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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Sep 27. 2021

완벽한 아들

로봇 과학자, 자칭 천재 로봇박사였던 다훈의 첫 성공작은 반려봇이었다.

다훈이 반려봇 개발에 몰두한 건, 다름아닌 아들을 위해서였다. 다훈의 아들 '영준'에게 웰시코기 종이었던 '보리'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영준이 네 살 되던 해에 다훈은 보리를 입양했다. 영준의 생일선물이자, 영준의 소원성취이기도 했다. 외동이었던 영준은 언제나 '보리'와 함께였다. 영준의 키가 커갈수록, 보리의 몸집이 커질수록, 추억은 쌓여갔고, 둘의 우정은 더욱 깊어갔다. 하지만 계속 몸집이 커졌던 영준에 비해, 어쩐지 보리는 예전보다 몸집이 작아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보리의 반응속도는 느려지고, 움직임도 둔해졌다. 영준과 노는 시간보다 자는 시간이 늘어갔고, 고작 30분 산책에도 헥헥 거리며 힘겨워했다. 똑같이 나이를 먹었지만, 사람과 개의 시간속도는 상당히 달랐다. 영준의 나이는 열네살이었지만, 보리의 나이는 사람으로 치면 머리 희끗해진 노인과 같았다. 끝내 제 명을 다한 보리는 현관문 바로 앞에서 쓸쓸하게 눈을 감았다. 보리의 죽음은 허무했지만, 보리의 부재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보리와 함께 거닐던 공원만 지나쳐도 영준은 주륵 눈물이 흘렀다. 보리의 물건은 다 치웠지만, 학교갔다 돌아오면 제일먼저 꼬리치며 반겨줄 것만 같았다. 영준은 집안 곳곳에 남아있는 보리의 흔적 때문에 무척 힘들어했다. 다훈의 눈에는 영준이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보리의 부재로 공부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불면과 식음전폐, 심지어 아무것도 아닌 일에 괜한 짜증을 내는 영준이 마냥 안쓰러웠다.

'펫로스 증후군'이라는 말을 상담의사로부터 듣게 된 다훈은 자신의 아들 영준을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보리와 똑닮은 반려봇을 만들자!'

다훈은 그 때부터 밤낮 쉬지 않고 반려봇을 만드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개발한 반려봇을 들이밀었을 때, 영준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보..보리?"


영준은 자신도 모르게 보리의 이름을 불렀다. 반려봇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보리가 살아돌아온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정교해서였다. 보통 반려봇이라하면, 강아지 형체를 한 고철덩어리가 몇가지 단순 동작만 반복하는 게 전부였는데, 이건 좀 달랐다. 반려봇의 등을 쓰다듬으면, 마치 보리의 털을 쓰다듬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보리의 까맣고 맑은 눈동자도 그대로 닮아있었다. 혀를 내밀고 헥헥 거리며 놀아달라고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행동도 딱 생전의 보리 모습이었다.


"보리야... 손!"

영준은 반려봇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왕!' 하고 우렁차게 짖은 반려봇은 영준의 손바닥 위로 턱 하며 앞발을 올렸다. 영준은 보리를 꽉 끌어안으며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보리야. 너 맞구나.. 다시 나한테 와줬어! 고마워 보리야.. 고마워!!"

"영준아. 아빠 선물이 마음에 드니?"

"고마워요. 아빠. 정말.. 정말..."

"이제 보리가 네 곁을 떠날 일은 절대 없을거야. 그러니 아들? 이제 그만 슬퍼하자. 알았지?"


다훈의 첫 성공작 반려봇 '보리'는 사람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화제가 됐다. 뉴스와 신문에는 다훈과 함께 반려봇 보리의 사진으로 넘쳐났고, 여러 인터뷰로 쉴 틈이 없었다. 특히 반려동물의 죽음으로 힘들어하는 이들, 펫로스 증후군을 앓고 있는 사람들로주터 끝없는 주문이 밀려들어왔다.

이들은 너도나도 다훈의 메일과 SNS를 통해 무지개 다리를 건넌 자신의 반려동물 사진과 영상을 보내며, 반려봇 주문이 가능한지를 물었다. 이로 인해 다훈은 물론, 다훈과 함께 로봇을 만들던 개발자들도 덩달아 부를 축적하게 됐다. 다훈의 통장에는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숫자들이 찍혔고, 돈이 넘쳐나자 다훈은 세상을 더 놀라게 할 로봇을 만들고 싶어했다. 하지만 마땅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여보. 저녁 다 됐어요!"


아내의 부름에 다훈은 하품을 쩌억하며 거실로 나갔다. 저녁은 어제도 먹었던 김치찌개였다. 바짝 쫄은 국물에 당면을 넣어 한번 더 끓인 어제의 김치찌개. 새 요리가 아닌 헌 요리였다.


"뭐야, 또 김치찌개야?"

"그럼 이걸 버려요? 그리고 김치찌개는 이렇게 바짝 쫄았을 때, 제일 맛있는 거에요."

"하... 그러지 말고, 여보! 우리도 아줌마 한 분 쓰면 어떨까? 그럼 당신 힘들게 청소하고 빨래하고

 요리하고, 이런 거 안해도 되잖아."

"어우. 됐어요. 내 살림은 내 손으로 하는 게 속 편해. 괜히 남한테 왜 내 살림을 맡겨요?”

"아니.. 당신이 툭하면 허리 아프다. 팔목이 저리다.. 이러니까 그렇지. 이제 당신 쉬어도 돼."


사실 다훈이 내색은 안했지만, 아내의 요리에 늘 불만이 있었다. 솔직히 결혼하고 단 한번도 맛있게 먹은 기억이 없었다. 짜고 맵고, 그러다가 밍밍하고. 아내의 요리는 적당한 중간이 없었다. 게다가 청소에는 영 소질이 없는지, 아내는 치운다고 치웠지만 청소 전후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버리는 걸 아까워하고, 자꾸 뭔가를 쌓아두는 성격이었던지라, 식탁이든 책상이든 책장이든 크고 작은 물건들로 언제나 빼곡했다.

한번은 다훈이 나서서 청소를 했다가 크게 한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 아까운 걸 왜 버려요? 한참 쓸 수 있는 건데?"


소리만 요란하고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 청소기 한대 버렸다가, 몇날며칠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다훈이 집안 살림에 일절 손을 뗀 건,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보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는 말을 듣고나서부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꾸 신경이 쓰였다. 손이 곰손인지 다림질 해놓은 셔츠를 볼 때마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서 결국은 다훈이 또 다림질을 해야했다. 설거지도 마찬가지였다.

깔끔하지 않고 대충대충 닦아 턱턱 올려놓다보니, 딱딱하게 눌러붙은 밥알이 그대로 있는 그릇도 있었다.


짜기만 했던 김치찌개로 대충 저녁을 때운 다훈은 더부룩해진 속에 꺽꺽 헛트름만 계속 해댔다.

끝내 소화제 하나를 입에 털어넣고, 다시 책상에 앉은 다훈은 번쩍하고 무언가가 떠올랐다.


'남이 우리집 살림을 보는 게 싫다. 그런데 만약 사람이 아니라면...?'


다훈은 책상을 내리쳤다. 가사도우미 로봇!

다훈은 노트에 가사도우미 라는 글씨를 적었다가 다시 쓱쓱 지우고, 그 자리에 '아내로봇'이라고 적었다.


그날따라 반려봇 보리가 세차게 왕왕 짖어댄 건, 다훈이 완성한 '아내로봇' 때문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뭐랄까. 그저 사람 같았다. 무엇보다 반려봇 보리가 계속 짖는 이유는 아내로봇의 모습이 다훈의 아내, 은수와 매우 닮아있어서였다. 아니, 그 로봇은 은수 그 자체였다.

장을 보고 돌아온 다훈의 아내 은수는 거실에 떡 하니 서있는 아내로봇을 보고 너무 놀라 털썩 주저앉았다. 거울을 보는 기분. 내가 나를 보는 묘한 느낌.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존재.


"이제 당신은 푹 쉬어도 돼. 이 로봇이 당신을 대신해서 무엇이든 다 해줄테니까."

"무...무엇이든?"

"그럼! 청소, 빨래, 요리!! 다 이 로봇이 해줄거야. 당신은 여왕처럼 가만히 있으면 돼!"


은수는 자신을 닮은 로봇이 싱긋 웃으며 주방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고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내로봇을 개발한 이후로, 다훈은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깔끔해진 집안, 뽀송뽀송하게 마른 빨랫감들. 완벽하게 다려진 말끔한 셔츠들. 거기에 매일 달라지는 밥상까지. 다훈의 얼굴은 점점 환하게 빛났지만, 다훈의 아내 은수의 얼굴은 점점 그늘지고 쪼그라들었다.


은수는 남아도는 시간을 쓰기 위해 다훈에게 떠밀려, 도자기 공예도 배우러 다니고, 꽃꽃이도 배우고, 민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시간이 남으면 쇼핑을 했다. 신상 명품백을 그 누구보다 빠르게 독점했지만, 그 행복은 딱 3시간 짜리였다. 너무 쉽게 내 것이 되고나자, 금방 시시해졌다. 백화점에 진열돼 있을 땐, 그렇게 예쁘고 반짝거렸는데, 집에 와 열어보니 그만큼의 감흥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여보. 나 어때요?”

은수는 다훈에게 새로 산 원피스를 입고, 신상명품백을 어깨에 매며,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다훈은 그런 은수를 대충 훑어보더니,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어. 괜찮네."

그러더니, 곧바로 고개를 돌려 은수를 닮은 아내로봇의 두 어깨를 감싸쥐며 말했다.


"우아. 동태탕이잖아? 그렇잖아도 오늘 이게 엄청 땡겼는데!! 당신은 내 마음을 어쩜 그렇게 잘 알아?"


은수는 가방을 정리하다가 멈칫했다.

'방금 뭐라고..? 당신...???'

은수는 기가 막혔다. 있는 힘껏 가방을 쇼파 위로 던지고는 다훈의 어깨를 훽 잡아챘다.


"방금 뭐라고 그랬어? 당신???"

"어?"

"저 로봇한테 당신이라고 했잖아. 방금?"

"아.. 그랬나? 허허. 당신하고 워낙 똑같아서."


다훈은 머쓱해하며 씨익 웃었지만, 은수는 입술을 깨물며 화를 식혔다. 그 날 이후로 은수는 자꾸만 아내로봇이 신경쓰이고, 눈에 거슬렸다. 게다가 점점 로봇과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죽어라 다이어트 하는데 뱃살은 왜 자꾸 느는거야…’

은수는 찹살떡처럼 볼록하게 나온 아랫배를 움켜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로봇은 은수와 눈이 마주치자 또 싱긋 웃으며 지나갔다.

괜히 분이 났다. 그 웃음은 꼭 은수의 볼록 튀어나온 아랫배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은수를 똑닮았지만 그 속은 고철덩어리에 불과한 로봇. 은수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분을 내다가도 ‘저런 깡통과 나를 비교하다니 웃겨’ 라면서 피식- 넘겼다.

하지만 그날 저녁. 다훈이 사온 원피스 때문에 은수는 심장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분노로 온몸이 이글거렸다. 은수는 손을 등 뒤로 이리저리 휘적거리며 애썼지만, 좀처럼 원피스 뒷지퍼가 끝까지 올라가지 않았다. 다시 한번 배에 힘을 주고 숨을 참아봤지만 지퍼는 꼼짝을 하지 않고 오히려 더 벌어질 준비만 하고 있었다. 은수의 얼굴은 땀범벅으로 번질거렸고, 그런 은수를 보고 다훈은 눈물까지 흘리며 웃어댔다.


“푸하하하핫! 여보. 안되겠다. 더 큰 사이즈로 사야겠네.”


원피스 하나 입는데 이렇게까지 땀을 흘릴 일인가. 은수는 속이 상했다. 그런데 은수가 벗어놓은 원피스를 다훈이 홀랑 낚아챘다.


“당신이 교환하려고? 어디서 샀는지만 알려줘요. 내가 할게! 그냥 거기 둬요.”

은수는 편한 운동복으로 갈아입으며 말했다. 그런데 다훈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 원피스를 은수를 닮은 아내 로봇의 등 뒤에 갖다대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거 입어봐봐. 잘 맞겠네! 아니다. 내가 입혀줄게.”

아내 로봇은 다훈을 보며 싱긋 웃었다. 은수가 말릴 틈도 없이 다훈은 아내 로봇을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갔고, 쾅! 하면서 방문이 세차게 닫혔다.

그 때부터 였을까. 다훈은 뭔가를 사올 때마다 꼭 한손이 아닌 두손이었다. 은수를 위한 꽃다발을 사왔지만 향기를 맡을 수 없는 아내 로봇을 위한 꽃다발도 있었다. 은수를 위한 머플러도 있었지만 추위도 한기도 느낄 수 없는 아내로봇을 위한 머플러도 있었다. 그러다가 다훈은 은수보다 아내로봇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다훈은 먹지 않고도 잠을 자지 않고도 언제나 최상의 컨디션으로 집안일을 하는 아내 로봇을 보며 흐뭇해했다. 반면 은수에게는 차가웠다.


“여보.. 12시밖에 안됐는데 벌써 자는거야? 우리 영준이 고3이야! 당신 수험생 엄마 맞아?”

“어머.. 잠깐 눈 좀 붙인다는게 그만..”


은수는 잠에서 막 깨 흐리멍텅해진 눈을 비비며, 영준의 방까지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방문을 열었을 때, 영준의 곁에는 은수와 닮은 아내로봇이 서 있었다. 책상 위에는 하얗고 뽀얀 호빵 두 개와 캐모마일 티가 영롱한 빛을 뿜고 있었다. 영준은 '고마워요' 라고 말하며 호빵 하나를 집어들었다. 


"안돼! 영준아. 그거 먹지마!!!" 

은수는 정신나간 여자마냥 영준의 손에 있던 호빵을 뺏어 들고는 방바닥에 있는 힘껏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검붉은 팥이 다 터지도록 쿵쿵 소리를 내며 밟아댔다. 볼썽사납게 일그러진 호빵은 바닥에 죽처럼 눌러붙어 은수가 신은 거실화 바닥에 허옇게 붙어 너덜거렸다. 


"엄마... 왜 그러세요..." 

은수가 정신을 차렸을 때, 영준은 은수와 닮은 아내로봇 품에 안겨있었다. 더욱이 영준의 표정은 뭐랄까. 겁에 질렸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우악스럽게 호빵을 밟아대던 엄마를 경멸하거나 혐오하는 표정이라고 해야할까. 

은수는 그 모습에 더욱 화가 났다. 


"영준아. 너 왜 저딴 고물한테 붙어있는건데? 엄마는 나야. 네 야참을 챙겨줘야 하는 사람도 나고. 밤새워 공부하느라 고생한다고 네 머리를 쓸어줄 수 있는 사람도 나야. 저것이 아니고 나라고 나!" 


은수는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영준은 그런 은수를 말없이 꼭 안아주었다. 은수는 울컥했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외롭고 허전했던 마음이 조금은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다훈은 달랐다. 은수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밥도 안해. 청소도 안해. 빨래도 안해. 그런데도 영준이까지 로봇한테 맡길 셈이야? 

 하긴. 당신보다 로봇이 영준이 케어를 더 잘하더라. 그날 영준이가 호빵 먹고 싶다고 하니까, 

 바로 해다주는 거 봐. 그런데 당신은 어쨌어? 애 앞에서 그게 뭐야. 무식하게!" 


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준도 엄마의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잠잠히 기다렸다. 기다리면 나아질 거라고 믿었다. 그 사이, 은수는 스스로 투명인간이 되어갔다. 입을 닫았고, 귀를 닫았고,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인기척도 없어서 다훈은 은수가 자신과 같은 공간에 있는지 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아니, 다훈은 은수를 보았어도 못본채 했고, 모른척 했다. 은수는 그렇게 지워지는 존재, 없어져도 되는 존재가 되어갔다. 


유독 보름달이 컸지만, 구름에 다 가려져 달빛이 흐릿하던 그 밤. 새벽 3시. 왜 인지 방안으로 찬 기운이 자꾸만 들어오는 것 같아서, 영준이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을 때, 베란다 바깥 창문을 모두 열고 서 있는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엄마. 엄마 맞죠? 거기서 뭐하세요?" 


영준은 이상했다. 무언가가 영준의 발목을 움켜쥔것처럼 한발 한발 앞으로 내딛는게 묵직하고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서두르지 못했다. 더듬더듬 우물쭈물 하면서 베란다로 향했지만 은수는 영준을 향해 아무말 없이 싱긋. 은수와 닮은 로봇이 늘 짓는 그 미소처럼, 싱긋 웃으며 그대로 몸을 아래로 숙였다. 

순식간에 은수의 모습은 사라졌고, 쿵인지 쾅인지. 어쨌든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엄마! 엄마!!!!!" 


쿵인지, 쾅인지 하는 소리 탓에 방금 뛰어내린 건, 엄마가 아니라 로봇은 아니었을까. 영준은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래를 확인한 영준은 입을 틀어막고 주저앉았다. 

엄마의 죽음이, 끔찍한 이 죽음이 영준은 자기 탓인 것만 같았다. 매일 악몽에 시달렸고, 깨어있을 땐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벌벌 떨었다. 그런 영준에게 다훈은 이렇게 말했다. 


"영준아. 괜찮아. 아무도 너를 떠나지 않았어. 보렴. 보리도 있고, 엄마도 있잖니."  

"다 가짜야. 가짜잖아!"

"가짜라니. 그 무엇보다 완벽한 존재야. 절대 네 곁을 떠날 일 없는 보리. 언제나 너를 보살펴줄 엄마. 

 다시 봐봐. 자세히 살펴보라고." 


영준은 흐릿한 눈으로 집안을 둘러보았다. 보리는 놀아달라며 꼬리를 흔들고 있었고, 은수를 닮은, 

엄마를 닮은 로봇은 영준이 좋아하는 크림파스타를 만들고 있었다. 엄마가 몸을 내던지던 그날의 기억만 잊혀진다면, 아무 문제 없는 평온한 풍경이었다. 


"정말... 다 있네요. 엄마도. 보리도. 아빠도..." 

"그래. 영준아. 그러니까 우리 더는 슬퍼하지 말자. 점점 괜찮아질 거야. 시간이 흐르면 다 괜찮아질거야. 

 그리고 이제 곧 수능인데 바짝 집중해야지. 응?" 

"네. 아빠." 


영준은 생각보다 빠르게 훌훌 털어냈다. 


11월. 겨울임에도 봄처럼 포근했던 목요일. 영준은 다훈의 응원을 받으며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기 위해 집을 나섰다. 다훈은 영준이 자신처럼 로봇을 개발하는 로봇과학자의 길을 걷기를 내심 바랐지만, 그게 아니어도 영준이 관심갖는 게 있다면 뭐가 됐든 적극 밀어줄 계획이었다. 


그날 저녁, 영준의 귀가가 늦어지고 있었다. 다훈은 영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음만 지겹게 울릴 뿐이었다. TV에서는 지금 시각을 또렷히 알려주듯 저녁뉴스가 화면에 고정됐고, 다훈은 쇼파에 앉은 것도 누운 것도 아닌 미역처럼 늘어진 자세로 리모콘을 쥔 채 멍하니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 때 정확한 발음이지만, 높낮이가 없는 담담한 목소리의 앵커가 소식 하나를 전했다. 


"오늘 오후 5시 경. 달려오는 기차에 뛰어든 강모군이 그 자리에서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열차 운행이 3시간 가량 지연되면서 승객들은 큰 불편을 겪어야 했는데요." 


다훈은 모자이크 처리된 화면을 바라보며 '한심한 놈' 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그 순간 띠링- 하면서 다훈의 휴대폰에 문자가 도착했다. 영준의 문자였다. 


'아빠.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아빠가 원하는 완벽한 존재가 못될 것 같아요. 죄송해요. 완벽한 아들이 아니라서. 하지만 슬퍼하지 마세요. 완벽한 아들. 아빠는 만드실 수 있잖아요. 저는 미완성이고 실패작이에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아빠.'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문자를 읽다가 불현듯 뉴스에 다시 시선이 꽂힌 건, 철도에 가지런히 놓인 운동화 때문이었다. 다훈은 눈을 비비며, TV 화면에 가까이 다가갔다. 


"아냐... 아니야! 아니야!!!" 

다훈은 머리를 감싸쥐며 달려나갔다. 


그 후 동네에서 다훈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소문만 무성하게 맴돌았다. 정원이 딸린 큰 단독주택을 사서, 시간이 흘러도 늙지 않는 아내와 아빠를 끔찍이 여기는 효자 아들과 함께 살고 있노라고. 

누가봐도 완벽해 보이는 가정을 꾸리며 잘 살고 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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