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종이 냄새

2021년 6월 24일의 기록

by 바다에 내리는 눈

새로운 도시에 가게 되면 나는 미술관을 먼저 가 본다. 한 도시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답고 뒤틀리고 신랄한 것들을 모아 정제해서 보여 주는 그곳에 가면 도시를 소개하는 짧고 강렬한 아트필름을 본 것 같은 느낌이다. 작년 홍콩에 이사 와서 2주간의 자가격리를 마치고 거의 처음으로 외출한 곳도 미술관이었다. 사실은 침사추이 스타의 거리를 따라 산책하며 집 앞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게 신기하다고 호들갑을 떨다가 갑자기 비가 와서 무작정 뛰어 들어간 곳이 HKMOA 홍콩 미술관이었지만, 어쨌든 나쁘지 않은 홍콩과의 첫 만남이었다. 대충 둘러보고 언제나 그렇듯 마지막 코스로 미술관 서점에 들러 구경하다가 예쁜 그림책을 하나 샀다. This is Hong Kong : A children's Classic [1]이라고 1965년에 처음 출판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유명한 책이다. 친절한 점원이 진열되었던 상품 말고 새 책을 주겠다고 창고를 뒤져 새 책을 가져왔는데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냄새지? 새 책에서 어째서 이런 냄새가 나는 거지?'


이것이 나의 첫 '종이 냄새' 경험이었다. 습하고 무더운 홍콩에서는 에어컨을 세게 틀고 잘 보관하지 않으면 옷이든 책이든 가구든 곰팡이가 피는데 그래서 그런지 곰팡이가 피지 않더라도 종이류나 옷에서 눅눅하고 꿉꿉한 냄새가 날 때가 있다. 특히 택배 상자를 받으면 상자에서 정말 이상한 냄새가 나서 참을 수 없다. 만약 스위스에 살 때처럼 종이류 쓰레기는 한 달에 한 번 지정된 날짜에만 버릴 수 있었다면 미쳐 버렸을지 모른다 (스위스 바젤의 지독한 재활용 분리수거 정책에 대해서는 나중에 꼭 따로 소개를, 아니 불평을 하려 한다). 내가 그렇게 냄새에 예민한 사람도 아니다. 책이 수만 권 모여 있는 미국 대학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공부도 해 보고 파리의 오래된 고서점에서 책을 사 본 적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새 책에서 냄새가 날 거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해서 그런지 처음 종이 냄새를 맡았을 때의 기억은 너무나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때 산 책의 제목처럼 'This is Hong Kong, 마, 이게 바로 홍콩이다!'라고 외치듯.


홍콩에 약속의 무지개가 뜨길 바라며.

때로는 곰팡이 냄새는 아니지만 익숙한 다른 냄새가 나를 덮칠 때도 있다. 여자들은 향수, 바디로션, 화장품 같은 것들을 발라서 잘 모르겠는데 가끔 중년의 사내들이 지나가면 나프탈렌 냄새가 확 날 때가 있는데 그러면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어렸을 때 할머니 댁에 놀러 가서 장롱에 숨어야지, 광에 숨겨 놓은 주스 가루를 털어 먹어야지 (오렌지 주스는 귀한 거라서 병문안 선물로나 들고 가던 시절이라 가루를 물에 타서 주스를 만들어 먹던 시절), 하고 장롱이나 광문을 열었을 때 나던 바로 그 나프탈렌 냄새가 8, 90년대를 그리워하는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켜서 그런 것 같다.


나프탈렌 냄새로 타인의 옷장을 상상해 보면 거리의 수많은 인파 중 하나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이 내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종이 냄새가 예술가와 나 사이의 거리를 확 좁혀 줄 때도 있었다. 샤틴에 있는 홍콩 문화박물관에 가서 인쇄물에 관한 전시를 본 적이 있는데 마음에 드는 작품들 중 여러 점이 한 작가의 것이었다. 스타일에서 느껴지는 과하지 않은 생동감과 젊고 단순한 기운이 좋았다.

홍콩문화박물관 Printing 전시회에서 만난 Onion Peterman의 작품들

Onion Peterman.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지만 검색을 해 보니 인스타그램에 공식 계정이 있어서 그의 다른 작품들도 감상할 수 있었고 인스타그램에서 연결된 그의 홈페이지에서 작품을 구입도 할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 결제를 하고 기다리는데 홍콩이 작아서 그런가, 단 하루 만에 배달이 왔다. 작가가 직접 포스트잇에 내 이름과 함께 감사 인사까지 써서 보내 주었는데 엽서, 책, 포스터 등 모든 작품에 특유의 나프탈렌 냄새와 미처 제거되지 못한 눅눅한 습기를 머금은 종이 냄새가 묘하게 섞여 있었다. 박물관의 전시실 유리장 안에서는 잘 펴져서 무취의 상태로 불특정 다수를 위해 전시되어 있던 그의 포스터가 내 손에 들어왔을 때는 접힌 자국과 종이 냄새가 더해져 조금 더 특별해졌다. 눈앞에 한 광경이 펼쳐진다. 월세 비싸기로 악명 높은 홍콩에서 작업실을 따로 얻기 힘든 젊은 예술가가 자기의 좁은 방에서 생활하고 작업하고 작품을 포장하고 수신인에게 메모까지 쓰고 있는 풍경. 나는 벌써 작가의 방에 들어갔다 나온 느낌이다. 삶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삶이 되는 현장까지 작품에 실려 나에게 배달되었다.


작가의 메모. 감동적이었다.
홍콩문화박물관에 전시되었던 판화는 11번째고 내게 배달된 것은 40번째. 앞으로 남은 30점의 작품은 어디로 갈까?

또 한 번 종이 냄새에 멜랑꼴리를 느꼈을 때는 주말마다 취미로 배우러 다니는 영남화 (Lingnan Painting) 수업 시간이다. 집에서 연습을 하겠다고 서점에 가서 종이를 잔뜩 샀는데 수묵화용이 아닌 서예용 화선지를 산 건지 종이에 코팅이 된 듯 먹물을 토해 내면서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시범을 보여 주는 선생님의 솜씨와 초보자인 내 솜씨 사이의 간극을 감안해도 이건 너무 하다 싶을 정도로 안 그려졌다. 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는 법이라지만 내가 종이를 잘못 샀다는 결론을 내려도 자기중심적이거나 어리석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미 산 종이들은 포기하고 선생님에게 가서 새로 종이를 좀 달라고 해서 받았는데 그 종이들에서 또 냄새가! 얼마나 오래 묵었는지 약간 누레진 화선지에서 선생님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수업이 있는 완차이 홍콩 예술대에 학생들 물건을 보관할 공간이 없어서 매 수업 시간마다 선생님은 여행가방을 끌고 오신다. 그 안에 학생들이 쓸 돌로 만든 문진과 물통, 선생님 본인의 종이, 먹, 벼루, 붓 등 물건들이 한가득인데 이 무더위에도 와이셔츠에 양복바지를 입고 무거운 캐리어를 탈탈탈 끌고 오시는 선생님을 보면 고맙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요즘 홍콩은 우기라 거의 매일 비가 쏟아져서 선생님을 뵐 때면 항상 양복바지 밑단은 젖어 있고, 잘 다려 입은 와이셔츠 소매에는 시범을 보이면서 묻은 먹물 자국이 있다. 날씨에 상관없이, 먹물 묻을 것도 개의치 않고 고작 취미반 학생들인 우리에게 예의를 차리느라 복장을 갖춰 입은 노인이 야윈 손목으로 무거운 여행 가방을 끌고 다니는 뒷모습이 구부정해도 품위 있고 당당하다. 스위스에 돌아가서 영남화 연습을 하려고 종이를 펼치면 선생님이 집에서부터 가져온 오래 묵은 종이의 눅눅한 냄새가 확 퍼지며 순식간에 나를 홍콩으로 데려다줄 것 같다. 그러면 나는 그냥 시간을 때우기 위해 대충 붓을 휘두를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예의를 갖추어 진심으로 나를 가르쳤던 것처럼 나 역시 영남화에 예의를 갖추어 진심으로 연습할 것이다. 비 오는 날 양복바지를 입고 무거운 가방을 혼자 기꺼이 끄는 마음으로 내게 주어지는 홍콩 이후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궂은날을 아름답고 격 있게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한 사람의 이름, Liu Meng Kuan을 기억하며 [2].


2021년 6월 24일 목요일. 어제는 홍콩 역사에 기록될 날이었다. 홍콩에 마지막 남은 반중 매체인 빈과일보 (Apple Daily)가 사실상 강제 폐간당한 날이다. 캐주얼 의류 브랜드 지오다노의 창업자인 지미 라이가 만든 빈과일보는 초기에는 자극적인 연예 가십 기사 위주로 비판받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정치적인 목소리를 드높인 유일한 반중 성향 일간지였다. 지미 라이는 본토 출신이지만 1달러를 들고 홍콩에 건너와 자수성가한 인물로서 자기가 이룬 모든 것들은 홍콩이라는 도시 덕분이라고 자기를 성공시켜 준 홍콩의 가치들을 수호해서 빚을 갚고 싶어서 투쟁을 이어간다고 했다 [3]. 전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자국의 위기를 수습하기도 바빠서 홍콩의 민주주의에는 주의를 기울일 수 없던 지난 2년 동안 홍콩에서는 선거제도가 개편되어 민주 세력은 집권할 수 없게 되고 중국은 홍콩 보안법을 통과시켜 지미 라이 등 민주 인사들을 체포하였다. 빈과일보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주, 편집국장, 주필 등이 체포되고 모든 회사 자산이 동결되어 더 이상 발행이 불가능하여 어제 마지막 신문 100만 부를 찍어내고 홍콩 시민들에게 인사를 고했다. 폐간을 알리는 신문 1면에는 스마트폰 조명으로 홍콩의 빈과일보 사옥을 비추는 한 지지자의 손과 함께 '빗속에서 고통스러운 작별을 고한다'는 헤드라인이 실렸다 [4].


출처 연합뉴스 https://news.v.daum.net/v/20210624094919249

Galileo Cheng, 출처 https://www.instagram.com/galileocheng/

홍콩 시민들은 24일 자 신문이 만들어지는 23일 저녁부터 빈과일보 사옥 앞에 모여들어 신문사를 응원하고 24일 새벽 1시부터 신문 가판대에 줄을 서서 마지막 빈과일보를 샀다. 아침 출근길에는 우산을 쓰고 세네 시간씩 줄을 기다려야 신문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신문을 사는 줄에 서 있던 한 시민의 인터뷰가 인상적이다 [5].


잃어버린 역사지만 다음 세대가 이런 일을 알게 하는 게 우리 책임이어서 신문을 삽니다.


2021년 6월 24일 자 빈과일보는 폐품으로 변질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버려지지 않고 홍콩의 습기를 머금어 눅눅한 그대로 후대에 전달되는 역사가 될 것이다. 청년들이 장년이 되고, 어린이들이 청년이 되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들이 이 땅에 왔을 때 펼쳐 보면 이 신문을 사던 날 사람들의 마음에 내리던 빗줄기까지 그대로 전해지겠지. 빈과일보는 빗속에서 고통스러운 작별을 고했지만 그것은 잠시 잠깐 독자들과의 안녕일 뿐이다. 민주주의와의 영원한 작별이 아닐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압제와 굴종 속으로 박제되지 않는다. 고인 것은 흐르게 되고, 묶인 것은 풀어지고, 억눌린 것은 터져 나간다. 그게 순리라고 나는 믿는다.


홍콩을 사랑하는 아티스트들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마지막을 추억하며 미래를 약속한다.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베어 문 사과가 거름이 되어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심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자라게 하고 결국엔 이 땅에 수많은 사과 열매들이 맺히는 사진으로 홍콩을 위로한 사진가 Tommy Fung [6]. 결의에 찬 표정으로 빈과일보를 상징하는 사과를 베어 물고 그림을 그려 나가는 자기의 모습을 그린 Onion Peterman. 이들의 작품을 보며 나는 안심하고 떠난다. 홍콩은 한때 좋았노라고 화양연화(花樣年華)를 회고하는 추억의 땅이 아니라 언제고 다시 돌아와 지금 참 아름답다고 감탄할 수 있을 곳으로 지켜 줄 사람들에게 맡기고...... 안녕 나의 도시, 나의 친구 홍콩. 唔該晒. 拜拜. 음꺼이사이. 바이 바이.


Onion Peterman의 말: '앞으로도 계속 하던 일을 열심히 해 나가겠습니다.


[1] This is Hong Kong : A children's Classic, Miroslav Sasek (2018) UNIVERSE PUBLISHING

[2] Nature in ink and paper (Liu Meng Kuan 선생님의 개인전 기사) https://www.thestar.com.my/news/community/2013/11/18/nature-in-ink-and-paper-hong-kong-artist-pays-homage-to-his-master-in-solo-exhibition

[3] Hong Kong billionaire's last interview as a free man - BBC News 04/17/2021 https://www.youtube.com/watch?v=sf-qyxEIuHI

[4] 반중 빈과일보 결국 폐간... 홍콩 시민, '눈물의 작별' (2021.6.25.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54403&CMPT_CD=P0001&utm_campaign=daum_news&utm_source=daum&utm_medium=daumnews

[5] 마지막 신문 찍어낸 '빈과일보'…"홍콩에 미래는 없다" (2021.06.24/뉴스데스크/MBC) https://www.youtube.com/watch?v=HQjT0uF4DuE

[6] Tommy Fung, https://www.instagram.com/surrealhk/?h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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