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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Oct 04. 2021

가위

"그러니까 소리가 들린다고요?"

"네. 남자 목소리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던가요?"

"아니요. 처음 듣는 목소리였어요.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지만, 웃으면서 말하는 특이한 버릇이 있었어요."

"웃으면서 말한다라..."

"피식 웃기도 하고, 소리내 웃기도 하고. 그 사람의 말투에는 '즐거움'이 묻어 있었어요."

"무슨 말을 해도 다 즐겁다? 이건가요?"

"맞아요. 웃기지 않은 얘기인데도, 습관처럼 말 중간중간에 웃음이 있었어요."

"래미씨. 꿈이 아닌 게 확실하고요?"

"확실해요. 저는 '가위'에 눌린 상태였거든요."


처음에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매일 반복되는 야근에 집에 오면 지쳐 쓰러져 자느라 그저 생생한 꿈을 꾼 것 뿐이라고. 래미의 귓가에 누군가 바람을 불고,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가사라며 조곤조곤 노랫말을 읊조릴 때도,

우울할 때 보면 좋을 코미디 영화를 추천해줄 때도 모두 같은 남자의 목소리였지만, 래미는 꿈이라고만 생각했다.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건, 꿈이라고 여겼던 상황에서 래미가 눈을 번쩍 떴다는 것이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온몸이 경직된 채로 가장 먼저 자신의 방 천장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겨우 눈동자를 굴릴 수 있을 때, 천장 다음으로 보게 된 건 희뿌연 물체였다.

사람과 비슷한 형체를 하고 있지만, 안개와 같은 모습. 래미의 주위를 이리저리 맴돌지만 연기처럼 떠다니는 모습이었다.


'누구세요?'

래미는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입만 간신히 벙긋거릴 뿐. 아무런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가위에 눌렸구나...' 래미는 그동안 자신이 느끼고 들었던 것들이 꿈이 아니라 '가위'에 눌린 상태에서 벌어졌다는 걸 알게 됐다.


학창시절 래미는 곧잘 가위에 눌리곤 했다. 그렇다고 학업 스트레스와 성적에 대한 압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느긋한 성격이기도 했고, '잘 되면 좋고, 안되면 어쩔 수 없고' 라는 인생모토 속에서 해맑은 학창시절을 보냈다. 밤잠 설칠만큼 고민이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래미는 이상하게 가위에 잘 눌렸다.

그러다가 대학교 졸업반이 되고부터는 '가위'에 눌린 적이 없었는데, 두 달 전부터 래미는 매일같이 다시 ‘가위’에 눌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가위에 눌린 상태에서 그 남자와 대화가 된다고요? 그게 가능한가요?”

"네. 목소리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 남자에게 궁금한 걸 종이에 적어, 머리맡에 두고 잤거든요."

“그랬더니요?”

"그 남자가 제가 적은 질문에 대답을 했어요."

"무슨 질문을 적었는데요?"

"제가 보이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제가 보인대요. 잘 보인대요. 너무너무. 그 후로 저는 매일 그 사람에게 궁금한 걸 종이에 적었어요. 질문의 갯수도 점점 늘려갔죠."

"그 목소리가 대답을 다 하던가요?"

"네. 모두 대답해줬어요... 그래서 이렇게 상담을 받으러 온 거에요. 선생님 저는 미쳐가고 있는 걸까요?"


심리상담가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래미의 눈을 보고, 바로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어.. 글쎄요. 미쳐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스스로 내가 미쳐있는지를 인지하지 못하죠. 그런데 래미씨는 스스로 되묻잖아요. 이게 정상일까? 아닐까? 하지만 래미씨가 들려주고 있는 이야기들은... 맞아요.

이상하기는 해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부분이죠. 그런데 이 세상의 일들을 모두 과학으로는 풀 수 없어요. 지금도 세상 곳곳에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기이한 사건들이 벌어지죠."

"선생님..."


래미는 장황하게 이말 저말을 늘어놓는 상담가의 말을 뚝 끊으며 분위기를 잡았다.


"선생님.. 제가 목소리만 있는 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면... 이제 제가, 미친 사람처럼 보일까요?"

"네...?"


상담가는 손가락으로 휘휘 돌리고 있던 펜을 자신도 모르게 툭 떨어뜨렸다.


"이렇게 입밖으로 꺼내니까, 저 진짜 제정신이 아닌 것 같네요. 선생님. 어쩌죠? 저는 이제 매일 밤마다 이 남자를 기다려요. 시시콜콜한 이야기일 뿐인데도 이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위로받는 기분이 들어요.

마음이 따뜻해지고, 간지럽고. 그래서 용기내서 물었어요. '나를 좋아하나요?'"

"뭐...라고 하던가요?"

"저를 사랑한대요. 오래전부터 저를 사랑하고 있었대요."

"오래전부터요? 그럼 혹시 래미씨를 알고 있는 사람인가요?"

"그래서 다음 날 다시 물었죠. 저를 아느냐고... 그랬는데, 그가 나타나질 않아요. 벌써 일주일 째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있어요… 선생님! 혹시 제가 더는 가위에 눌리지 않게 된 걸까요..?"

"래미씨..."


래미는 눈물까지 뚝뚝 흘리며 상담가를 애절하게 바라봤다. 상담가는 무슨 말이든 해야했다.


“음…래미씨 그 사람은 분명 다시 올거에요. 래미씨를 사랑한다면서요.”

“정말 다시 올까요?”

“물론이죠. 그러니 이제부터는 그 남자의 실체를 알아야돼요.”

“실체요??”

“살아있는 사람인지… 혼령인지… 그의 이름은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건지… 어떻게 래미씨에게 찾아올 수 있는지… 한마디로 그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고요.”


1시간 15분 가량의 상담을 마치고 나온 래미는 집이 아닌 카페로 향했다. 따뜻한 밀크티 한잔을 주문하고, 와인빛 가죽으로 덮힌 다이어리를 펼쳤다.


‘난 왜 그 사람의 이름을 묻지 않았지..? 나이는 몇살이고.. 무엇보다 살아있는 존재가 맞을까…?’


래미는 일방적인 대화지만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다. 래미 곁에 다가와 속삭이며 이야기를 하는 그의 목소리가 언제나 좋았다. 그냥 그 사람이라 좋았다. 그의 이름도 나이도… 굳이 묻지 않을만큼 그 사람 자체라서 좋았다. 손 끝에 풀물이 드는지 모르는 것처럼, 비에 옷이 젖는지 모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를 사랑하게 됐다. 그래서 그의 부재로 래미는 쓸쓸했고 그의 마음이, 사랑이 변했을까 불안해졌다. 그를 향한 그리움이 커져갔고, 혹여 그를 닮은 목소리라도 듣게 되면 무작정 낯선 이의 뒤를 쫓기도 했다. 만약 래미가 매일 만나고 있는 그 목소리의 남자가 맞다면 단박에 래미를 알아봤을테니까.

하지만 정신없이 뒤를 쫓던 그 남자는 래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에 거짓이 없다는 걸 래미도 확인하고 나자, 두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상담을 마치고 커피숍에서 생각을 정리한 래미는 집에 오자마자 종이에 한글자 한글자 꾹꾹 눌러썼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머리맡에 두었던 종이가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밤, 단풍으로 가을을 만끽하던 나무가 화려함을 잃고, 볼품없는 낙엽이 되어 쪼그라져버린 가을끝.

겨울 문턱에 들어선 그 날. 그토록 기다렸던 그의 목소리가 래미의 귓가를 두드렸다.


“난 당신과 같은 공간에 있었어요.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세상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았어요. 오직 당신만 살아있었죠.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이 간절했던 탓일까요? 깊은 잠. 길고 긴 잠이 들었는데, 어두웠어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죠. 오래도록 저는 그곳에 갇혀 있었어요. 무서웠고 외로웠죠. 그때마다 당신을 떠올렸어요. 그 때 손톱만큼의 빛이 보였어요. 저는 그 빛을 따라갔고, 그 빛의 끝에는 래미씨의 모습이 보였어요. 잠든 래미 씨였죠. 그러다 래미 씨와 눈이 마주쳤고, 당신은 내 목소리를 들었죠. 당신은 내게 묻고, 나는 당신의 물음에 대답했어요... 래미씨. 내가 누구인지 궁금한가요? 그럼 나를 만나러 와요. 내 이름은 민지현 입니다." 


래미가 눈을 떴을 때엔, 창문 너머로 하얀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가 워낙 속삭이기도 했고, 길고 긴 이야기를 해서 정확히 내용을 다 기억하기는 어려웠지만, 그의 이름만큼은 또렷히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민지현... 나랑 같은 공간에 있었다면, 우리 회사 직원이었나?' 


래미는 회사에 가자마자, 옆 자리 동료 윤성에게 '민지현'이 누구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민지현? 여자이름이네?" 

"여자 아냐. 남자야. 남자 직원 중에 민지현이라고..."

"글쎄. 처음 듣는 이름인데? 잠깐만. 우리 회사 직원이라면, 바로 검색해 보면 되겠네..!" 


윤성은 노트북 자판을 요란하게 두들기며 '민지현'을 검색했다. 탁탁탁. 소리와 함께 그가 '청원경찰'로 

일하다가 퇴사했다는 기록을 발견하게 됐다. 


"퇴사했다고? 왜 퇴사했지?" 

방금까지 고개를 쭉 빼고 모니터를 바라보던 래미는 윤성의 성의없는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회사 로비로 달려갔다. 래미는 곧장 꼿꼿한 자세로 서 있는 청원경찰에게 달려가 물었다. 


"민지현... 씨라고 여기서 청경으로 일하신 분이었는데, 혹시 아시나요?" 

"민지현 씨.... 글쎄요... 제가 들어온 지 얼마 안되서요."

"같이 일하는 분 중에, 민지현 씨를 아는 분이 안계실까요? 제가 그 분을 꼭 찾아야 해서 그래요." 


그때였다. 누가 봐도 이 회사에서 쌓은 경력이 꽤 될 것 같은 청원경찰이 래미에게 다가왔다.  


"민지현 씨요? 민지현 씨는 왜 찾으시는지..?" 

"꼭 만나야 하거든요.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나요?" 


래미는 다급히 택시를 잡아탔다. 오전 10시. 출근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도, 고속도로는 여전히 차들로 꽉 막혀 있었다. 회사에서 30분이면 갈 거리를 1시간 가깝게 걸려 도착한 곳은 '병원'이었다. 

처음에는 민지현을 만날 생각에 앞뒤 재지 않고 무작정 달려왔지만, 막상 민지현을 코 앞에 두자 자꾸만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주춤거렸고, 머뭇거렸다. 한참을 병실 앞에서 망설이던 래미는 용기를 내어 병실 문을 활짝 열었다. 드르륵 문이 열렸고, 그곳은 고요했다. 


삑삑- 쉬이이이익. 삑삑- 쉬이이이이익. 


기계음과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그의 숨소리만 병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밤마다 래미를 바라본 민지현처럼, 햇볓이 환하게 드는 정오에 래미는 민지현을 바라봤다. 

살아있지만 죽은 것 같은, 가위에 눌린 것처럼 온 몸이 굳은 '식물인간' 상태의 민지현을 말이다. 

래미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리고 갑자기 불쾌해졌다. 왜 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상황에 화가 났고, 동시에 허무했다. 


'나를 사랑하나요?'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래미는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잘못 들은 걸까. 마음의 소리일까. 

래미는 혼란스러웠다.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래미는 민지현을 바라봤다. 미동없이 눈을 꼭 감고 얌전히, 죽은 사람처럼 누워있었다. 


'나를 사랑하나요?' 

점점 선명하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래미는 귀를 막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나를 사랑하나요?' 

"아니... 아니야! 아니야!!!!" 

'나를 사랑하나요?' 

"아니야!! 아니라고!!! 가.. 저리 가! 꺼져!!!"

'나를 사랑하나요?'

"아니야!!! 사라져... 없어져버려! 그냥 죽어버려!!!!!!!" 


래미는 피를 토할만큼, 소리를 질렀다. 


눈을 떴을 때 래미는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다. 정신을 차린 래미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키자, 

래미를 살피러 온 간호사가 말했다. 


"좀 괜찮으세요? 갑자기 정신을 잃으셨어요. 기억나세요?" 

"제가.. 정신을 잃었다고요...?" 

"네. 민지현 씨 보러 오셨던 거 아니었어요?"  

"민지현 씨. 민지현씨는 어떻게 됐어요?" 

"사망하셨습니다."

"네?"  


래미는 급작스럽게 뒤바뀐 상황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래미는 온몸에 수분이 다 빠진것마냥 터덜터덜 겨우 집까지 갈 수 있었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구두를 벗고, 곧장 풀썩 침대에 누웠다. 

이내 쓰러지듯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쿵- 하는 소리에 래미는 번쩍 눈을 떴다. 


"안녕." 

래미의 눈 앞에 나타난 건, 민지현 이었다. 래미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억억거리는 소리만 낼 뿐. 

심장을 조여오는 답답함을 느끼며,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쉿... 너무 애쓰지마. 그저 가위에 눌린 것 뿐이야. 흐흐. 래미야. 크흑.. 

 이제 난 너와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어. 큭큭.. 네가 이렇게 쭉... 가위에 눌려있다면 말야. 큭큭큭." 


래미는 발버둥을 쳤지만, 래미의 몸은 더욱 경직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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