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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내리는 눈 Nov 13. 2020

데스 커뮤니케이션, 죽음을 말하다.(1)

벗을 잃고 나는 쓰네

지선 씨.


 당신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당신을 불러 보는 나의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지만 생전 당신이 읽었다고 하는 책을 보니 조선의 문인들은 가까운 벗을 기리기도 하고 조금 먼 문우를 추억하기도 하며 애곡 하는 마음을 서간문으로 달랬더군요. 이제껏 연예인의 SNS에 가서 댓글을 달아본 것은 당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작은 인연이 당신과 나 사이에 있습니다. 웃을 일 없던 어떤 날 당신의 아줌마 연기에 한바탕 웃고 트위터에 가서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웃긴 것 같다고 남긴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나에 대해 당신은 아무것도 모를 테니 간단하게 제 소개를 해 보겠습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실패한 소통 박사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는데 아직도 일상에서 소통이 서툴고, 학문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실패했고, 누가 나를 박사로 불러 주면 낯이 뜨거운 사람 이외다. 공부할 때는 박사라면서 무식해서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았습니다. 학계에서 우리끼리만 발표하고 거절당하고 수정하고 돌려 보는 논문들을 읽기도 바빠서 전공에 관련되지 않은 책은 일 년에 한 권도 읽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웃음을 주는 일로 나보다 훨씬 바빴던 지선 씨는 살아서 책을 참 많이 보셨더군요. 당신이 인터뷰에서 언급한 책 '벗을 잃고 나는 쓰네'를 읽다 보니 이런 구절이 있더이다.


김유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채만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이렇게 외친다. "될 수만 있다면 나 같은 명색 없는 작가 여남은 갖다 주고 다시 물러오고 싶다."

 당신은 먼저 간 좋은 벗을 그리며 이 구절을 읽었습니다. 당신이 말하길 그 벗은 당신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국어 교사였고, 마음이 통하는 진실한 벗이고, 대학 때 만나 가장 사랑했고, 당신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주었다는 그 사람을 먼저 보내고 당신은 당신 같은 사람 여남은 갖다 주고 그 사람을 되찾고 싶은 심정에서 이 구절에 밑줄을 쳤다고 했습니다. 지금 이 책을 읽고 나니 내 심정이 그렇습니다. 나처럼 명색 없는 박사 여남은 갖다 주고 이 겸손한 코미디언 하나를 물러 오는 게 이 세상에 더 보탬이 되지 않을까? 그만큼 나는 당신이 아깝습니다. 당신은 지금 안식을 찾았다 하더라도 남은 나는 그렇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한 세미나에서 데스 커뮤니케이션 (Death Communication)이라는 분야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야의 선구자인 사람은 자기가 커뮤니케이션 박사인데도 모친이 죽고 난 후 자기의 슬픔에 대해 남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고 남이 자기에게 무슨 말을 해도 다 싫고 괴로운 마음이 들어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연구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름을 기억하고 있으면 좋을 텐데 죽음이라는 화제의 특성상 학계의 대세인 양적 연구가 아닌 질적 연구 (인터뷰, 포커스 그룹 등 소규모 표본에 기댄 연구)라 중요치 않게 여기고 그 학자의 이름을 그만 잊어버렸습니다. 죽음을 우리가 어떻게 인위적으로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죽은 자와 남겨진 자를 연구 방향에 맞는 대량 표본으로 구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에 대하여서라면 질적 연구가 당연한 접근 방식일 텐데도 그런 방식은 덜 과학적이라고 무시되는 게 학계의 인식입니다. 요즘은 커뮤니케이션은 과학이 아니라는 열등감을 벗어나기 위해서인지 다들 빅데이터에 집착하는 듯하더군요. 이미 나는 대세와 너무 거리가 멀어져 잘은 모르지만요.


 어릴 때 막연했던 죽음이란 화제가 점점 내 인생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매 번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몰라서 우왕좌왕했습니다.


 미국에 있는데 친한 후배가 부친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어 어떻게든 위로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상주 노릇을 하고 있는 바쁜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헛소리를 늘어놓다가 기어코 "누나,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상중 이어서요. 장례식장에 돌아가 봐야 해요."라는 이야기까지 듣고 말았던 것이 처음 나의 경거망동이요,

 같이 성경 공부를 하며 매주 만났던 장래가 촉망되는 똑똑한 동생이 육체의 고통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얘기를 듣고 뒤늦게 그녀의 홈페이지를 찾아가 그녀의 남은 어머니가 보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최대한 위로가 되는 방명록을 남기고 싶었지만 그녀가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밤마다 그린 눈물 흘리는 자화상을 보고 나니 너무나 죄스러워 내가 남기는 모든 위로가 거짓 같아 아무 말도 남길 수 없었던 것이 두 번째 나의 회피였고,

 가장 바쁜 시기에 연구에 집중해도 모자랄 시간에 유산을 하여 나는 학문적으로도 생산적이지 못하고, 여자로서도 생산을 못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인가 하는 생각에 눈물조차 흐르지 않던 그 밤이 세 번째 나의 현실이었고,

 한국에는 어쩐 일로 갔다 오냐는 출입국 심사관의 말에 할머니 상을 당해 갔다 온다 하니 유감이라며 연세가 어떻게 되시냐고 묻는 그에게 나는 여든 살이 넘으셨었다, 하고 그는 아주 안쓰러워하던 표정을 거두고 '아, 그러면 그래도 그렇게 슬프진 않겠네' 하여 속으로 '여든 살이 넘으면 죽어도 되는 것인가? 우리 할머니가 어떤 할머니인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내 할머니인데!' 하며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영주권도 없는 에일리언 신분이니 출입국 심사대에서 쫓겨나기 싫어 그저 씁쓸한 미소밖에 지을 수 없었던 것이 네 번째 나의 죽음에 대한 기억입니다.


 이밖에도 나이를 먹어 가면서 점점 죽음이란 화제는 남의 일에서 내 피붙이에게로, 내 속으로 파고들어 왔습니다.


 지선 씨, 당신은 아십니까? 나는 정말 죽어도 이 글을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가 유산한 이야기 같은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고 또 누가 관심이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선 씨가 간 이후로 데쓰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무어라도 쓰지 않으면 다른 글은 한 줄도 못 쓸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삼성전자에 다니는 사람이 한 명 늘어나면 세상에는 핸드폰 한 대가 더 늘어나는데 커뮤니케이션 박사가 이렇게 세상에 많은데 왜 세상은 아직도 불통인가요?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하기 위해 10년의 세월을 투자했고 읽은 책과 논문이 수백, 수천인데 왜 나는 아직도 죽음에 대해 한 마디도 의미 있는 말을 할 수 없나요. 아니, 왜 나 한 사람의 슬픔조차 어찌 극복하면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는 걸까요.


 당신이 밑줄 그었던 글귀가 어떤 맥락 속에 자리했던 건지, 당신의 남은 자로서의 슬픔은 어땠었을까 이해하기 위해 '벗을 잃고 나는 쓰네'를 읽다 보니 소파 방정환 선생을 기리는 글이 있더군요. 방정환 선생은 타고난 연설가이자 솜씨 좋은 동화구연가였는데 어느 소년회에서 <산드룡의 유리구두>라는 슬픈 이야기를 실감 나게 낭독했고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부인석에 있던 할머니 한 분이 두 눈이 퉁퉁 붓도록 흐느끼어 울면서 두 손을 합장하고 그의 앞으로 와서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선생님 참말 감사합니다." 하고 허리를 굽혀 몇 번이나 절을 하였다. 그는 언뜻 더운데 수고했다는 소리로 잘못 알고, "천만에요. 도리어 같지 않은 이야기를 들으시느라고 더 괴로우셨겠습니다."라고 하였더니, 할머니는 질겁하다시피 몸 자세를 바꾸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니, 더우신데 괴로우셨겠지만, 그보다도 그 불쌍하고 마음 착한 '산드룡'이를 나중에 잘 되는 것으로 끝을 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입니다."


 지선 씨.

 나는 이 글에서 내가 끄적이는 이유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누구는 우쭐대기 위해 글을 쓴다 하고 누구는 위로하기 위해 글을 쓴다 합니다. 나는 내가 왜 쓰고 싶은지, 왜 써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아직 몰랐습니다. 이유를 모른 채 배설하는 글들이 이 세상에 근심만 한 점 더하는 게 아닐까 하여 모조리 다 지우고 싶은 순간이 왔다가, 그다음 순간이 오면 또 내 안에 떠오르는 문장들을 뱉지 않고는 못 버티겠어서 쓰곤 했습니다. 방정환 선생의 이야기를 들은 할머니가 계모와 나쁜 언니들이 혼나는 인과응보의 세상을 꿈꾼 것이 아니라 그저 불쌍하고 착한 신데렐라가 잘 되어 몇 번이나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린 것에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 덕에 하나의 이유를 발견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당신은 가신 후에도 남에게 의미를 선물하는군요.


 데쓰 커뮤니케이션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논문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 보니 이거 보통 방대한 영역이 아니더군요. 그렇습니다. 나란 인간은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거라서 죽음이란 화제의 당사자이면서도 마치 본인은 천년만년 살 관찰자에 불과한 것처럼 남 얘기인 논문을 읽어야만 하는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 방대한 영역 중에서 조금 좁혀 들어가 가까운 사람을 잃고 남은 사람들이 죽음을 어떻게 말하는지, 우리는 이 화제를 입에 올리기가 얼마나 힘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털어놓아야 하는 이유가 있을지 공부해 보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떤 생각들이 떠오른다면 내가 앞으로 쓸 글들이 불쌍하고 마음 착한 산드룡이를 살리는 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품어 봅니다. 내 교만도 용서해 주십시오. 명색 없는 박사라서 그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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