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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Oct 14. 2021

2인자

조형디자인학과 졸업반이었던 보라는 여전히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보라! 아직도 졸업작품 때문에 고민 중? 못 정한거야?"


같은 과 동기가 보라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얼굴을 양팔에 파묻고 있던 보라는 좀비처럼 스르륵 일어나더니, 밤새 잠을 못자 부은 얼굴로 대답했다.


"어. 미치겠어. 그냥 백지상태야. 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지? 교수님의 말도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인간의 내면을 투시해서 조각으로 형상화 시켜라? 야! 그게 뭔 말이냐?"


"글쎄. 이렇게 작업실에만 푹 파묻혀사는 네가 인간의 내면에 대해서 뭘 알겠니? 사랑도 해보고, 이별도 해보고, 화도 내보고, 울어도 보고, 막 네 감정을 표출해봐! 머리로만 생각하지 말고, 이 가슴으로 느껴보란 말야. 알겠냐? 이 작업실 귀신아??"


보라는 동기 말에 자신의 지난 시간들을 떠올려봤다. 과거를 떠올려봤을 때 뭐라도 턱턱 걸리는 게 있어야 재생버튼을 멈추고 또 멈출텐데, 하염없이 돌아가는 cctv처럼 특별히 걸릴 것도 인상 깊은 것도 없는 시간.

한마디로 지루하고 밋밋함. 이 한줄이 보라의 대학생활을 말해주고 있었다.

일탈해 본 적도 없고, 신호를 어긴 적도 없었다. 누군가 규칙을 정하면 그 규칙대로 행동했고,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자책하고 반성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어릴적부터 들어왔던 보라는 부모님의 말씀대로만 살면 행복해지고, 성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열심히 살수록, 반듯하게 살수록 사람들은 보라에게 '융통성이 없다', '꽉 막혀있다', '답답하다', '올드하다', '심심하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졌다.


보라 스스로도 자신의 이런 이미지를 바꾸고 싶어했다. 단발로 헤어스타일을 바꿔보기도 하고, 파격적으로 히피펌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친구들의 관심은 딱 하루 뿐이었다. 얼마 못가 보라는 또 사람들 속에 파묻혔고

그저 바른 모범생이라는 이미지는 결코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보라를 더욱 답답하게 만든 건, '2인자'라는 꼬리표였다.


"우아~ 윤미야! 이번에도 네 작품이 제일 높은 점수 받은거야? 너 이거... 일주일 만에 완성한 거 아냐?

 와... 너 진짜 천재 아니냐? 이걸 어떻게 일주일만에 완성하냐?"


그랬다. 보라와 같은 과 윤미는 '1인자' 였다. 보라의 눈에는 딱히 '노력'이라는 걸 하지 않음에도 좋은 점수를 받고, 칭찬을 받고, 주목을 받는 윤미가 영 못마땅했다.


'분명 뭐가 있어. 돈을 썼거나, 점수 주는 교수를 꼬셨거나.'

보라는 짧은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아슬아슬한 원피스를 입고 맨살을 훤히 드러내며 웃고 있는 윤미를 위 아래로 쳐다봤다. 그 때 윤미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윤미는 모델처럼 또각또각 보라를 향해 걸어왔다. 긴 머리를 시원하게 쓸어올린 윤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보라야. 난 이번에 네 작품이 진짜진짜 좋았는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가슴이 막 벅차오른달까...?

 온갖 감정이 다 뒤섞여서 꽉 차고도 흘러넘치는 마음! 그런 거 표현한 게 맞지??"


윤미는 부담스럽게 눈까지 깜빡거리며, 두 손을 모으고 보라를 쳐다봤다.

보라는 입술을 한번 쭉 내밀다가, 마지못해 말했다.


"어.. 뭐. 그런거 저런거 다 때려넣었지 뭐."

"푸핫. 뭐? 때려넣어?"


윤미는 건들거리며 웃더니, 이번에는 보라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보라야. 마음에 쌓인 감정은 다른데 가서 풀고, 작품을 만들 땐 좀 덜어내려고 노력해봐.

 다른데서 못푸니까 작품에서 푸는 거잖니... 안그래? 나 먼저 간다~"


윤미는 보라의 어깨를 톡톡 두들기고는 손인사를 하며 앞서 걸어갔다. 기분이 더러워진 보라는 윤미의 손길이 닿은 자켓을 벗어던지며 욕을 내뱉었다.  년.. 년.. 년... 이라고.


"야! 오늘 술마시자!"

보라는 뒤에 있던 동기에게 짜증섞인 말투로 말했다.

동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 물었다.


"술? 방금 네 입에서 술 얘기가 나온거야? 오올~ 무슨 바람이 불었대? 혹시 너... 윤미한테..."

"아니거든?? 그래. 맞아. 기분 더러워서 술로 소독 좀 해야겠다."

"오케이! 그럼 오늘은 언니가 화끈하게 쏜다! 군말 없이 따라오는거다!!!"


사실 보라는 조용한 포차를 가길 원했다. 하지만 동기 손에 이끌려 따라간 곳은 시끄러운 음악이 고막을 사정없이 때리는 어느 클럽이었다. 동기의 강요로 입술을 새빨갛게 칠하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보라는 모든 것이 불편하고 낯설었다. 자꾸만 어깨가 움츠러들었고, 허리는 굽어졌다.


"보라야!! 뭐하니? 공벌레냐? 몸을 왜 이렇게 말고 있어? 누가 너 잡아먹겠대?"

"야!!!! 여기 너무 시끄럽다!! 이렇게 소리지르면서 대화해야 하는거야?"

"대화? 몸으로 대화하면 되지~ 춤추자!!!"


현란한 조명과 머릿속을 쿵쿵 울려대는 음악, 다닥다닥 붙어있는 낯선 사람들. 누군가의 진한 향수냄새. 술냄새. 땀냄새. 방향제 냄새. 온갖 어지러운 냄새들이 뒤섞여 보라는 더욱 정신이 혼미했다.

술을 급하게 마신 탓인지 눈이 팽글팽글 돌아가는 것 같은데 동기는 자꾸만 보라의 양 팔을 잡으며 뱅글뱅글 돌자고 재촉했다.


"돌은 년"

보라 자신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동기는 못들은 듯, 재차 물었다.

"어? 뭐라고?"

"돌았어~ 돌았다고~~~"

년 소리를 듣지 못한 동기는 보라의 말에 숨넘어갈 듯 웃으며 이제는 보라의 정수리에 자신의 검지손가락을 꾹 누르고, LP판마냥 보라를 뱅글뱅글 돌려대는 시늉을 했다.

"그래! 돌자. 미친듯이 돌아보자!"


보라는 동기의 장단에 맞춰 뱅글뱅글 돌았다.


"우욱..."

갑자기 속이 불편해진 보라는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결국 다 개워내고 나자 그제서야 속이 편해진 보라는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어서 밖으로 나갔다. 화려한 클럽 안에 비해 클럽 밖은 꽤나 비루했다.

깜깜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쓸쓸하고 처량한 모습이었다.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양팔로 몸을 감싸며, 까만 시스루 블라우스를 쓸어내린 보라는 "으~ 춥다" 하면서

다시 클럽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근처 골목에서 누군가 말다툼하는 소리가 났다.

평소 같으면 그냥 무시했을텐데, 흔히 클럽 밖 남녀의 투닥거림이 아닌 여자와 여자가 다투는 소리가

그날따라 보라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뭐지? 남자 하나 때문에 두 여자가 싸우는건가..."


보라는 힐끔 골목 안을 쳐다봤다. 그리고 너무 놀라 다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보라의 눈앞에 나타난 두 여자는 다름아닌 윤미와 전공과목 B교수였다.


'두 사람 여기서 뭐하는거야...?'


보라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기 위해 건물 벽 뒤로 몸을 숨겨, 바짝 두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B교수는 팔짱을 낀채 돌아서 있는 윤미에게 뭐랄까. 애절하게 매달리고 있는 듯 했다.


"윤미야. 너 갑자기 왜 그래. 네가 이러면 안되잖아."

"안될 게 뭐 있는데요? 교수님이 그랬잖아요. 영원한 마음은 없다고. 맞아요. 영원한 건 없어요.

 교수님을 사랑했지만, 이제 제 마음이 변했어요. 그것 뿐이에요."

"거짓말하지마. 넌 나 못떠나. 나같은 사람 다시는 못만나."

"아니요. 내가 그날 교수님 남편에게 이 뺨을 맞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아세요? 정말 기분 더러웠어요.  교수님 남편이 나를 무슨 벌레처럼 쳐다보는데... 와... 다 말하고 싶은 거 꾹 참았다고요!"

"알아.. 네 맘 다 알아..."

"호텔로 저를 부른 건, 교수님이었어요. 저를 보자마자 엘리베이터에서 키스를 퍼부은것도 교수님이었고요. 그런데 그 엘리베이터를 교수님의 남편 분이 타실 줄은 꿈에도 몰랐겠죠. 뭐. 그럴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다음! 교수님은 저한테 뭐라고 하셨죠? 나를 따라다니는 스토커에 정신나간 년이라고 했죠.

멋대로 나를 사랑해서 이러는거라고. 미쳐 날뛰는 애라고..."


보라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 들을수록 심장이 튀어나갈 것처럼 쿵쾅거렸다. 클럽 안을 가득 메운 음악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빠르고, 크고, 세게 뛰고 있었다.


"윤미야. 우리 정말 좋았잖아. 지금도..."

"교수님. 남편하고 이혼할 수 있어요? 봐. 못하잖아. 교수님 돈줄인데 어떻게 포기가 되겠어... 됐고요. 이참에 다 정리해요. 지금 교수님 애도 있잖아. 육아에도 전념하셔야지..."


윤미는 돌아섰고 B교수는 가려는 윤미의 팔을 붙잡았다. 혹여 걸릴까 싶었던 보라는 잰걸음으로 다시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술에 취해 혀가 반쯤 접힌 동기는 보라를 보더니 와락 안겼다.


“보라야~~ 너 어디갔던 거야! 뭐하다 왔어?”

“뭐하긴.. 화장실! 화장실 갔다왔지..”

“어?? 윤미다! 윤미도 왔네?”

“뭐?? 켁켁”


물을 마시다가 동기 말에 놀란 보라는 사레까지 들리며 켁켁거렸다.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을 보니 정말 방금 전에 본 윤미가 맞았다. 보라의 심장은 다시 또 쿵쾅거렸다. 윤미와 눈이 마주칠까 싶어 조명에 반짝거리는 맥주잔만 바라봤다.


“야! 나 안되겠다. 집에 가야겠어..”

“뭐어? 이제 재미있어 지려는데 가긴 어딜가”

“일어나자. 너 많이 취했어.. 가자! 얼른 가자!!”


보라는 싫다는 동기의 팔을 질질 잡아끌고 택시에 태워보냈다. 힘이 쭉 빠진 보라는 터덜터덜 걷다가 환하게 불이 켜진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아까부터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던 보라는 냉동실 바닥에 있는 바닐라콘 하나를 집어 근처 공원으로 걸어갔다. 고요하고 아무도 없는 공원벤치에 털썩 앉아 아이스크림을 한입 먹는데 자신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허.. 그거였네.. 계속 1인자로 머물 수 있었던 이유..”


보라는 윤미의 대단한 약점을 잡은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학교에서 마주친 윤미는 여전했다. 여전히 거만하고 재수가 없었다. 평소 같으면 작업실에 출근도장 찍자마자 나갔던 윤미가 오늘은 목을 뚜둑뚜둑 소리나게 꺾으며 스트레칭을 하더니, 털썩 자기 자리에 앉았다.

엉덩이 가볍게 왔다갔다 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보라와 윤미, 오직 두 사람만 꿋꿋하게 몇시간째 작업에만 몰두했다. 윤미는 졸업작품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사실 보라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흙덩이를 동글동글하게 만들었다가, 주먹으로 퍽퍽 내리쳤다가, 주물거렸다가 할 뿐이었다. 

적막이 찾아왔고, 작업실에는 두 사람만 남게됐다. 둘만 남게 되자 보라는 윤미를 더욱 힐끔거렸다. 


"아까부터 계속 나만 쳐다보던데, 왜? 나한테 할 말 있어?" 

"어? 아..아니!"

"그럼? 내가 어떤 졸작을 낼지 지켜보고 있던거야?" 

"아니.. 그냥. 작업실에 있는 네가 신기해서." 


윤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무런 말이 없으니 보라는 더욱 입이 근질거렸다. 


"너 말야... 남자친구 있어?" 

뱉어놓고 너무 유치한 질문인 것 같아서 보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윤미는 보라의 말에 피식 웃는듯 싶더니 정색을 하며 말했다. 


"어제 다 봐놓고 무슨 소리야?" 

"어...?" 

보라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서늘하게 바라보는 윤미의 눈빛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온몸이 떨려왔다. 

입술에도 마비가 온 것처럼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보다니... 뭘?" 

"교수님한테는 말 안했어. 네가 우리 사이 안다는 거. 걱정마. 어제 봤다시피 난 교수님하고 끝났고. 

 네가 까발린다고 해도, 괜찮아. 난 딱히 잃을 게 없거든. 그리고 말야..." 


윤미는 조용히 일어나 보라에게 다가왔다. 허리를 굽혔고, 보라의 귀에 속삭였다. 


"사람들이 네 말을 믿을까? 오히려 2인자가 1인자 깎아내리는 소리로 밖에 안들릴 것 같은데...? 

 증거도 없잖아! 안그래?? 그래서.. 두 번째는 서러운거야...." 


윤미는 이번에도 보라의 어깨를 톡톡 치더니, 한쪽 입꼬리만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보라야. 내 작품이 계속 좋은 점수를 받은 게, 너는.. 그거 때문이라고 생각했구나? 그럼 이번엔 진짜 제대로 붙어보자. 내 작품이 더 좋은 점수를 받을지, 네 작품이 더 좋은 점수를 받을지... 나 먼저 간다." 


보라는 윤미가 앉아있던 자리로 가보았다. 자리에는 가시관처럼 생긴 조형물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보라가 윤미를 의식하며 힐끔거리는 사이, 윤미는 졸업작품으로 내 놓을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감정에 동요하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는 윤미를 보고나자, 보라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초조함에 휩싸였다. 

불현듯 보라는 가방을 챙겨 윤미의 뒤를 쫓았다. 


그 때부터였다. 보라는 윤미를 스토커마냥 숨죽이며 쫓았다. 학교를 나선 이후에는 무엇을 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지켜보고 또 지켜봤다. 하지만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러던 중 보라를 당황하게 만든 건, 윤미의 소개팅이었다. 


"뭐야. 남자를 만나??" 


그랬다. 소개팅 이후, 윤미는 남자친구가 생겼다며 동기들에게 자랑했고, 학교 앞으로 윤미를 만나러 남자친구가 찾아오기도 했다. 보라는 혼란스러웠다. 


'일부러 저러는거야? 아니면 남자도.. 여자도.. 사랑할 수 있는건가?' 


그런데 보라만큼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이 또 있었다. 바로 B교수였다. 보라처럼 B교수도 윤미에게 미련을 못버리고 스토커마냥 윤미의 뒤를 쫓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못가 모습을 드러내며, 윤미의 팔을 낚아챈 건, 어느 허름한 모텔 앞이었다. 


"너... 남자친구를 이런데서 만나니?" 

"이거 놔요.. 교수님하고 아무 상관 없잖아요." 

"그 놈 그만 만나. 그놈이랑 당장 끝내." 

"교수님. 남자친구가 기다리고 있거든요? 저 좀 놔주실래요?" 

"안되겠다. 잠깐 차에 타봐."

"저는 교수님이랑 할 말 없어요.."

"일단 차에 타. 타..! 타라고!!!" 


윤미와 B교수는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윤미는 마지못해 B교수 차에 올라탔다. 보라는 두 사람을 놓칠새라 급하게 택시를 잡아탔다. 


"아저씨.. 저기.. 앞에 저 차 좀 따라가 주세요. 빠...빨리요!!" 


도착한 곳은 어느 호텔 앞이었다. 조금 전까지 모텔 앞이었는데, 지금은 호텔 앞이라니... 

보라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러다가 오늘이 기회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택시에서 내린 보라는 호텔 로비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막 체크인을 마친 B교수와 윤미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보라는 당당하게 물었다. 


"스위트룸이 몇 층이죠?" 


보라는 25층 버튼을 눌렀다. 25층까지 언제 올라가나 싶었지만, 눈깜짝할 새에 25층에 도착했고 

보라는 조심스럽게 복도를 서성였다. 그런데 그 때였다. 철컥하면서 문이 열리더니, 윤미가 나왔다. 

깜짝 놀란 보라는 복도 끝에 위치한 커다란 조형장식물에 몸을 숨겼다.  


"저 집에 갈래요."

"윤미야 제발..."

"얘기하자면서요. 그런데 왜 또 호텔이에요? 저 이제 이런 거 싫어요." 

"하. 뭐라고? 이제 이런 거 싫어? 왜? 새로 사귄 남자친구가 잘해주나보지?" 

"그런 게 아니고요..." 


그때였다. B교수는 윤미의 목덜미를 낚아채더니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키스를 퍼부었고, 윤미는 힘껏 저항했지만, 이내 온 몸이 축 쳐지더니 교수님의 두 뺨을 잡으며, 두 사람은 다시 방 안으로 깊숙히 빨려들어갔다. 

철컥. 문이 닫혔고 복도에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보라는 딱 10분만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 10분. 10분 후에 저 방으로 쳐들어가자. 문이 열리자마자 사진부터 찍어야지. 

허! 증거가 없다고? 딱 기다려... 증거사진...! 수십장, 수백장 찍어줄 테니까.' 


다짐했던 10분이 지났고, 보라는 두 사람 들어간 문 앞에 섰다. 그런데 문을 두드릴 용기도 벨을 누를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 꼼짝 없이 서 있는 채로 또 10분이 흘렀다. 그런데 그 때. 방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신음소리 같기도 하고, 흐느끼는 소리 같기도 하고. 아주 희미했지만 듣고나면 기분이 나빠지는 소리임은 분명했다. 소리를 듣고나자 용기가 생긴 보라는 바로 문을 두들겼다. 


"누...누구세요." 


흠칫 놀란 B교수의 목소리였다. 보라는 아무 말 없이 또 방문을 쿵쿵 두들겼다. 


"자..잠시만요!" 

문은 바로 열리지 않고,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에 열렸다. B교수의 얼굴은 땀으로 흥건했다. 그리고 보라를 보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너가 여기에 왜..." 

"교수님... 윤미 어딨어요?" 

"뭐??" 

"제가 다 봤어요. 아니, 다 알아요. 윤미랑 여기 같이 들어가신 것도 봤고요."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윤미는 보이지 않았다. 보라는 당황하며 커다란 창문 밖으로 야경이 펼쳐지는 스위트룸을 헤집고 다녔다. 윤미는 없었다. 


"말도 안돼... 여기 밖으로 통하는 문이 또 있는 거에요?" 

"무...슨 소리야... 윤미 여기 안왔어."

"교수님!!!!" 


그 순간 화장실이 눈에 들어왔다. 다 둘러봤지만, 딱 한군데, 화장실만 확인을 못한 보라는 화장실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런 보라를 B교수가 양팔을 벌리며 막았다. 


"안돼!!!" 

"네...?" 


그제서야 보라의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화장실 앞 카페트에 묻은 희미한 핏자국이었다. 

커피를 흘린 자국인가 싶었지만, 커피라기에는 선홍빛이었다. 


"교수님....." 

초점을 잃은 B교수의 눈동자는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와보세요. 나와보시라고요!!" 

보라는 B교수를 밀치고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우욱..." 

보라는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화장실 욕조에는 온 몸이 새빨간 피로 뒤덮인 윤미가 있었다. 


"교수님...." 

"자꾸 나를 떠나려고 하잖아!!!!" 


B교수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윤미는 날 사랑해. 나만 사랑해야해. 그런데 자꾸 나를 밀어내잖아... 이제 더는 날 사랑하지 않는대. 

 내가... 이제 내가 끔찍하대........... 흑....으흑흑..." 

"그렇다고 사람을 죽여요...?" 


보라는 두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 앉았다. 살아있는 두 사람과 죽어있는 한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보라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말했다. 


"교수님. 이렇게 하면 어때요...?" 


보라는 B교수의 귀에 대고 속삭였고, B교수는 보라의 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윤미 그 기지배도 진짜 정 없어. 갑자기 유학을 가는 경우가 어딨니? 인사도 없이? 그래도 좋겠다. 

 교수님 추천으로 유학까지 가고 말야."

"어? 어..." 

"그런데 보라야. 너 요새 계속 작업실에 없던 것 같은데, 아니 언제 저런 근사한 작품을 만들었대?" 

"아... 틈틈히.. 했지 뭐..." 

"아니 근데 볼수록 대단하다. 조각이 아니라 진짜 사람같아. 여기여기.. 디테일 좀 보소. 아니 근데 

 얼굴 말야.."

"어??" 

"윤미랑 되게 닮았다. 너 혹시...." 

"혹시.. 뭐....?"

"아냐. 작품 이름하고 딱이다 야! 작품명까지 아주 그냥 완벽하다! 완벽해!!"  


보라는 동기의 칭찬을 부담스러워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 때 B교수가 들어왔다. B교수는 보라를 한번 쓱 쳐다보더니, 오른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다들 졸업작품 준비하느라 고생많았어. 그리고 이번 졸업작품 전시회에는 다들 알다시피 너희들의 다음 

 스텝을 열어줄 관계자들이 여럿 오신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네~ 교수님! 그래서 졸작이 중요한 거잖아요. 그나저나... 메인으로 서게 될 작품은 뭐에요??" 

"그래. 그거 얘기하러 온거야. 이번 졸업전시회 메인은... 보라야! 고생했다." 


보라는 크게 놀라지도 기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옆에 있던 동기가 격하게 기뻐하는 바람에 보라의 어색한 미소는 금세 지워졌다. 


"대박! 보라야! 드디어 너도 빛을 보는 날이 오는구나. 우리 작업실 귀신. 오구오구 고생했어. 거봐 내가 

 뭐랬어. 이번 작품 진짜 근사하다니까?" 

"어..? 어.. 고..고마워." 


B교수의 말대로 보라의 작품은 졸업전시회 메인으로 놓이게 되었다. 

나체의 여성이 얼굴을 무릎사이에 파묻고 마치 울고 있는 듯, 아니면 웃고 있는 듯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는 조각상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조각상에 먼저 눈이 갔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작품 앞에 한참을 서서 바라보다가 

살며시 작품명을 확인했다. 


작품명  <애증> . 


비로소 보라는 2인자의 꼬리표를 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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