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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잘리 Sep 26. 2019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

쏘가리 매운탕의 추억

20년이 훨씬 더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내 입가엔 옅은 미소가 지어지곤 한다.




1994년 2월 가족 모두 설을 맞아 시골에 있는 외갓집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겨울이야 원래 춥고 눈이 내리지만 그 해 겨울, 설 명절은 유독 더 춥고 많은 눈이 내렸다.


설 연휴를 하루 남기고 인사를 마친 후 서둘러 집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섰는데 전날부터 내리던 눈이 심상치가 않았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일이고 자연재해야 더욱이 사람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 하루 더 있다 가라는 외할아버지의 만류에도 아버지 직장과 학교 때문에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무작정 출발을 해야만 했다.


출발은 했지만 그 날 그렇게 많은 눈이 내릴지는 가족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정말이지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잠시도 그치지 않고 눈은 내리고 또 내렸다. 우리는 시골길을 채 벗어나지도 못하고 오가지도 못하는 상황 꼼짝없이 도로에 갇혀 버렸다.


도로에 갇힌 것은 우리 차만이 아니었다. 하필 설 연휴라 평상시였다면 차가 조금은 덜 했을 텐데 연휴 탓에 많은 차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듯나와 하나같이 폭설 탓에 멈춰서 버린 건 마찬가지였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내가 그날을 기억하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진행자가 폭설로 인한 휴교령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다. 도로에 갇힌 건 잠시 잊고 휴교 소식을 전하는 진행자의 말에 그저 좋아 손뼉 치던 철없던 시절의 나였다. 


하지만 단 하루 휴교라며 좋아했던 기쁨의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1분에 한 걸음도 채 움직이지 못하는 차 속에서 시간이 갈수록 우리 가족은 추위와 배고픔 속에 긴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눈이 계속해서 내리는데 설상가상 휴게소도 주유소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골 도로야 모두 다 알 듯이 겨울이 되면 얼어붙은 논과 산이 전부 아니던가 주머니에 돈이 있음 뭐하나 사 먹을 곳이 없는데 내리면 뭐하나 쏟아지는 눈만 맞을 뿐 사람들도 지쳤던지 내려서 스트레칭을 하는 사람, 제자리 뛰기를 하는 사람, 아예 차를 두고 내려 눈싸움하는 아이들까지 가지각색이었다.


나와 가족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어갔다. 유럽을 가는 것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차에 있었던 것 같다. 난 이미 뒷자리 좌석에 엄마 무릎을 베고 누운 지 오래였다. 그럴 줄 알았으면 조리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도 싣고 올 것을 차에 한가득 실린 음식들은 전부 외할머니께서 주신 말린 나물, 마늘, 콩, 찹쌀, 깨, 등이었다.


휴게소에서 사 먹겠다며 일찍 출발한다고 점심까지 걸렸는데 해는 점점 지고 더 이상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우린 다시 외갓집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차를 돌렸다. 돌아가는 길도 만만치는 않았다.


눈길에 체인도 없이 차는 자꾸 옆으로 미끄러져 도로 옆으로 빠지려 하고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보다도 더한 스릴을 맛보며 뛰는 심장을 잡고 그렇게 걷다시피 눈 속을 헤치고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다시 외갓집으로 향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피로와 허기에 지친 엄마께서 창밖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저기 매운탕 집 인가 봐, 쏘가리 매운탕이라고 쓰여 있네, 장사했으면 먹고 갔으면 딱 좋겠는데 문을  닫았나?”


모두들 지쳐있던 터라 딱히 누가 대답하진 않았지만 춥고 배고팠던 우리 가족 모두 아마 머릿속으로는 이미 쏘가리매운탕을 맛있게 먹고 있었을 것이다.




겨우 외할아버지 집에 다시 도착하고 우리 모두는 녹초가 되어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생각을 조금 바꿔보기로 했다.


다시 되돌아온 덕분에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하루를 함께 더 보낼 수 있었고 추위에 얼어있던 몸과 마음이 외할머니의 따뜻한 밥과 국 한 그릇에 눈 녹듯 녹아내렸으며 평생에 두 번은 없을 학교 휴교령까지 맞았으니 하루종일 차에 갇혀 지치고 짜증나던 순간들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를 더 보내고 눈이 그치고 날이 맑아진 후, 다시 집으로 출발하며 우리는 그 날 폭설 속에서 엄마가 보았던 쏘가리 매운탕 집에서 점심을 먹고 가기로 했다.


한참을 달리고 달려 엄마가 보았던 쏘가리 매운탕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이상하게 아무리 찾아도 매운탕 집은커녕 다른 어떤 건물 한 채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말 그대로 허허벌판뿐이었다. 쏘가리매운탕 팻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가족 모두 한참을 쏘가리 매운탕 집을 찾던 그때! 내 눈에 들어온 땅에 꽂아진 낡은 나무 팻말 하나.


팻말에 적힌 글자는 바로 쏘가리매운탕 아닌 쓰레기매립장이었다.


당시 폭설 속에 춥고 배가 너무 고프셨던 나머지 엄마 눈엔 쓰레기 매립장이 쏘가리 매운탕으로 보이셨던 것. 

쓰레기매립장 글자를 확인한 순간 우리 가족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렇게 한참을 웃고 또 웃었다.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이 아닐까?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도 불평불만을 먼저 말하기보다는 그 상황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면 힘든 상황이 조금은 더 쉬워질 수도 짜증 나고 힘든 속에서 우리는 생각지 못한 교훈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도 잊혀지지 않는 가슴 따뜻한 추억의 한 페이지를 남길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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