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여덟인 민현은 절대적으로 믿었다. 이번 사업 만큼은 절대 망할 일이 없을 거라고.
사업은 마치 랜덤박스와 같았다. 그럴싸한 커다란 박스 안에 무엇이 담겨 있을지 모를 랜덤박스를 보며,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는 내가 갖고 싶었던 물건이 나오기를 상상하며 설렘으로 채워지는 마음.
꼭 사업을 시작하기 전의 마음과 비슷했다. 내가 원하는 걸 쉽게 얻을 수는 없겠지만, 운이 좋다면 혹시 또... 기대하는 그 마음 말이다. 그런데 대부분 랜덤박스 안의 물건을 확인하고 나면, 실망과 한숨이 교차한다.
오천원짜리 랜덤박스를 샀는데, 그 안에 다행히 오천원 정도의 물건이 들어있다면 그나마 낫지만,
오천원보다 못한 물건이 들어있다면, 그럴싸하게 보였던 랜덤박스는 무참히 짓밟히기도 한다.
사업이라는 게 그랬다. 민현에게는 그랬다. 사업계획만 들어보면 늘 그럴싸 했지만, 막상 열어보면 알맹이
없는 쭉정이 같았다. 식당도 열어보고, 온라인 쇼핑몰도 해보고, 인쇄물 사업도 해보고, 중국에서 일하는
한국인 사업가와 연결해 물건을 판매하는 사업도 해봤지만, 번번히 무너졌다.
이만큼을 투자했지만, 이만큼보다 못한 수익을 내거나, 마이너스였다. 덜 망하거나, 아예 망하거나, 쫄딱 망하거나. 사업을 통해 조금이라도 인생이 나아진 역사가 없었다.
20대에는 다시 일어설 용기라도 있었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지원금도 있었고, 기운 내라며 위로해주는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앞자리 숫자가 '3'으로 바뀌고 나서도 계속 사업에 실패하자, 혹시 그 불똥이 나한테도 떨어질까 싶어 친구들은 민현을 슬금슬금 멀리했다.
민현도 처음부터 사업을 했던 건 아니었다. 비전이라는 게 있을까 싶은 작은 회사에 매일같이 출근하던 때도 있었다. 그런 민현이 사업에 눈을 뜬 건, 중학교 동창회에서였다. 분명 민현보다 못났던 놈이, 민현의 눈에는 보잘 것 없었던 놈이 사업가로 잘 나가며 떵떵거리는 모습을 보자, 심사가 뒤틀렸다. 그 놈이 민현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어떻게 지내냐?'라고 물었을 때는 주먹부터 올라가려는 걸 꾹 참았다. 민현은 그놈이 그냥 재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저딴 놈도 사장님 소리를 듣는데, 나 정도되는 놈은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민현은 그때부터 사업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됐다. 민현이 서른 두 살 되던 해에 누나가 힘겹게 모은 결혼자금을 자신의 사업으로 홀랑 날려먹었을 때도 민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민현이 포기하지 않은 만큼 빚은 쌓여갔고,
부모님이 늘그막에 겨우 마련한 낡은 고향집마저 날려먹고나자, 민현이 짊어져야 할 빚의 무게는 끝내 턱끝까지 차오르고 말았다. 그 빚이 숨통을 조였고, 쫓기게 만들었고, 민현의 인생을 짓밟았다.
"나같은 놈... 살아서 뭐하나..."
지금의 민현이 할 수 있는 건 '죽는 일'이었다. 하지만 제 몸을 끔찍이 여겼던 민현은 아프지 않게 죽는 방법에 대해 눈이 빠져라 검색했다.
"건물에서 뛰어내리면.. 아우... 진짜 아프겠다. 그렇다고 차도에 뛰어들자니 온몸이 다 부러지겠지? 어우...
목을 메는 건... 아냐아냐. 나중에 발견되면 내 얼굴 진짜 최악이겠다. 번개탄? 그거 살 바엔 소주사먹지..
처참하지 않으면서, 발견되기 쉽지 않으면서, 조용히 죽을 수 있는 것... 그래. 그게 좋겠다."
민현은 걸음을 옮겼다. 자주 걷던 곳이고, 종종 지나치던 곳이었다. 한강다리 위였다.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장면이지만, 민현에겐 제일 만만한 방법이었다. 수영을 곧잘 하던 민현은 혹시나 뛰어내린 순간, 갑자기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도 모를테니 만약을 위해 물로 뛰어드는 게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막연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용기가 나기도 했다.
민현은 낡은 운동화를 벗었다. 민현의 등 너머로 수많은 차들이 무심하게 지나갔다. 그 탓에 민현의 뺨을 부딪히는 바람이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엄마.. 아빠.. 누나... 미안해..... 나 없더라도 행복해야해..."
민현은 다리 한짝을 다리 난간에 걸쳤다. 그날따라 한강물이 더욱 시커멓게 보였다. 한번 빠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블랙홀 같기도 하고, 지옥의 입구 같기도 했다. 민현은 덜컥 겁이나서, 그대로 얼음이 됐다.
"아니야... 난 이제 돌아갈 곳이 없어..."
민현은 두 눈을 질끈 감고, 가느다란 두 팔로 다리 난간을 짚으며 몸을 세웠다.
"죽으려는 사람 맞아?"
불쑥 누군가 민현에게 말을 걸었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민현은 이세상과 저세상의 경계였던 다리 난간에
걸쳐놨던 오른쪽 다리를 도로 이 세상에 내려놨다.
"나... 나한테 한 말인가?"
"맞아. 배민현 당신에게 한 말이야."
"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혹시 비..빚쟁이야?"
"빚쟁이는 아니고, 빛쟁이라고 해야할까? 빚 말고, 빛말야. 반짝반짝 빛!"
"미친 사람이네.."
"허! 네 인생을 바꿔줄 은인한테 너무한 거 아냐?"
"제대로 돌았네. 됐고. 가던 길이나 가쇼."
"배민현. 정말 이대로 죽을거야? 네 인생을 바꿀 기회가 있는데?"
"뭐?"
"못믿겠으면 따라오든가."
새까만 긴 머리에 속머리는 빨간색으로 염색한 여자가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를 내며 앞장섰다.
민현은 망설이다가 오늘 죽을 사람인데, 미친 척 하고 따라가보기로 했다.
민현은 바람에 날리는 여자의 검고, 빨간 머리를 바라보며 격차가 벌어지지 않게 뒤쫒아갔다.
30분쯤 걷고 또 걷다보니, 도착한 곳은 어느 인적드문 공터였다. 놀이터라고 하기엔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기구가 하나도 없었고, 공원이라 하기엔 삭막했다. 한마디로 사람이 찾지 않는 버려진 공간 같았다.
"여기 가까이 와 볼래?"
여자의 부름에 민현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여자가 가리킨 곳을 보니,
딱 봐도 낡고 오래돼 보이는 자판기 한대가 있었다.
"하... 장난해? 지금 뭐 코코아라도 뽑아달라는거냐? 나 돈 없어. 땡전한푼 없어."
"배민현. 자판기를 다시 자세히 봐봐."
"자세히 보긴 뭘 자세히..."
민현은 있는대로 짜증을 내며 자판기를 바라봤다. 그런데 어딘가 좀 이상했다. 일반 자판기와는 달랐다.
커피, 율무차, 코코아와 같은 음료는 없었다. 그렇다고 각종 과자와 초콜릿을 뽑을 수 있는 자판기도 아니었다. 자판기 위에는 이런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인생자판기>
"이..이게 뭐야? 인생 자판기???"
"맞아. 배민현 당신이 다시 살아보고 싶은 인생메뉴가 담겨있는 자판기야."
"뭐??"
"이중에서 골라봐. 어떤 인생을 살아보고 싶어?"
민현은 가까이 다가가 자판기를 자세히 살펴봤다.
- 촉망받는 의사의 인생
- 인지도 높은 SNS 스타의 인생
- 매번 주목받는 축구선수의 인생
- 잘 나가는 사업가의 인생
- 존경받는 정치가의 인생
"이.. 이게 다야? 선택지가 겨우 다섯개 뿐이야??"
민현은 여자를 향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런 민현을 보고 여자는 기가 차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배민현.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인생보다는 나은 인생 아닐까? 그래 뭐. 마음에 드는 게 없다면
다시 돌아가도 좋아. 당신이 한강에 뛰어들든 말든 더는 상관하지 않을테니까."
"아...아니! 잠깐만. 근데 내가 이중에서 하나를 고른다 쳐. 그럼 정말 내가 저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당신.. 뭐야? 혹시 천사??"
"풉. 천사로 봐줘서 고마운데, 미안. 공짜로 주겠다는 건 아냐."
"그럼.. 뭐..뭘 원하는데?"
"인생 자판기에서 원하는 인생메뉴 하나를 고르면, 당신이 가진 수명 10년 차감!"
"뭐? 10년...? 정말 그거면 되는거야? 내 남은 수명에서 10년만 차감하면,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는거지? 정말이지??"
"그렇다니까!"
"크하하하하하하하하"
민현은 공터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소리로 웃었다. 이건 비웃음이었다.
"당신 제대로 돌았어. 완전 미쳤어! 그래. 마지막으로 네 장단에 실컷 맞춰주고 이 세상 하직할게.
자... 어디보자. 어떤 인생이 제일 폼나려나... 그래! 이거. 매번 주목받는 축구선수의 인생!!!"
민현은 비이냥거리며 '매번 주목받는 축구선수의 인생'이라는 글씨 아래의 버튼을 툭 눌렀다.
그러자 자판기를 통해 기계음이 들려왔다.
"매번 주목받는 축구선수의 인생을 선택하셨군요. 선택과 동시에 당신의 수명은 10년 차감됐습니다.
남은 삶은 축구선수의 인생으로 멋지게 살아가세요."
띠디딩~ 띵띠딩~
자판기에서는 조악한 팡파레음이 들려왔고, 민현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변한 건 없었다. 입고 있는 옷도 그대로였고, 낡은 운동화도 변함이 없었다.
"뭐야. 매번 주목받는 축구선수? 아무것도 변한 게 없잖아!!"
민현은 따지듯이 소리를 질렀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금까지 민현의 옆에 서 있던 여자도 감쪽같이 사라지고 어디에도 없었다.
"뭐야.. 어디갔어...?"
민현은 두리번 거리며 갑자기 증발해버린 여자의 행방을 찾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찰칵찰칵!
길을 가던 사람들이 우두커니 멈춰서서, 민현을 향해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댔다. 어디선가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축구선수.. 배민현.. 배민현 맞지? 대박!!'
민현은 두 귀를 의심했다. 계속 어리둥절한 채로 지나가는 시민들의 카메라에 담기고 있었다.
누군가는 재빠르게 sns에 업로드했고, 누군가는 실시간 라이브 방송을 하며 축구선수 배민현이 바로 앞에 있다며 큰 소리로 외쳐댔다. 곧이어 싸인을 해달라며 달려드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형! 아.. 여기 있으면 어떻게 해. 한참 찾았잖아."
민현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실눈을 뜨고 자세히 바라봐도 처음보는 남자였다. 그런데 이 남자는 자꾸만 민현을 보고 '형'이라 부르며 왜 여기까지 왔냐며 다그쳤다.
"저...저를 아세...요?"
"뭐.. 뭐라고? 아! 형!!! 또 삐쳤어? 알았어. 알았어. 인정할게! 내가 스케줄 빡빡하게 잡아놓은 거 인정!
그런데 이번 인터뷰가 진짜 마지막!! 이번만 잘 마무리해주면, 나 매니저로서, 또 동생으로서, 형한테 평생
충성할게. 내가 진짜 잘 모실게. 응?"
'매니저? 잠깐만 그럼 나 진짜 축구선수로 살게 됐다고? 방금 저 자판기 진짜야?'
민현은 뒤를 돌아봤다. 그 자리에는 커다란 나무만 있을 뿐, 민현이 자세히 들여다봤던 자판기는 없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래. 꿈일지도 몰랐다. 말도 안되는 꿈.
'혹시.. 나 이미 죽은건가? 그래. 나 한강에 빠졌구나. 나 죽은 게 맞구나...'
민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그러자 그 생각을 한순간에 깨버리듯 옆에 있던 매니저라는 남자가 박수를 치며 말했다.
"어! 형!! 웃었다. 기분 풀린거지? 그치? 자~ 그러니까 얼른 가자! 여기 사람들 엄청 많아..."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민현은 매니저라 불리는 낯선 남자의 손에 이끌려 차에 올라탔다. 차는 배민현의 위치를 말해주듯 최고급 외제차였다. 민현은 차에 타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민현은 호텔 스위트룸에서 깨어났다. 푹신한 베개와 온몸을 감싸는 부드러운 이불 속에서 꼼지락 거리던 민현은 또 다시 매니저 손에 이끌려 경기장으로 향했다.
민현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운동과는 담을 쌓았던 저질체력이었다. 특히 구기종목에서는 영 힘을 못썼다.
축구공은 발로 차야 하는데, 축구공 때문에 발이 걸려 넘어진 적도 있었다.
'내가... 축구선수라고? 축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정신을 차렸을 때, 민현은 이미 경기장 안에 들어와 있었다. 게다가 놀랍게도 휘슬 소리와 함께 민현의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민현 스스로도 놀랄만큼 굉장한 운동신경이었고, 민첩했고 전반적으로 경기를 이끌어가는 타고난 능력을 가진 천재였다. 관중석에 있던 팬들은 배민현을 향해 소리쳤다.
이 날 경기에서 민현 혼자 두 골을 넣었고, 그 두 골로 팀의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뭐야. 쉽잖아?"
민현은 또 피식 웃었다. 민현의 웃는 모습은 '여유로운 승자의 모습'이라며 앞다퉈 신문 1면에 다뤄졌다.
민현의 재능은 더불어 '부'를 가져다줬다. 역대급 연봉을 받는 선수가 탄생했다며 스포츠 평론가들은 민현을 칭찬하기 바빴다. 말 그대로 민현은 어딜가나 매번 주목받는 축구선수였다.
빚에 쫓기고, 그 빚을 갚지 못해 신체포기각서를 쓰고, 끝내 죽음을 선택하려 했던 민현의 인생이 한순간에 역전된 것이었다. 그저 인생 자판기 버튼 한번 꾹 눌렀을 뿐인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됐다.
"예전에는 그렇게 어려웠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쉽지? 다 쉽잖아?"
축구에 타고난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민현은 점점 연습을 게을리 했다. 굳이 연습을 하지 않더라도 민현은 매번 경기에서 놀라운 실력을 보여줬다. 그래서 민현은 더더욱 모든 게 쉽게만 느껴졌다. 많은 부를 축적할 수록 민현은 돈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비싼 술을 마시고, 비싼 차를 사고, 건물을 사고,
돈이 있어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언제든 품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자주 바뀐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 때 한 여자가 민현의 문란함을 언론에 폭로했다. 그 폭로에 대해 민현이 돈으로 해결하려는 게 소문이 나자, 이 여자, 저 여자도 없는 이야기까지 만들어가며 민현을 늪에 빠뜨렸다.
자신의 추악함을 자꾸 돈으로 덮으려 할 수록, 사람들의 시선은 싸늘해졌고 외면하는 이도 늘어갔다.
돈으로도 해결이 안되자, 민현은 제일 먼저 자신의 추악함을 폭로한 여자를 찾아갔다.
"야! 내가 돈 줬잖아. 달라는대로 줬잖아! 그런데 뭐야. 너 때문에 다 망쳤어. 어떻게 할거야. 내 이미지!!
어떻게 할거냐고!!"
"이미지? 배민현 씨. 지금 이게 당신의 진짜 모습이야. 착한 척, 성실한 척 연기 좀 그만해.
난 그저 사실을 말한거야. 당신 진짜 모습에 대해서 말한 것 뿐이라고! 그런데 뭔 놈의 이미지?"
"뭐라고? 그러는 너는? 돈만 보고 달려드는 걸레가 뭐? 진짜 모습을 말한 것 뿐이라고? 그래.
그럼 나도 네 진짜 모습을 다 까발려줘? 이 더러운 걸레야?"
"뭐??? 개만도 못한 놈."
"방금 너 뭐라고 했냐? 개? 개만도 못해? 그럼 어디 개만도 못한 게 어떤건지 보여줘??"
"보여줘봐. 보여줘. 보여줘"
울컥 화가 치밀어오른 민현은 커다란 두 손으로 여자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숨이 막혀오는 중에도 여자는 흰자를 드러내며 표독스럽게 민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더 화가 난 민현은 여자의 얇은 목을 더욱 조여갔고, 여자는 이내 켁켁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힘없이 축, 마치 걸레처럼 바닥에 널부러졌다.
깜짝 놀란 민현은 여자가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숨을 쉬지 않았다. 급하게 심폐소생술을 하기 위해 두 손을 깍지 끼고 여자의 가슴을 눌러댔지만, 흰자를 드러내며 입을 벌리고 있는 여자는 숨을 쉬지 않았다.
땀을 비오듯 쏟아낸 민현은 그 순간 불현듯 '인생자판기'가 떠올랐다.
"그래. 다시.. 내 인생을 다시 세팅하면 되는거야."
민현은 택시를 잡아타고 자신의 기억속에 인생자판기가 있던 위치에 내렸다.
"여기 어디쯤인 것 같은데..."
민현은 두리번 거리며 걸었다. 어느 순간 빛으로부터 멀어졌다 느끼던 그 때, 어두컴컴한 주위를 희미하게 밝히고 있는 자판기가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민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걸음에 달려갔다. 인생자판기였다.
- 촉망받는 의사의 인생
- 인지도 높은 SNS 스타의 인생
- 안정적인 공무원의 인생
- 잘 나가는 사업가의 인생
- 존경받는 정치가의 인생
민현의 계획은 '축구선수의 인생'을 다시 한번 선택한 뒤, 이젠 제대로 살아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축구선수의 인생이 있던 자리에 '안정적인 공무원의 인생'이라는 글씨가 새로 덮여 있었다.
"뭐야. 축구선수 어디갔어. 축구선수 인생!!!"
민현은 고민했다. 그 순간 민현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민현을 찾는 매니저였다. 전화를 여러통 받지 않자, 매니저는 문자를 보냈다. '형.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형이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을거야. 맞지?'
민현은 문자를 보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민현은 다시 인생자판기를 들여다봤다.
"그래. 이번에는 제대로 살아보자!"
민현은 버튼 하나를 눌렀다.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민현은 어느 회의실에서 앉아있었다. 직원으로 보이는 낯선 누군가가 새제품에 대한 브리핑을 하는 중이었고, 민현은 그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설명이 끝나고나자 깜깜했던 회의실에 불이 들어왔고, 그 탓에 민현은 눈을 한번 찡그렸다. 밝음에 눈이 익숙해지자 그때서야 회의실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들은 일제히 민현을 쳐다보며 민현의 대답만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상황을 살펴보니, 민현은 회의실 가장 중앙에 앉아 있었다.
그랬다. 민현은 '잘 나가는 사업가의 인생' 버튼을 꾹 눌렀다.
'하... 이번엔 대기업 사장? 그래. 이거지. 내가 원한 인생이 바로 이거였어!'
비록 이번에도 민현의 남은 수명 중에 10년이 또 차감됐지만, 괜찮았다. 민현은 젊었으니까.
고작 서른 여덟 밖에 안됐으니까. 이번 역시 민현에게는 모든 것이 쉽기만 했다. 민현을 따르는 직원들은 유능했고, 민현의 사업은 계속 성장 중이었다.
'잠깐만... 그 놈. 그 놈을 만나야겠네.'
민현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 놈. 중학교 동창회에서 민현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묻던
그놈이 생각났다. 민현은 당장이라도 자신의 상황을 자랑하고 싶었다. 동창회는 아니지만, 시간되는 중학교 친구들 몇명을 불러 모임을 잡았고, 그 모임에 그 놈도 초대했다. 민현의 인생은 뒤바뀌었지만, 그 놈의 인생은 그 때와 같았다. 여전히 사업가로 꽤나 돈 좀 벌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돈은 민현도 충분히 벌고 있었다. 다만 그놈의 여유로움이 자꾸 거슬렸다. 민현은 잘나가는 사업가의 인생을 살게 됐어도, 이상하게 그놈에게 있는 여유로움이 도통 나오지를 않았다.
민현이 부릴 수 있는 여유는 그저 이런 것 뿐이었다.
"애들아. 맘껏 마셔. 오늘 내가 다 쏜다! 2차, 3차까지 풀코스로 쏠게!!"
민현의 외침에 그놈은 입꼬리를 올리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게다가 그 놈이 민현에게 이렇게 물었다.
"결혼은 아직이지? 언제 결혼할거냐?"
민현에게는 이 말도 거슬렸다. '넌 아직 결혼할 능력이 안되나보다. 여자가 없나봐? 하긴 연애 한번 제대로 해본 적 없지?' 그저 민현의 귀에는 이렇게 들릴 뿐이었다.
"어. 아직. 넌 결혼했다며?"
"어. 우리 애가 벌써 3살이다. 피곤해 죽겠다가도 애 얼굴 보면 피로가 다 사라진다니까. 그래서 둘째도 생각 중이야."
"어... 그렇구나.."
왜 인지 민현은 이번에도 그 놈에게 진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런 중에 민현이 드디어 그놈을 이겼다는 기분이 들었을 때는, 그놈의 아내를 민현의 것으로 만든 순간이었다.
첫 만남은 백화점에서였다. 우연히 그놈과 함께 있는 아내를 보게 됐고, 그 날 이후로 민현은 우연을 가장해
그놈의 아내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우연을 핑계삼아 집까지 데려다줬고, 우연이라며 차를 마셨고,
밥을 먹었다. 그러다 부부싸움을 했다며 연락이 온 그 타이밍을 민현은 절대 놓치지 않았다.
극장 한 관을 통째로 빌려 둘만을 위한 영화가 상영됐고, 요트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 놈의 눈을 피해 민현은 그놈의 아내를 몰래 만났고, 그놈이 가진 것.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것 하나를 뺐었다는 쾌감에 몸을 부르르 떨기도 했다. 문제는 그놈의 아내였다.
민현의 마음과 달리 그놈의 아내는 민현에게 진심이었다. 민현을 사랑하게 됐다.
짜릿한 쾌감을 느끼던 민현이 예상치 못한 전개로 멈칫한 건, 그놈의 아내. 그녀의 임신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 놈은 아내가 드디어 둘째를 임신했다며 좋아했다. 그 둘째의 씨가 민현의 것이라는 것도 모른채 말이다. 민현은 고민했다. 그 놈이 완전히 무너지는 걸 지켜볼지. 이대로 묻어둘지.
"민현씨. 나 이혼할거야. 나 당신이랑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민현씨도 나랑 같은 마음이지?"
그놈의 아내가 적극적으로 민현에게 다가올 수록 민현은 그녀가 성가셔졌다. 그놈의 아내도 떼어내고,
그놈이 무너지는 것도 볼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다 밝히는 것 뿐이었다.
"네 와이프 말야. 참 예뻐."
"이제 알았냐?"
"얼굴도 예쁜데, 숨소리도 참 예뻐."
"어... 뭐?"
"너 말야. 사랑을 나누긴 했어? 둘째말야. 어떻게 생긴 것 같아?"
"그게 지금... 무슨....?"
"생각해보라는 거야. 둘째가 어떻게 생겼을~까?"
"설마..."
"네 와이프.. 진짜 적극적이더라? 너한테도 그러냐?"
퍽!!! 민현의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비릿하고 끈적한 무언가가 주욱 흘러내렸다. 코피였다. 그놈은 민현을 향해 주먹을 날렸고, 민현은 그놈에게 맞으면서도 자꾸 웃음이 났다. 그리고 그날 새벽. 그놈의 아내에게서 연락이 왔다.
"잠깐이면 돼. 잠깐만..."
그놈의 아내는 차를 몰고 민현의 집 앞까지 찾아왔다.
"에이..씨"
민현은 침을 한번 뱉더니,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그놈 아내의 차에 올라탔다. 민현이 차에 올라타자 그놈의 아내는 말없이 차를 몰았다. 동네를 벗어났고, 탁 트인 고속도로까지 달리게 됐다.
그놈의 아내는 말없이 가속페달을 힘껏 밟았다. 민현의 몸이 뒤로 쳐질 만큼 속도가 났고, 차는 부앙부앙 소리를 내고 있었다.
"뭐야. 차세워. 지금 뭐하는거야!"
"그냥.. 나랑 같이 죽자."
"뭐???"
"이대로 같이 죽자고."
"미쳤어? 내가 왜 너랑 같이 죽어!"
"죽자! 그냥 같이 죽자!!!!"
부아아아앙. 차의 속력은 더욱 올라가고 있었다. 게다가 이 차는 역주행 중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둘다 개죽음을 당할 것 같은 기분에 민현은 핸들을 뺏어쥐었다.
"진정해!!"
"놔. 이거 못놔!!"
핸들 하나로 두 사람의 실랑이가 이어졌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던 차는 끝내 옆 길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경사가 높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문제는 그놈의 아내 쪽으로 충격이 많이 가해졌다는 것이었다.
민현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놈의 아내는 머리에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차가 거꾸로 뒤집힌 상태라 민현은 겨우겨우 차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놈의 아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해보려고 다가간 그 때,
그놈의 아내가 가느다란 팔을 내밀며 민현에게 도움을 청했다.
"살려줘..."
민현은 그 손길을 냉정하게 뿌리쳤다.
"죽는다며. 같이 죽자며! 이거 놔. 난 너랑 죽을 생각없고, 천년만년 잘먹고 잘살거야."
민현은 그대로 저벅저벅 무성하게 자란 풀들 사이를 걸어갔다. 그리고 다시 뒤를 돌아본 그 순간! 펑- 하는 굉음과 함께 차에 불이 붙었고, 민현은 끝내 그놈의 아내를 죽음까지 몰고갔다.
"아냐.. 내..내가 죽인 게 아냐... 원래부터 죽으려고 했다니까...."
그놈 아내의 죽음은 그저 '사고'로 마무리가 됐고, 그 사고에 민현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 처리됐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민현은 이상한 환시증상이 나타났다. 자신의 몸에 그놈의 아내가 매달려 있는 모습. 거울을 볼 때마다 그 모습이 보였다. 유리창에 비춰봐도 그놈의 아내가 민현의 몸에 꼭 달라붙어 엎혀 있는 모습이었다. 민현은 자꾸 죽은 그놈의 아내 모습을 마주했고, 하루하루 비쩍 말라갔다.
이렇게 살다가는 자신도 죽을 것만 같았다. 민현이 다시 '인생자판기'를 찾은 건, 사람답게 살기 위해,
그놈의 아내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민현은 또 다시 자신의 수명 10년을 내어주고 버튼 하나를 눌렀다. 이번에는 촉망받는 의사의 인생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예상했던 응급실이 아닌 햇살이 맑게 들어오는 침대 위였다.
“여보, 일어났어요?”
처음 보는 여자였지만 ‘여보’라고 하는 걸 보니 민현의 아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이제 민현은 이런 갑작스럽게 뒤바뀐 인생에 익숙해졌다. 민현은 능청스럽게 일어나며 말했다.
“어. 여보 맛있는 냄새난다. 된장찌개야?”
“맞아요. 당신 좋아하는 차돌 된장찌개. 오늘은 아무리 바빠도 꼭 한술 뜨고 가요.”
잠옷 차림으로 배를 벅벅 긁으며 거실로 나가자 여자의 얼굴을 똑 닮은 여자아이가 식탁에 앉아있었다.
‘이 아이가 내 딸?? 이름이…’
민현은 얼른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분명 아이 이름이 그림이든 가방이든 실내화든 어디든 적혀 있을거라 생각해서였다.
“아빠! 오늘은 하루랑 놀아줘”
여자아이는 스스로 자기 이름을 말했다. 민현은 씨익 웃으며 여자아이를 번쩍 안았다.
“하루야! 오늘은 아빠가 빨리 일 끝내고 올게~
아빠랑 같이 그림그리기 하자.”
“좋아! 그림그리기도 하고 인형놀이도 할거야!”
“네~ 공주님! 그림그리기랑 인형놀이 접수~”
그러면서 민현은 하루의 배를 간지럽혔고. 하루는 간지럼을 타며 까르르까르르 햇살처럼 웃었다.
민현은 이제야 제대로 된 인생메뉴를 선택한 것 같다고 느꼈다. 평범하지만 행복이 깃든 인생. 모처럼 느껴보는 따뜻함이었다. 병원에 도착한 민현은 이번 선택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었다는 걸 새삼 또 깨달을 수 있었다. 민현을 따르는 후배의사들과 병원장의 신임을 톡톡히 받고 있는 촉망받는 의사.
환자들 사이에서도 인기있고 신뢰받는 의사였다.
민현은 이제 그 인생을 살아가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오늘은 특별한 수술일정이 없어서 민현은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고 하루를 위한 치즈 케이크까지 사들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무슨 이유인지 민현은 들고 있던 케이크 상자를 힘없이 땅에 떨어뜨렸고 다리에 힘이 풀린 민현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아 눈에 힘을 줘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 순간 그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민현을 인생자판기로 데려간 여자.
새까만 긴머리에 속머리는 빨갛게 염색한 그 여자였다.
“너..너는…”
“쉿! 아무말도 하지마. 말하면 더 빨리 죽을지도 몰라”
“뭐?? 죽는다니? 그게 무슨..?”
“지금의 넌 서른여덟이지만 너의 남은 수명은 딱 30년이었어.. 인생에서 목숨만큼 귀한 건 없는데 말야.. 넌 그 목숨을 참 가볍게 여기더라?”
“아…안돼.. 나 하루한테 가야돼.. 제발.. 한번만 더 날 좀 도와줘..”
“미안. 너의 수명은 여기까지라서… 몇초 안남았다. 5. 4.3.2.1…”
삐-
“배민현 님. 10월 11일. 오후 8시 24분. 심장마비로 사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