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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Jul 27. 2021

성냥켜는 소녀

- 다시 쓰는 안데르센의 세계명작 : 성냥팔이 소녀

이곳은 꿈의 방이에요. 꿈을 꾸는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양초 위로 꿈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곳이죠. 


"제 꿈은 우주비행사가 되는 거에요. 아직 발견되지 않은 행성도 찾고 싶고, 외계인과 친구도 되고 싶어요." 

"저는 꼭 가수가 될 거에요. 노래할 때가 제일 행복하거든요." 

"인형머리를 양갈래로 땋아줄 때 알게 됐어요. 내가 제일 잘하는 건, 머리를 땋는 거구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헤어디자이너가 될 거에요." 


아이들의 꿈이 도착하면 꿈의 방을 지키는 소녀는 치익-하며 성냥을 켜요. 

"이 아이가 계속 꿈을 꿀 수 있기를..." 

소녀는 두 손 모아 빌어준 뒤, 양초에 불을 밝혀요. 


그런데 큰일이에요. 오늘 도착한 꿈은 고작 세 개 뿐이에요. 불을 켠 양초보다, 불을 켜지 못한 양초가 몇배는 더 많아졌어요. 예전에는 꿈의 방이 꿈의 불빛으로 가득 넘쳤어요. 꿈의 방을 들어올 때마다 눈부셔서 두 눈을 찡그려야 할 정도였죠. 하지만 지금은 꿈의 방을 들어올 때마다 소녀는 한숨부터 나왔어요. 

꼭 어두컴컴한 지하실 같았거든요. 간신히 불이 붙어있던 양초도 어느 날은 훅 하며 꺼지기도 했어요. 

아이가 더는 꿈을 꾸지 않게 됐다는 뜻이었죠. 아이들이 꿈을 잃어갈 수록 성냥켜는 소녀는 멍하니 양초만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어요. 


"안되겠다. 아이들이 왜 꿈을 잃어가는지 알아봐야겠어!" 

성냥켜는 소녀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소녀는 자신의 키만한 커다란 배낭에 마실 물과 초콜릿, 

양초 몇자루. 그리고 제일 중요한 성냥을 챙겨넣었어요. 

신발끈까지 꽉 동여맨 소녀는 힘차게 꿈의 방을 나섰어요. 


바깥은 꿈의 방보다 더 어두운 회색도시였어요. 자신이 동여맨 신발끈처럼 넥타이를 꽉 매고, 

비슷한 서류가방을 든 어른들은 멀뚱멀뚱 서 있는 소녀와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휴대폰만 쳐다보며 바쁘게 걸음을 재촉했어요. 모두가 하나같이 바빠보였어요. 소녀는 그 중 한 어른을 붙잡고 물었어요. 


"어디 가시는 길인가요?"

"어디로 가긴. 당연히 회사로 가는 중이지. 늦으면 절대 안된단다. 오늘까지 꼭 해야할 일이 있거든."

"그 일을 다 하고 나면 어떻게 되는데요?"

"어떻게 되긴. 사장님께 칭찬을 받겠지."

"사장님께 칭찬을 받으면 좋은 건가요?"

"물론이지. 승진을 할 기회가 생기잖니."

"승진이요? 승진하면 좋은 건가요?"

"얘야. 승진해야 돈을 더 벌 수 있단다." 

"돈이 많으면 좋은 건가요?"

"돈이 많아야 행복해지지. 나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단다."

"돈을 많이 버는 게, 아저씨의 꿈인가요?" 

"꿈? 글쎄다. 하지만 나는 돈을 많이 벌어야해. 그러니 얘야! 이만 길을 비켜주겠니? 내가 너무 바빠서 말야." 


회색빛 하늘처럼 회색빛 양복을 입은 어른은 아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갔어요. 

그 때 소녀는 보았어요. 회색빛 양복을 입은 어른의 등을 힘껏 밀고 있는 그림자를 말이죠. 


"꿈을 먹는 그림자. 너로구나!!" 


맞아요. 어른의 등 뒤에 붙어있는 그림자는 꿈을 먹고 사는 녀석이에요. 꿈이 사라진, 더는 꿈을 꾸지 않는, 

꿈이 뭐였는지조차 잊어버린 어른들 곁에는 언제나 이 그림자가 붙어 있어요. 소녀의 힘으로는 어른들의 

그림자를 떼어내는 일은 역부족이에요. 어른들 스스로 꿈을 먹는 그림자를 떼어내야 하는데, 어른들은 오히려 그림자를 더 불러모으죠. 한 때 어른도 이런저런 꿈을 꾸는 아이였던 때가 있었겠죠.  

하지만 자랄수록, 커갈수록 꿈의 불빛은 사그라졌어요. 성냥켜는 소녀가 아무리 불을 붙여보려해도 

어른이 되어버린 그들의 양초에는 더는 불이 붙지 않았어요. 


뚜벅뚜벅, 또각또각. 

모두가 바쁘게 걸어가는 틈 사이에서 성냥켜는 소녀는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하늘을 찌를듯이 높이 올라간 빌딩에는 층층마다 일하고 있는 어른들의 모습이 보였어요. 

모두 하나같이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며 구부정한 자세로 모니터만 바라보는 모습이었어요. 

그 주위에는 꿈을 먹는 그림자들로 가득해서, 이 도시는 점점 색을 잃어가고 있었죠. 


성냥켜는 소녀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어요. 고개를 숙이고 걷다보니 도착한 곳은 '학교'였어요. 

운동장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그 때였어요. 학교 수업이 끝났다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어요. 

소녀는 상상했어요. 곧 이 운동장에 아이들로 가득차겠구나. 축구하는 아이들, 철봉에 매달리는 아이들, 

뛰어노는 아이들의 목소리로 왁자지껄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교실에서 나온 아이들은 

소녀의 상상과는 조금 달랐어요. 


중얼중얼 영어 단어를 외우며 걸어가는 아이. 학원에 늦었다며 뛰어가는 아이. 

문제집 한장을 마저 풀어야 한다며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 

채점을 마친 시험지를 들고 한 문제 틀렸다며 울먹이는 아이. 


소녀는 이 아이들의 눈동자를 바라봤어요. 모두 텅 비어 있었어요. 빛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죠. 

이 때 '치치'라고 하는 아이를 만나게 됐어요. 인형 머리를 아주 잘 땋는다며, 헤어디자이너의 꿈을 꾸던 아이. 그 아이가 바로 치치에요. 소녀는 반가운 마음에 치치에게 달려갔어요. 


"치치! 안녕. 너의 꿈은 헤어디자이너. 맞지? 요즘도 인형 머리를 땋아주니?" 

"인형머리? 아니. 난 그럴 시간이 없어." 

"어째서? 넌 헤어디자이너가 꿈이잖아."

"맞아. 꿈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냐. 지금은 1등을 하는 게 내 꿈이야." 

"1등을 하는 게 너의 꿈이라고?"

"엄마가 그러셨어. 1등을 해야 진짜 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뭐든 될 수 있다고."


소녀는 보았어요. 치치의 발 밑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오고 있는 그림자를 말이죠. 

치치의 꿈이 사라지고 있다는 거였어요. 치치가 더는 행복하지 않다는 거였어요. 


"치치. 지금 넌 행복하지 않구나."

"괜찮아. 1등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어." 


소녀는 배낭에 있는 성냥갑을 꺼내, 치익-하고 성냥에 불을 붙여 보았어요. 성냥에 붙은 불은 치치의 

꿈이었어요. 불이 붙기는 했지만, 불꽃이 몇번 흔들거리더니 푸스스 꺼져버렸어요.   


"치치. 방금 너의 꿈이 사라졌어. 지워졌다고."

"맞아. 사실 지금 내 머리속에는 1등 생각만 있어서, 내 꿈이 뭔지 잘 모르겠어. 솔직히 되고 싶은 게 

 없어졌어. 엄마 말대로 1등을 하고나면 뭐라도 할 수 있겠지."  


치치는 슬퍼보였어요. 하지만 그러는 새에 치치 발밑에 있던 그림자는 점점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어요. 

꿈틀꿈틀 꿀렁꿀렁 움직이더니, 이제는 치치를 집어삼킬만큼 몸집이 커져버렸죠. 

소녀는 너무 놀랐어요. 그림자를 떼어내려고 그림자의 오른팔을 잡아보았지만, 힘이 세져버린 그림자는 

소녀를 가뿐하게 밀쳐냈어요. 기세등등해진 그림자는 한손으로 치치를 움켜쥐며 하늘 높이 들어올렸어요. 


"꺄악- 살려줘!!! 너무 무서워!!" 

그림자는 한손에 치치를 움켜쥐고, 또 다른 아이에게 손을 뻗었어요. 그 아이는 우주비행사를 꿈꾸던,

'론'이었어요. 론은 그림자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영어단어를 외우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소녀는 론의 꿈이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해 성냥에 붙을 붙여보았어요. 치익-하고 타올랐지만, 순식간에 

하얀 연기만 남긴채 꺼져버리고 말았죠. 론도 더이상 꿈을 꾸지 않게 됐어요. 그림자는 그 사실을 알고 론에게 다가갔던 거에요. 그림자는 씨익 웃으며 론의 발목을 낚아채 거꾸로 들어올렸어요. 


"으아아악! 도와줘!! 날 구해줘!!" 


소녀는 성냥에 불을 붙여 그림자를 향해 힘껏 던졌지만, 꿈이 사라진 아이들의 불꽃은 활활 타오르지 

않았어요. 그 때였어요. 이어폰을 꼽고 흥얼흥얼 노래를 하던 '줄리'가 소녀에게 달려왔어요. 


"지금 네 무릎에서 피가나. 넘어진거니?"

"넌... 줄리구나! 가수가 꿈이라던 줄리!" 

"맞아. 난 노래할 때 제일 행복하거든."

"그 꿈은 변함없니?"

"당연하지." 

"1등을 못해도, 백점을 맞지 못해도 가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을거니?"

"물론! 1등 좀 못하면 어때. 백점 좀 못맞으면 어때. 난 나를 사랑해. 내 꿈을 사랑해." 


소녀는 치익-하고 성냥에 불을 붙여 보았어요. 줄리의 꿈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예전보다 더 크게 활활 타올랐어요. 소녀는 붉은빛을 내며 타오르는 줄리의 꿈 성냥을 그림자를 향해 힘차게 던졌어요. 성냥에 붙은 꿈의 불꽃은 그림자의 몸에 닿는 순간 수십개의 음표모양으로 변하면서 타닥타닥 불꽃을 일으켰어요. 

그림자는 당황하며 주춤거렸지만, 줄리의 불꽃만으로는 그림자를 쓰러뜨릴 수 없었어요. 


"치치! 론!! 너희가 진짜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걸 떠올려봐!! 너희의 꿈을 잃지마!!!" 

소녀는 소리쳤어요. 소녀의 외침을 들은 치치와 론은 두 눈을 꼭 감고 자신의 꿈을 떠올려봤어요. 

치치와 론의 꿈은 1등도 아니고, 백점을 맞는 것도 아니었어요. 


소녀는 다시 성냥에 불을 붙였어요. 치치의 꿈이 담긴 불꽃이 파란빛을 내더니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어요. 소녀는 그 성냥을 그림자를 향해 힘껏 던졌어요. 그 순간 불꽃은 커다란 가위 모양으로 변하면서 그림자를 싹둑싹둑 잘라냈어요. 하지만 그림자의 힘도 만만치 않았어요. 잘라내면 또 다시 생겨나고, 

또 다시 생겨났어요. 소녀는 다시 성냥에 불을 붙였어요. 론의 꿈이 담긴 불꽃은 노란빛을 내더니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어요. 소녀는 론의 꿈이 담긴 성냥을 힘껏 그림자에게 던졌어요. 

그 불꽃은 우주비행선으로 변하더니, 그림자의 심장에 펑-하고 내리꽂혔어요. 

강한 충격을 받은 그림자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죠. 


"치치! 론! 너희들 괜찮니?" 

소녀는 달려가 물었어요. 치치와 론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어요. 줄리의 표정도 마찬가지였죠. 

어쩌다가 자신들이 운동장에 주저 앉아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가 않았어요. 


"넌 누구니?"

론이 소녀에게 물었어요. 


"난 성냥켜는 소녀야. 너희들의 꿈이 사라지지 않도록, 매일 성냥에 불을 붙이지. 

 고마워. 치치! 론! 줄리! 너희들이 꿈을 잃지 않은 덕에 아이들 모두를 살릴 수 있었어." 


맞아요. 치치와 론, 줄리 덕분에 꿈을 먹는 그림자, 꿈을 훔쳐가는 거대한 그림자를 물리칠 수 있었어요.

야금야금 아이들의 꿈을 먹는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아이들은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어요. 

아이들이 꿈을 지켜갈수록 파란빛, 노란빛, 붉은빛을 내며 활활 타올랐어요. 

후우-하고 바람을 불어도 꺼지지 않았죠. 


이제 소녀는 다시 꿈의 방으로 돌아가야해요. 소녀는 치익-하고 성냥에 불을 붙였어요. 

그 불꽃은 아이들의 꿈이 담긴 영롱한 불꽃이었죠. 그 때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통화하며 바쁘게 걸어가는 

어른이 보였어요. 어른의 등 뒤로는 그림자가 어깨에 찰싹 매달려 있었죠. 어른은 그림자를 끌고 가느라 

힘겨워보였어요. 소녀는 슬쩍 불이 붙은 성냥 하나를 그림자를 향해 던져보았어요. 

아이들의 꿈으로 뭉쳐진 불꽃은 축구공, 음표, 가위, 우주비행선, 물감으로 변해 그림자에게 날아갔어요. 

당황한 그림자는 요리조리 몸을 움직이며 도망치려 했지만, 소용 없었어요. 끝내 불꽃의 힘을 견디지 못한

그림자는 점점 작아지더니, 연기처럼 사라졌어요. 그 순간 바쁘게 걸음을 옮기던 어른이 갑자기 멈춰섰어요. 

어른은 길거리에 놓인 피아노로 시선을 옮겼죠. 


"내 꿈은 피아니스트가 되는 거였는데..." 

어른은 길거리 피아노로 다가가 앉았어요. 그리고는 깊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어요. 그 표정은 무척 행복해보였어요.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려댔지만, 

어른은 피아노를 연주하며 모처럼 행복해했어요.  




여전히 이 도시는 회색빛이에요. 꿈의 방에는 타오르지 않고 있는 양초들로 가득하죠. 

성냥켜는 소녀는 아이의 꿈을 먹어치우고, 어른의 꿈을 훔쳐가는 그림자 녀석을 물리치기 위해 

오늘도 길을 나서야해요. 그 길은 쓸쓸하고 힘들죠. 하지만 성냥켜는 소녀는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을거에요. 끝까지 꿈을 먹는 그림자와 싸울거에요. 


내 꿈을 훔쳐가는 그림자. 

곁에서 야금야금 내 꿈을 먹고 있는 그림자. 

혹시 여러분은 그 그림자를 본 적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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