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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내리는 눈 Nov 05. 2020

[시카고] 대인 커뮤니케이션의 기초 수업 (3)

픽션 에세이 (fiction essay)

‘헤이,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내 수업에 오하이오에서 학점 교환으로 온 학생이 있는데 그녀의 수업 태도가 당황스럽네. 이 중국인 학생은 수업 시간에 대놓고 노트북을 펴고 페이스북을 하거나 이어폰을 끼고 있어. 아이도 아니고 성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기 싫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매 수업 이런 식이라 가르칠 때 너무 신경 쓰이고 내 티칭에 무슨 문제가 있나 하는 생각마저 드네. 네가 시간이 된다면 언제 한 번 내 수업을 참관해 볼래? 그녀의 태도가 왜 그런 건지 한 번 봐줄 수 있어? 혹시 문화 차이인가 싶어 너에게 의견을 구해. 바쁘면 신경 쓰지 말고. 그럼 답장 기다릴게! – 헤이즐.’ 


 웃을 때 시원스러운 웃음소리가 듣기 좋은 헤이즐은 학교에서 제일 친하게 지내는 동료다. 평생을 일리노이 주 밖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전형적인 미드웨스트 (Midwest) 걸인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새 비주류 문화를 이해 못하고 외국인에게 결례를 범할까 봐 극도로 조심하는 경향이 있다. 타문화에 대한 존경심도 좋지만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말라고, 네가 본 그 사람은 그냥 무례한 사람이었던 거야,라고 말해 주어도 늘 혹시라도 상대방의 무례를 자기가 유발한 것이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는 샌님이었고 아마도 그런 그녀였기에 소심한 나도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헤이즐이 나에게 이 메일을 보낸 이유가 짐작된다. 그녀는 자기가 은연중에 전미 랭킹 10위권의 명문대인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닌 타교생을 수준이 좀 떨어진다고 선입견을 갖고 바라보는 건 아닌지,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아시아에서는 그녀의 수업 태도가 별 문제없는 행동인 건지 나를 통해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에 대한 판단을 해야겠다고 자기 검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 문제 학생에 대한 가장 가까운 레퍼런스로 한국인인 나를 떠올린 것 자체가 우습고 내가 무슨 자격으로 중국 문화를 알랴마는 그래도 ‘보따리 강사끼리 도와야지’ 하는 마음으로 흔쾌히 예스, 를 하고 헤이즐의 수업에 들어왔다.  


 “모두 안녕? 오늘은 새로운 얼굴이 보이지? 어려 보이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너희와 같은 학생이 아니고 우리 과에서 ‘대인 커뮤니케이션의 기초’를 가르치고 있는 강사란다. 오늘 그녀가 우리 수업을 참관하고 나에게 피드백을 줄 거야. 시간이 된다면 강의 말미에 잠깐 스피치를 부탁할 거야. 지금 그녀는 흥미로운 헬스 커뮤니케이션 토픽을 연구 중인데 우리 수업과도 연결되는 주제거든.”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멋쩍게 웃으며 하이, 하고 자리에 앉았다. 박수도, 눈웃음도, 고개 숙이는 인사도 없이 오후의 식곤증으로 나른한 학생들은 나를 한 번 쓱 쳐다 보고 다시 눈을 헤이즐에게 고정시켰다. 교실에 나타난 낯선 사람의 존재를 궁금해할 학생들에게 친절하게 내 소개를 해 준 것은 감사하지만 헤이즐이 나에 대해 동안 운운한 것이 민망했다. 누가 봐도 서른다섯 살로 보이는 피곤에 찌든 키 작은 동양 여인을 학부생으로 착각할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이렇게 소개하면 평소에는 노트북에 고개를 처박고 수업에 신경도 쓰지 않는 오하이오 학생이 같은 동양인인 나에게는 나이, 지위, 권위에 상응하는 예의를 보여 쳐다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헤이즐이 그렇게 말했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이렇게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다니 그 새 헤이즐과 너무 친해졌나 보다. 


 헤이즐의 수업은 그녀의 웃음소리만큼이나 거침없고 시원시원했다. 나는 잠시 ‘아, 나도 저런 영어를 할 수 있다면!’ 하고 부러워하다가 오늘 내가 여기 온 이유를 잊지 않기 위해 중국인 학생의 노트북 컴퓨터를 염탐하다가 역시나 페이스북 메신저가 띄워져 있는 화면을 확인하고 이따가 헤이즐에게 고자질할 생각을 하다가 도대체 저 나이 또래의 소녀들이란 얼마나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길래, 또 얼마나 많은 친구가 있길래 수업 시간 내내 누구와 저렇게 채팅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 학생은 있었던 흔적조차 느낄 수 없게 스르르 빠져나갔고 텅 빈 강의실에 남아 나는 헤이즐을 격려했다. 네 티칭은 어메이징 하다고, 전혀 문제없다고, 정말 흥미로운 수업이었으며 문제는 오로지 그녀다, 이어폰을 끼고 채팅을 하는 건 아시아에서도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면 쟤는 지금 이미 쫓겨났다, 등등 솔직한 피드백을 주자 안심한 헤이즐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더니 그제야 분통을 터뜨렸다.  


 “그렇지? 내가 틀린 거 아니지? 걔가 문제 있는 거 맞지?” 


 분을 참기 위해 이렇게까지 용쓰다니 헤이즐이 딱했다. 당신의 그 소심함 내가 이해하오. 나도 학생들이 수업에 흥미를 잃은 것 같으면 혹시 내 영어 때문인가 위축되기도 하고 수업이 끝난 후 ‘그 농담은 하는 게 아니었어, 미국 애들이 그런 썰렁한 한국 아저씨 유머를 이해할 리 없잖아?’라고 괴로워하기도 하지만 영어가 완벽한 헤이즐도 자신의 티칭에 자신 없어하는 모습을 보니 티칭은 영어 문제가 아니다. 쪼그라든 우리 간덩이가 문제지. 그래도 헤이즐이 안도하는 걸 보면서 친구로서 내가 할 도리는 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화 말미에 쓸데없는 이야기 (내가 한국에서 대학 다니던 시절에는 한 남학생이 노랗게 염색한 약간 긴 단발머리를 수업 시간에 쓸어 올리다가 노교수님으로부터 어디서 겉멋이 들었냐는 불호령을 듣고 쫓겨났다는 에피소드)를 덧붙여서 헤이즐이 더 큰 문화 충격을 받고 말았지만. 그 얘기는 괜히 했나? 전 세계 공통의 청강 태도 이야기로 끝낼 것을 괜히 또 문화 차이를 끄집어냈나 보다.  


 헤이즐의 수업 참관을 통해 어느 수업에나 두통 유발자들은 있기 마련이라는 위로를 받고 앨리스가 나타나지 않는 수업들을 가르치다 보니 어느새 내 두통이 사라지고 훌쩍 종강이 가까워 있었다. 기말고사에는 제시간에 나타난 앨리스였지만 이번에는 나도 그녀에게 지난 한 달 반 동안 왜 나오지 않았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구제하기 위한 마지막 방편으로 이제껏 나오지 못한 수업들에 할당된 리딩을 읽고 짧은 독후감을 수십 편 제출하면 그것을 출석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공지를 했을 뿐이다. 이미 기말고사 성적과는 무관하게 출석 점수가 0점이라 F가 확정된 앨리스를 구제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지난번 학과장과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얻은 소득이라면 학생이 F를 받게 되면 그건 학생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가 되겠구나, 하는 생존의 법칙을 깨달은 것이다. 정교수가 되기 전에는 정규직 트랙에 있는 교수들도 몸을 사리는데 감히 일개 강사인 내가 원칙을 내세워 학생들과 트러블이 생긴다면, 그리고 그 학생이 운동부 소속인데 내 수업에서 F를 받아 다음 학기에 결장하게 되어 학교 팀 전체의 성과가 나빠진다면, 행정실은 보나 마나 뒤집어질 것이고 나는 또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해명을 해야겠지.  


 ‘원칙이 밥 먹여 주냐고,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타락이 아니라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는 앨리스에 대한 긍휼에서 이런 결정을 했다. 아니 사실, 조금 비겁한 것이 아니라 많이 피곤할 뿐이다. 그리고 정작 구제해 주고 싶었던 앨리스는 그녀가 보냈던 이메일만큼이나 짧은 한 줄짜리 독후감을 성의 없이 갈겨 대서 낸 반면 학점 욕심이 난 이미 성실한 학생들이 한두 번 빠진 수업을 보충하겠다고 수십 장의 독후감을 내는 바람에 채점 일만 늘었다.  


 기말고사 채점을 마치면 이제는 학생들의 복수 기간이다. 이제껏 학기 내내 평가받는 입장이었던 그들이 강의 평가를 통해 선생들의 심장을 후벼 판다. 키보드에 칼날이 달려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어떤 코멘트들은 강도 높은 비판이고 다른 코멘트들은 천사의 수금과 비파 소리처럼 황홀한 칭찬이다. 이들이 과연 같은 사람의 수업을 들은 게 맞는 걸까?  


 떨리는 마음으로 이번 학기 강의 평가를 확인한다. 6점 만점에 4점대 후반의 나쁘지 않은 점수다. 아주 불만족스러운 강의 같은 경우 3점대가 나오기도 하지만 보통은 4점대 초반, 잘 가르치면 4점대 중후반의 점수가 나온다. 강의 평가가 전산화된 이후부터 지난 20년간의 기록을 살펴볼 수 있는데 이번 학기 내 점수가 ‘대인 커뮤니케이션의 기초’ 수업 20년 역사상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그 많았던 원어민 교수들을 제치고 외국인 강사인 내가 가르친 수업을 학생들이 제일 좋게 평가했다니 ‘궁한 자가 한 노력을 애들이 알아주는구나’ 싶어 울컥한 것도 잠시, 익명으로 남긴 한 코멘트가 눈에 들어왔다. 


 ‘이 강사의 수업은 교과서를 그대로 베끼는 것 같았다.’ 


 재미없는 교과서를 어떻게 보충할까 싶어 보지도 않던 미국 드라마와 리얼리티 쇼를 뒤져 적절한 예를 찾고 학교에서 사 주지 않는 디비디와 학교 도서관에 없는 최신 작품들을 사비로 사서 저작권에 걸리지 않게 파일을 편집하고 변환하여 수업 시간에 틀어 주고 학부생 수준에 맞는 쉬운 논문들을 찾아서 참고 리딩 목록을 만들어 애들에게 보내 주고 지옥불처럼 끓는 아메리카노 수백 잔을 마셔 가며 파워포인트를 만들었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내 수업이 교과서를 그대로 베꼈다고? 다른 비판이라면 모르지만 이건 내 수업을 제대로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소리다! 찬찬히 보니 모두 5, 6점을 준 평가들 사이에 유일하게 1점 (0점이 없으니 사실상 최하점)을 준 아웃라이어 하나가 보였다. 이 1점이 아니었다면 내 강의 평가 점수는 얼마나 더 만점에 가까웠을까. ‘대인 커뮤니케이션의 기초’ 과목 역사상 최초로 5점 이상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게 이 학교에서의 나의 미래에 하등 긍정적인 영향은 없을지라도.  


 익명인데 익명이 아닌 것 같은 한 줄짜리 악평을 곱씹고 있노라니 자꾸 앨리스의 얼굴이 떠오른다. 두 눈을 부릅뜨고 F를 받아 마땅한 그녀의 볼품없는 답안지를 어떻게든 점수를 줄 구석을 찾아 C-로 만들어 주었던 그 밤에, 그녀가 이런 내 노력을 안다면 아무리 싹수없어도 이번에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새침한 얼굴로 땡큐, 하진 않을까 상상했었다. 그렇게 그녀와 나만 혼자 화해를 했는데 이 밤에 누가 썼을지 모를 ‘익명의’ 강의 평가 한 줄이 다시 앨리스와의 악연을 소환한다. 앨리스, 너냐? 앨리스, 너마저도...... 앨리스, 난 이상한 나라에 와 있는 것 같다.  


커피를 너무 마셔 더 이상은 속이 쓰려 마실 수 없던 날 밤에 억지로 깨서 수업 준비를 하기 위해 마신 허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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