없이 그냥 시험 다시 보게 해.’


 매튜의 답장을 읽으니 맥이 탁 풀린다. 대인 커뮤니케이션은 회피 일변도인 매튜는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인지 이메일은 재깍재깍 읽자마자 답변을 하곤 한다. 차라리 그는 매개 커뮤니케이션 (Mediated communication) 전공이었어야 하는데 그이나 나나 전공을 잘못 선택한 것 아닐까. 내가 원하던 답은 아니었지만 매튜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고 기대한 답을 듣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한 점도 있었다. 노련한 학과장으로서 수많은 학생 군상을 접해 본 매튜는 직감적으로 아는 것이다. 앨리스 같은 학생은 시험 문제를 대놓고 알려 주어도 어차피 제대로 공부해 오지 않기 때문에 재시험의 기회를 100번을 주어도 공평하다는 것을. 덕택에 다시 밤을 새워 시험 문제를 제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니 앨리스에 대한 화가 좀 누그러지는 듯했다.


 며칠이 지나 앨리스의 스케줄에 맞춰 빈 강의실을 찾아 재시험 장소를 예약하고 그 시간에 잡혀 있던 다른 연구 관련 미팅을 취소하고 들어가 앨리스에게 내가 이 방을 잡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생색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물어보았다.


 “앨리스, 중간고사 못 본 이유를 말해 줄 수 있어?”

 “허리가 너무 아파서 주사를 맞으러 가야 하는데 클리닉이 시카고 다운타운에 있었어. 아침 일찍 가서 주사 맞고 와서 시험을 보려고 했는데 지하철이 막혀서 늦어 버렸어.”

 “지하철이 막혔어?”

 “응.”

 “꼭 그 시간에 주사 맞으러 갔어야 해? 거기로?”

 “내 코치가 거기로 가라고 추천해 줘서 어쩔 수 없어.”


 순간 내 머릿속에 드는 수많은 의문들 – 시험 시간이 아침 9시 반이었는데 네가 다운타운까지 왕복으로 왔다 갔다 하는 시간과 치료 시간을 계산해 보면 3시간 이상 걸리는데 24시간 운영하는 응급실도 아니고 아침 6시 전에 문을 여는 부지런한 클리닉이 미국에 있니? 있다 해도 다른 날이나 아니면 시험 보고 갔으면 안 됐니? 지하철이 고장 난 것도 아니고 막혔니? 학교 캠퍼스와 시내까지 학생증을 보여 주면 30분 안에 공짜로 데려다주는 셔틀버스가 있어 이 학교 학생은 모두 그걸 타고 다니는데 너는 왜 지하철을 탔니? 그리고 너 지금까지 한 번도 쏘리,라고 말 안 한 거 알고 있니? – 을 무시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사유를 설명하고 이메일로 먼저 시험을 볼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학생이 원한다고 해서 아무 때나 시험을 다시 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오케이?”


 나는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욕설을 듣고 상처 받은 것 같은 사람의 눈동자를 앨리스의 눈에서 보았다. 황당함, 불쾌함, 모욕감, 성가심, 가소로움이 뒤섞인 까만 눈동자로 그녀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딱 한 마디를 한다. “오케이.”


 눈맞춤, 아이 콘택트 (eye contact)는 커뮤니케이션의 문화 차를 보여 주는 가장 흔한 예일 것이다. 서구 문화에서는 대화 중 서로 눈을 마주치고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에 대한 무시, 대화에 충실하게 참여하고 있지 않음을 나타내는 표시라 한다면 동양 문화권에서는 아이 콘택트는 공격성의 지표가 될 수 있어 보통 공경의 표시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화를 이어가곤 한다고 수업 시간에 가르치면 미국인 학생들이 우리도 그렇게 눈 똑바로 안 쳐다본다고, 보통은 눈과 눈 사이 미간을 본다고, 너무 눈 똑바로 쳐다보면 웃기고 이상해, 하던 바로 그 아이 콘택트 상황에서 한국인인 나와 재미교포인 앨리스 사이에서 어떤 이문화 커뮤니케이션 (cross-cultural communication)이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날 이후 기말고사를 보는 날까지 앨리스는 단 한 번도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다.


르네 마그리트 <연인들>. 눈맞춤, 혹은 입맞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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