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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잘리 Sep 27. 2019

울리지 않는 전화

우리 하동 덕

어린 시절 난 방학 때가 되면 언제나 외갓집을 찾았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함께 방학 기간 동안 지내다 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 다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시절 외할머니 동네에서는 할머니들 이름을 부르는 대신에 모두 결혼하기 전 살았던 지역의 이름을 붙여 부르곤 했었다. 그래서 동네에서 불리던 나의 외할머니 이름은 하동 덕이었다.


친척들과 우리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날이면 우스갯소리처럼 늘 하던 이야기가 있었는데 바로 외할아버지와 하동 덕의 결혼이 3대 미스터리 중 하나라는 것이었다.


이유인즉슨 외할아버지는 가난했지만 인물 좋고 머리 뛰어나기로 동네에서 일등이셨고 그와 반대로 하동 덕은 손녀인 내가 객관적으로 냉정히 판단해 아무리 보아도 외할아버지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분이셨다.


그런 하동 덕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이라면 단 한 가지, 하동 덕 집안이 동네에서 소문난 부자 만석꾼 집안이라는 것, 외할아버지는 영어, 일어에 능통하셔 젊어서 부산 세관에서 근무하셨던 반면 하동 덕의 집은 부유했으나 여자를 밖으로 돌리면 안 된다는 요즘 같으면 말도 안 되게 고지식하셨던 하동 덕의 아버지 탓에 학교를 다니지 못해 말 그대로 자신의 이름 석자 적기 힘들 정도의 까막눈이셨다.


또한 말 수가 적은 외할아버지와 달리 하동 덕은 하루 종일 혼잣말이라도 중얼거릴 정도로 말수가 너무 그것도 지나치게 아주 많으셨다. 아마 걸음수를 측정하는 만보계처럼 하루의 말을 측정하는 기계가 있었더라면 용량 초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고장이 날 정도였다.


그런 하동 덕이 하루 중 가장 많이 사용했던 단어 중 하나는 “몰라”. 어떤 말을 하시 던 지 항상 말의 끝엔 몰라를 붙이셨다. ~~ 했는지 몰라, ~~ 하는 가 몰라, ~~ 아닌 가 몰라, 이렇게 하루 중 거의 대부분 사용하시는 말의 끝엔 습관처럼 “몰라”라는 단어를 붙여 말씀하셨다. 


정말이지 그 당시 어린 내 눈에도 하동 덕은 외할아버지에 비해 외모도 아니었고 말도 지나칠 정도로 많으셨으며 모르는 것도 너무나 많으신 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하동 덕은 나에겐 큰 할머니셨던 자신의 시어머니를 93세 돌아가실 때까지 지극 정성으로 모셨고 자식들에게도 아까운 것 없이 하나라도 더 내어 주려고 하시던 누구보다 마음 따뜻한 분이셨다. 나는 남보다도 못했던 친할머니보다 답답하고 융통성 부족하고 투박하지만 인간미 넘치는 그런 하동 덕이 더 좋았다.




시간이 흐르고 내가 첫 직장에 입사해 다니고 있던 어느 해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그 이후 시골집에 하동 덕 홀로 남아 지내시게 되었다. 하지만 혼자 남은 하동 덕은 외할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와 달리 편지 한 통도 제대로 읽고 쓰지 못하셨고 전화 한 통도 혼자서는 걸 수조차 없게 되셨다.


자식들의 설득도 모두 뿌리치시며 도시에는 갑갑해 살기 싫다는 하동 덕의 고집 탓에 시골에 매일 전화를 하던 엄마와 나는 혼자 계시는 하동 덕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휴일 외갓집에 내려간 엄마와 나는 생각 끝에 하동 덕 집 전화기 재다이얼 버튼에 우리 집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스티커 하나를 붙인 후 재다이얼 버튼 하나만 누르면 엄마에게 전화할 수 있다는 수차례의 교육 끝에 마침내 우리 집 전화 걸기에 성공했다.



“내가 전화할 라나, 못 할라나 몰라.” 하셨던 하동 덕이었지만 다행히 그 날 이후 매일 하동 덕은 엄마에게 재다이얼 버튼 하나만 눌러 전화를 하셨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그렇게 전화 재다이얼 버튼을 가르쳐 드린 뒤부터 하동 덕은 하루에 적게는 열 통에서 많게는 서른다섯 통까지 식사시간 빼곤 거의 하루 종일 전화기 앞에서 재다이얼 버튼을 누르셨다.


금방 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잊어버리고 말 안 하게 있다며 또 하시고 동네 사람들 이야기에 수십 년 전 지나간 옛날 옛적 이야기까지 그렇게 매일 하루에도 수십 통씩 하동 덕으로부터 전화가 울려댔다.


혼자 계신 탓이지 하면서도 십 년 넘게 이어진 끝없는 전화벨 소리에 엄마도 조금은 지쳐갈 때쯤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온종일 울리던 전화가 단 한통도 울리지 않았다.


놀란 마음에 전화를 걸어 왜 전화 안했냐는 엄마의 물음에 “몰라, 어떻게 전화하는지”라고 말하는 하동 덕. 


잊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우리가 나이 드는 사이 하동 덕은 더 많이 늙고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 아흔을 바라보고 있는 하동 덕은 다리에 힘이 약해져 걷는 것도 전보다 많이 불편해지셨고 밥을 드셨는지, 약을 먹었는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전화 재다이얼 사용법은 까맣게 잊으신 채로 거의 누워서 하루를 보내고 계신다.


흐르는 세월에 하루가 다르게 변하시는 하동 덕을 이제는 자연스레 받아들여야겠지만 언젠가 전화를 걸어 “할머니”를 부르면 “누구냐? 네가 누군지 몰라”라고 하실까 봐 문득 두렵기도 하고 마음 한 구석이 시리게 아파온다. 


십 년 넘게 매일 수도 없이 울리던 전화벨 소리에 가끔은 지치고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오늘은 왠지 종일 그렇게 울려대던 하동 덕의 전화 벨소리가 너무도 그리워지는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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