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준은 계약직이었다. 이번 일만 잘 도와주면, 이번 일만 잘 처리해주면, 이번 일만 잘 넘어가면,
정규직 전환은 문제 없을거라고 너도나도 떠들어댔지만, 번번이 미끄러졌다.
하지만 아준은 계약직을 벗어나기 위해, 마땅히 그가 해야할 일을 아준이 대신 해주기도 했다. 그 공은 아준이 아닌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그에게 돌아갔음에도 아준은 이해했다. '나는 아직 계약직이니까.'
그의 실수와 잘못을 아준이 대신 뒤집어 쓰기도 했다. 질타와 사람들의 욕받이는 그가 아닌 아준이 받았음에도 아준은 참았다. '계약직만 벗어날 수 있다면.'
회사의 비리를 목격했지만, 그가 못본척 눈감아달라는 말에 아준은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모른척 했다.
회사가 끄덕없어야 아준이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을테니까.
누군가는 이런 아준이 답답하고 미련해 보였겠지만, 이건 아준만의 생존 방식이기도 했다.
지금껏 아준이 다녔던 회사에서는 '정규직'이라는 말 자체가 아예 없었다. 계약이 끝나면 낯선 외부인처럼
아준을 몰아냈다. 그 때마다 아준은 잘 걷고 있던 길이 뚝 끊겨버리는 아득함을 느꼈다.
그 아득함과 막막함이 싫었던 아준은 어떻게든 정규직이 되고 싶어했다.
"아준 씨. 조금만 참자. 분명 좋은 날 올거야. 아준 씨 일 잘하고 센스 있는 거. 내가 다 알거든.
우리 회사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 다음에는 아준 씨 바로 정규직 전환이다. 내가 보장해!!"
"고맙습니다. 부장님. 계속 잘 부탁드립니다!"
"어어~ 그럼그럼. 아참. 아준 씨! 지난 번에 내가 부탁한 거 말야."
"아.. 걱정 마십쇼. 잘 해결했습니다."
"그래? 역시 돈이면 다 해결될 줄 알았어! 아... 걔가 어찌나 끈질기게 달라붙던지... 술집에서 술 팔고
몸 파는 애한테 정 좀 줬다고 그렇게 앵겨붙나? 쯧쯧. 수준이 다르다는 걸 몰라요.... 아준 씨? 뭐하고 섰어? 그만 나가봐."
"아! 네... "
아준은 속으로 생각했다. '역겨운 놈'
자리로 돌아온 아준은 맞은 편에 있는 직원들과 눈이 마주쳤다. 다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아먹으며, 퍽퍽해보이는 스콘을 먹고 있었는데, 아준의 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 때 누군가 커피를 다 마셨는지,
드릉드릉... 빈 빨대 소리가 났고, 모여있던 직원들은 순식간에 흩어지는 바퀴벌레처럼 각자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준은 속으로 생각했다. '더럽고 치시한 놈들'
그날은 직원들이 소고기 회식을 한다며 아침부터 들떠 있는 날이었다. 어차피 아준은 단 한번도 회식자리에 낀 적도 초대받은 적도 없던터라, 무심하게 일에만 집중했다. 째깍째깍 소리조차 나지 않는 무음 벽시계를 쳐다보던 직원들은 오후 6시가 되자 정신없이 가방을 정리하고 회식장소로 우르르 향했다.
그 때였다. 일 처리만 해주고 아무런 보상을 못해줬다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그날은 부장이 아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아준 씨. 회식 자리에 같이 가지."
"네? 아……. 네네.."
아준은 눈치껏 식탁 제일 끝부분. 끝 모서리쪽에 앉았다. 맞은 편은 빈 의자였고, 그 옆에 앉아있던 막내직원.
그래도 정규직이었던 막내직원은 아준을 보며 얼굴을 찌푸리다가, 소주 한잔을 한입에 털어넣었다.
불판 위로 붉은 빛깔의 소고기가 올라갔고, 얼마 굽지도 않아 사람들의 현란한 젓가락질이 오고갔다.
아준이 겨우 한점 집어든 건, 바짝 익혀 참 맛없어 보이는 소고기 한 점 이었다.
질겅질겅 한참을 씹어야 겨우 넘어가는 소고기였지만, 아준은 그마저도 좋았고, 든든했다.
부장의 건배사를 들으며 슬쩍 소주잔을 올렸을 때도 알 수 없는 짜릿함이 온 몸을 감쌌다. 한 팀이 된 기분이었고, 하나가 된 기분. 어딘가에 소속이 된다는 건, 참 따뜻했다. 아준에게는 그랬다.
소주잔을 머리 위로 들려올린 횟수가 많아질수록 사람들의 눈이 풀렸고, 다리가 풀리고, 혀가 풀렸다.
하지만 술김에라도 아준에게 말을 걸거나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투명인간이었다. 조용히 와서 소고기 몇 점 얻어먹고 가는, 있어도 보이지 않는 존재. 엮이고 싶지 않은 존재. 사람들의 눈에는 아준이 그랬다. 2차를 가자는 분위기였지만, 아준은 눈치껏 빠지기로 했다.
굳이 인사를 하지 않아도 아준이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아서, 슬쩍 뒤돌아 가려는 그 때였다.
"선배. 우리 계약직원 말이에요..."
"어어. 아준 씨?"
"네... 그 분 언제까지 우리 회사에 있는 거에요?"
"왜왜?"
"아... 눈빛이 너무 별로라서요. 그냥 자꾸 저를 막 이렇게 위 아래로 훑어보는데, 그 때마다 소름끼쳐요..."
"아... 그치? 아준 씨가 여자 직원 쳐다볼 때마다 좀 그렇긴 해."
아준은 더 듣고 싶지 않았지만, 그 대화에 끼여든 부장의 목소리가 아준의 발목을 붙잡았다. 혹여 직원들이 아준의 존재를 눈치챌까 싶어, 아준은 건물과 건물 사이 골목에 몸을 숨기고, 그 대화를 엿듣기로 했다.
"뭐야? 2차 가자니까 왜 여기 뭉쳐있어?"
"아니요.. 아준 씨 얘기하고 있었어요."
"아준 씨? 그 계약직원?"
"네... 그냥 좀 그래서요... 부장님!! 그 사람 정말로 정규직 전환 시킬 건 아니시죠?"
"정규직? 아... 그걸 말이라고 해? 정규직 전환은 무슨 아무나 하나? 다 급이 있는데~"
"그쵸? 그럼 이번에 우리 회사 나가는거죠?"
"나간다고? 말은 똑바로 해야지! 제 발로 나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내보내는거지~”
"근데 왜 자꾸 희망고문 하세요. 부장님이 자꾸 정규직 전환 시켜준다 어쩐다 하니까... 회식자리까지 오면서 저렇게 믿고 까부는 거잖아요."
"불쌍해서 내가 오라했어... 사람이 좀 불쌍하잖아."
"아우 몰라요. 그냥 빨리 좀 내보냈으면 좋겠어요. 요새 산뜻한 계약 직원도 많은데.. 왜 저런 사람이
들어와서는.. 어후~ 사람이 너무 음침해서 눈 마주칠 때마다 소름이라니까요?"
"기다려. 적당히 둘러대서 내보낼테니까.. 자자~ 다들 2차 가는거지? 얼른 가자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뭔지 모를 든든함으로 가슴이 꽉 채워졌던 아준은 이제는 분노로 가득차 치를 떨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부장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터덜터덜 발을 끌며 달동네 낡은 옥탑 자취방으로 들어온 아준은 철푸덕 책상 위에 앉았다.
가라앉지 않는 분노에 아준은 공책을 펼치고 펜으로 부장의 이름을 썼다. 그러가다 학창시절 만화 동아리 활동을 할 때 종종 그려왔던 기괴한 형상의 괴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홀리듯 괴물을 그리기 시작한 아준은 눈에 실핏줄이 터지는 줄도 모르고 계속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책상에 엎드린 채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아준은 간밤의 여직원들과 부장의 대화가 떠올라 다시 한번 이가 갈리고 치가 떨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출근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커피를 내리고,
복사기 옆에 A4용지들을 정리했다. 하나둘씩 직원들이 출근했고, 평소처럼 '굿모닝', 감정없는 습관성 인사가 들려왔다. 굿모닝이라는 인사에 다들 굿모닝이라며 답했지만, 아준은 굿모닝하지 않았다.
그 때 부장도 막 사무실에 들어섰다.
"좋은 아침, 어제 다들 잘 들어갔지?"
부장은 아준을 힐끔 쳐다보더니, 헛기침을 한번 하고 부장실로 들어갔다. 부장의 면상을 보자 어제의 일들이 또 한번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 아준은 부리나케 부장의 뒤를 쫓아 부장실로 들어갔다. 자신을 따라 쫓아들어온 아준을 보고 부장은 흠칫 놀라며 물었다.
"어? 아..아준 씨 무슨 일이야?"
"부장님. 저랑 커피 한잔 하시죠."
"커...피? 여기서?"
"옥상으로 가시죠."
"어. 뭐. 그러지."
부장은 아준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끌려간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자신이 술집 여자와 놀아나고 두 집 살림을 했다는 걸 알고 있는 유일한 자라 군말 없이 옥상으로 향했다. 커피 한잔 하자며 옥상으로 올라갔지만 두 사람 손에는 그 무엇도 들려있지 않았다.
"아준 씨. 무슨 일인데 그래?"
"부장님... 제가 부장님을 위해서 충성했다는 건 알고 계시죠?"
"충성? 아이~ 뭘 또 그렇게까지 오버를 해~ 그냥 자네가 날 많이 도와줬지..”
그 때였다. 부장의 등 뒤로 무언가가 불쑥 나타났다. 아준은 그것을 보고,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것은 어젯밤 아준이 공책에 마구 그렸던 그림 속 괴물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당황한 아준은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가 두 눈을 끔뻑끔뻑 해보았다. 핏줄과 핏줄로만 이뤄진 흉측한 모습의 괴물은 점점 부장의 등 뒤로 가까이 다가왔다. 아준은 놀라서 뒤로 주춤 물러섰다.
"아준 씨. 왜.. 왜그래..."
"부..부장님. 왜 그러셨어요?"
"어...? 뭐..뭘?”
"저요..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주신다면서요. 그런데 왜... 왜 저를 내보낼 생각을 하고 계신건데요?"
"내...내가? 억....!!!"
등 뒤의 상황을 알지 못하던 부장은 그대로 괴물에게 공격을 받았다. 끈적한 침을 뚝뚝 흘리며 입을 악어처럼 벌린 괴물은 그대로 부장의 얼굴을 집어 삼켰다. 그 바람에 부장은 '억' 소리만 내다가 그 자리에서 얼굴이 뜯겨져 나갔다. 너무도 쉽게 목이 잘려나가자, 피가 사정없이 튀기 시작했고, 그 피는 아준의 얼굴과 베이지색 티에도 튀기 시작했다. 목이 잘려나간 부장은 그대로 털썩 무릎을 꿇었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괴물은 우적우적 부장의 얼굴을 씹다가 퉤-하고 뱉어버렸다. 그리고는 아준을 바라봤다. 괴물과 눈이 마주친 아준은 바로 도망가고 싶었지만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단듯 다리가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 때 괴물이 성큼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괴물은 아준을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준의 살결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더니 칭찬해달라는듯 강아지마냥 머리를 숙이고 얌전히 있었다. 아준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괴물은 크릉크릉 하며 요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너무도 흉측하고 끔찍해서 아준은 재빨리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지만, 제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아...안돼!! 오..오지마!!!!!"
아준은 먹히더라도, 머리만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얼굴을 양팔로 감싸쥐었다. 방금 전처럼 괴물이 입을 쩍 벌리고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야하는데 너무도 조용했다. 살며시 고개를 들어보니 괴물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두리번 거리던 아준은 얼른 몸을 일으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공포스러워서 계단으로 마구마구 달려 내려갔다. 사무실이 있는 7층까지 내려오자마자 아준은 곧바로 화장실로 갔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과 옷에 묻은 피를 정신없이 닦아냈다. 아준은 머리와 옷이 다 젖은 채로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옥상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리 없는 직원들은 조용히 제 할일만 할 뿐이었다. 사무실은 평화로웠다.
그런데 그 때였다. 어느 남자직원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부장님이 지금 119에 실려가셨어!!"
직원의 말에 주변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고요했던 사무실은 금세 소란스럽게 변했다. 아준은 속으로 생각했다.
'응급실에 간다해도 못살텐데… 얼굴이 뜯겨나갔거든... 킥킥...'
아준은 자꾸 웃음이 나왔다. 짜릿한 통쾌함이 온 혈관을 타고다니는 것 같았다.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고, 농락한 부장이 그렇게 죽었다는 게 갑자기 너무 통쾌했다. 그 덕에 아준이 두 어깨까지 떨며 끽끽 웃어대자, 그 모습을 본 한 여직원이 말했다.
"뭐에요? 왜 웃어요? 부장님이 119에 실려갔다는데, 지금 그게 웃겨요?"
어젯밤. 아준의 눈빛이 소름끼친다던 그 여직원이었다. 아준은 그 여직원을 서늘하게 노려놨다.
그리고 쇠가 부딪히는 소리처럼 기분 나쁘게 끽끽 거리며 웃었다. 불현듯 무언가가 떠오른 아준은 끽끽거리며 웃다가 황급히 자리로 돌아가, A4용지에 어젯밤 그렸던 괴물을 미친듯이 그리기 시작했다.
빨간펜으로 핏줄과 핏줄로만 이어진 흉측한 괴물의 모습. 옥상에서 본 괴물의 모습을 정신나간 사람처럼 펜으로 벅벅벅 소리를 내며 그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혀를 차며 자리로 돌아갔다.
여직원은 이런 아준의 모습을 어이없어 하며 팔짱을 꼈다.
"저기요. 사람이 물었으면 대답을 하셔야죠."
"조용히 해..."
아준은 집중이 흐트러지는 지, 명령조로 여직원에게 말하며 그림에 집중했다. 그 탓에 여직원은 더욱 황당해하며, 아준의 곁으로 다가왔다.
“뭐요? 방금 뭐라고 했어요?”
"됐어. 됐어. 다 됐다고!!!!”
괴물 그림을 완성한 아준은 여직원을 쳐다봤다. 그 순간, 아준의 예상대로 옥상에 보았던 괴물이 또 다시 나타났다. 아준은 외쳤다.
"내 생각이 맞았어. 내가... 내가 만들어낸 거야. 저 녀석을....!!"
"뭐요??"
"죽이자. 저 년을 죽이자!"
"뭐라고? 미친 거 아냐? 이보세요!! 억....!!!!"
아준이 그려낸 괴물은 그림 밖으로 튀어나와 팔짱을 끼고 노려보는 여직원의 등 뒤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옥상에서 부장을 먹어치운 것처럼, 망설임 없이 그 여직원의 머리를 잘근잘근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남자직원이 소리쳤다.
"그만!! 그만해!! 그만하라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자, 괴물은 여직원을 식사하다가, 남자 직원 쪽으로 몸을 틀어 꿀꺽했다.
아준을 무시하고, 천시하고, 괄시했던 직원들을 괴물은 닥치는대로 먹어치웠다. 이 놈도 꿀꺽. 저 놈도 꿀꺽. 모두 꿀꺽 꿀꺽. 바닥은 금방 피로 흥건해졌고, 사방팔방 튄 피는 하얀 사무실 벽과 천장에 흩뿌려졌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려 했지만, 괴물은 한 놈도 놓치지 않았다. 아준은 또 웃음이 나왔다.
매번 바보처럼 참고 참았는데, 신이 아준의 바람을 이뤄준 것 같았다. 돌이켜보니 아준은 어젯밤 그림을 그리며 이런 괴물이 정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을 무시한 사람들을 모두 휩쓸어갔으면. 모두 죽었으면.. 하고 바랐는데, 그 간절함이 바로 이뤄진 것이었다. 오직 아준만 제외하고 회사 사람들을 하나 둘씩 먹어 치우는 괴물의 모습이 너무 통쾌해서 아준은 자꾸 웃음이 나왔다.
"크하하하. 크하하하하하하. 거봐. 니들도 별 거 아니네. 이렇게 죽어갈 거면서, 왜들 그렇게 시건방을 떠셨을까.. 어?!! 다 죽어. 다 죽어버려~~ 크하하하하하"
그 때였다. 검은 옷을 입은 장정의 두 남자가 아준의 양 팔을 붙잡았다.
"뭐야. 놔! 이거 놔!!! 놓으라고!!!"
아준은 발버둥을 쳤지만, 장정 중 하나가 아준의 뒤통수를 내리치면서, 아준은 기절하고 말았다.
아준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하얀 천장과 눈부신 전등. 그리고 생전 처음보는 남자가 아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아준 씨. 정신이 좀 드시나요?"
"네? 네.."
"회사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던 것도 기억 나시고요?"
"아....."
아준은 또 씨익하고 기분 나쁘게 웃었다. 그 모습에 낯선 남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아준 씨. 약을 한동안 안드셨더군요."
"약..이요?"
"작년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부터... 저희 병원에서 치료 받으셨죠?"
"네...?"
"선생님. 약은 계속 잘 드셔야 합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좀 나아진 것 같아도, 약은 꾸준히 드셔야 해요. 몇번이나 주의 드렸잖습니까..."
아준은 낯선 남자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저... 종이랑 펜 좀 가져다 주시겠어요..?"
"그건 왜요? 혹시... 이런 그림을 또 그리시려고요?"
낯선 남자는 아준이 그린 괴물형상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남자는 수십장이나 되는 그림을 아준의 눈앞에 펼쳐보였다.
"이 괴물이 실제로 보이던가요?"
"맞아요! 이제야 저와 이야기가 통하시는군요. 제가 그려낸 이 녀석이 저를 위해 싸워줬어요."
낯선 남자는 아준의 말을 듣더니,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계속 얘기해보세요. 이 괴물이 또 어떻게 했나요?"
아준은 두 눈을 반짝이며, 낯선 남자에게 자신이 보았던 것들을 모조리 이야기했다. 낯선 남자는 아준의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박수를 치며 따라 웃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무언가를 계속 적어내려갔다. 30분쯤 대화를 나눴을까. 낯선 남자는 아준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아준 씨. 내일도 저와 이렇게 이야기 하시죠. 그럼 편히 쉬세요."
아준은 회사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회사 상황은 어떻게 정리가 됐는지 궁금했지만 곧바로 잠이 들었다. 아준이 잠이 들었다는 걸 확인한 낯선 남자는 아까부터 적어내려갔던 종이에 또 무언가를 적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또 다른 남자. 조금 더 젊어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선배... 어때요? 많이 심각한가요?"
"처음 여기 왔을 때보다 더 심각해. "
"자기가 부장 목을 조르고, 여직원의 목을 졸랐다는 것도 모르고요?"
"본인이 한 게 아니라, 자신이 그린 괴물이 했다고 하더라고. "
말을 마친 낯선 남자는 마지막으로 기록차트처럼 보이는 종이에 한줄을 더 적었다.
<조현병으로 인한 망상과 환각증상이 심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