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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Oct 19. 2021

막내작가

지수는 방송작가가 꿈이었다. 왜? 라고 물으면 지수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연예인 많이 볼 수 있잖아!!" 


지수는 어릴 적부터 잘생긴 남자를 좋아했다. 만화를 봐도 주인공이 잘생겼다면 내용이 엉망진창일지라도 재미있게 시청했다.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때는 좋아하는 가수를 쫓아다니며 학원 대신 공개방송을 가고, 

학원비를 콘서트 티켓 사는데 다 써버린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엄마의 등짝 스매싱이 이어졌지만, 

그래도 지수는 헤헤거리며 웃었다. 


"우리 오빠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생겼더라... 헤헤헤" 


중학생 시절엔 잘생긴 가수와 배우에 빠져 지냈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나... 꼭 이 대학 갈거야. 우리 오빠도 여기 대학 다니거든!" 

"지금 네 성적으로 이 대학을 가겠다고? 야! 이 사람은 연예인이니까 특별 전형으로 들어간거고~ 

  넌 평범... 평범에도 못미치는 고등학생인데, 무슨 수로 여길 들어가?" 

"이제 공부할거야.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이거든?!" 

"됐고. 수업 끝나고 노래방 갈거야? 말거야?" 

"야. 너 못들었어? 나 이제 공부한다고~"  

"그래그래! 알았어! 얼마나 가나 보자.." 


친구는 지수를 비웃으며 매점으로 달려갔다. 지수는 그런 친구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굳게 마음을 다졌다. 사실 지수가 목표한 대학은 지금의 지수 성적으로는 어림도 없는 곳이었다. 



"그러게... 니 년이 콘서튼가 뭐시긴가 간다고 학원 땡땡이만 안쳤어봐. 이렇게 바닥은 아니었을걸?" 


지수의 엄마는 빨간 홍옥을 닦으며 말했다. 지수의 엄마는 시장에서 '지수네 과일' 이라는 간판을 달고, 

과일장사를 하고 있었다. 지수가 10살 되던 무렵에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자, 지수의 엄마가 택한 길은 

과일가게였다. 피아노를 쳤다던 지수 엄마의 손은 이제 마디마디가 굵어지고 뭉툭해져서 피아노의 검은 건반보다 더 굵어 보였다. 홀로 지수를 키워내려면 뭐라도 해야했는데, 지수를 임신했을 때 온갖 과일을 먹었던 기억이 떠올라 그저 무언가에 홀린 것마냥 과일가게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그래도 입소문이 나면서 장사가 잘 되는 편이었다. 나중에는 가게 확장도 할 수 있고, 사람 한명 더 둘 수도 있었지만, 지수의 엄마는 그 돈을 지수에게 썼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하면 피아노 학원을 보내줬고, 비싼 운동화가 신고 싶다하면 바로 척척 사줬다. 여자 홀로 딸을 키우면서 부족하다는 소리 듣지 않게, 남부럽지 않게,

지수를 위해서는 다 해주는 엄마였다. 


"아! 엄마.. 지금이라도 마음 잡은 게 어디야~ 안그래?" 

"어이고~ 그래! 아주 고~맙다! 고마워!!" 

"엄마.. 그래서 말인데..나... 돈 좀!" 

"뭐? 용돈 준지가 언젠데 벌써 다 썼어??" 

"문제집 사야하는데... 조금 부족하단 말야..."

"너 진짜지? 또 뭐 이상한 거 사는 거 아니지?"

"아냐. 나 이젠 진짜 마음 잡고 공부 할거라니까. 나 무조건! 그 대학 들어갈거야...!!"  


엄마가 보기에도 지수는 이전과 사뭇 달라진 모습이었다. 엉덩이가 가벼워서 책상에 앉아있다가도 들썩들석 금방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 했는데, 이번에는 책상과 한 몸이 된것마냥 딱 붙어 앉아있었다. 어쩌면 집중보다는 집착에 더 가까웠다. 좋아하는 가수와 반드시 같은 대학을 다니겠다는 집착. 




지수가 합격한 대학은 좋아하는 가수가 다니는 그 대학, 바로 옆에 있는 대학이었다. 버스를 타고 20분이면 가는 거리. 지하철로는 한번 갈아타서 네 정거장이면 가는 거리였다. 


"아니.. 누가보면 너 그 대학 학생인 줄 알겠어. 어떻게 맨날 갈 수가 있냐." 

"오빠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 그렇지. 공식 스케줄에는 학교가는 일정이 없단말야." 

"야. 차라리 방송 일을 하는게 더 빠르겠어. 그럼 확실하게 볼 거 아냐!"

"방송 일...?" 

"뭐 많잖아. 피디! 작가! 음향! 카메라! 음... 어디보자... 지수 네가 할만한 게......" 

"야! 작가 좋다. 작가!" 

"작가? 네가 글을 좀 썼던가...?" 

"아! 배우면 되지~"

"글은 타고나는 거 아냐?" 

"야! 배우고 노력하면 안되는 게 없어. 노력하면 다 된다니까?" 


대학등록금도 겨우 마련한 엄마에게 지수는 또 손을 벌렸다. 


"뭐? 뭘 한다고? 방송작가?" 

"엄마. 내가 벌써부터 진로를 정해서 너무 놀랐나본데, 맞아. 나 이제 방송작가가 될 거야. 

 그런데 엄마도 알겠지만, 방송작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잖아." 

"그래서.. 또 뭐 학원을 다니시겠다?" 

"방송 아카데미라고... 여기서 열심히만 하면 강사님들이 추천도 해주고, 소개도 해주고.. 그냥 자연스럽게 

 길이 열리는 곳이라니까?" 

"너.. 이 돈 다 갚어. 출세하면 엄마한테 다 갚어 이것아!" 

"당연하지~ 엄마! 딱 기다려. 내가 진짜 내 이름 석자. 무조건 이 세상에 남기고 떠난다. 무조건!!" 


지수는 24시간이 모자랄 만큼 바쁘게 살았다. 이 또한 집착이었다. 방송작가가 되겠다는 집착. 

그 후 지수가 졸업반일 무렵, 한 가지 제안을 받게 됐다.  


"프리뷰 알바요?" 

"쉽게 말하자면 영상의 이미지와 소리 모두를 글로만 옮기면 되는 작업이야." 

"아. 간단하네요?" 

"생각처럼 간단한 건 아니지만, 한번쯤은 경험해봐도 좋을테니까." 

"네네! 저 할래요!!" 


프리뷰 아르바이트 첫날. 지수는 하늘높이 으리으리하게 솟아있는 방송국을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연예인들이 우글우글 하겠지?' 


지수는 오늘을 위해 새옷까지 마련했다. 아르바이트 하러 가는 길이지만, 바로 소개팅에 나가도 될 만큼 한껏 꾸미고 나섰다. 유리창에 비친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한 지수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힘차게 로비에 들어섰다. 하지만 어딜 둘러보아도 지수의 눈에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한마디로 방송 관계자들 뿐이었다. 

지수가 기대한 연예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상하게 안보였다. 

살짝 실망했지만, 이곳에서 일하다보면 반드시 연예인 한명은 만나게 되리라. 지수는 큰 기대를 품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5층에 내렸고, 일러준 곳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아. 프리뷰 알바하러 오신 분인가요?" 

"네..네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안경을 쓴 남자가 지수를 맞아주었다. 맞아주었다기 보다는 담배를 태우러 가려는 

중에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었다. 지수가 안내받은 곳은 모니터와 작은 책상 하나가 놓여진 좁은 방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한 여자가 지수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오늘 프리뷰 하실 영상... 그 프로 담당 메인 작가 A에요." 

"아! 안녕하세요. 신지수라고 합니다." 

"네. 혹시 프리뷰 해 본 적은 있으신가요?" 

"아니요. 이번이 처음입니다." 

"네. 뭐, 처음이어도 괜찮아요. 여기 이전 프리뷰 사본인데요. 한번 쭉 보시면 바로 이해되실 거에요."

"아... 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보통은 제가 이렇게 오지는 않는데... 그냥 어떤 분이 왔나 궁금해서 한번 와봤어요. 회의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지수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대로 밋밋하게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메인작가 A의 입에서 어떤 분이 왔는지 궁금해서 와봤다는데, 지수는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어필할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아! 작가님. 혹시라도 나중에 막내작가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아... 성함이 어떻게 된다고 했죠?"

"네! 신지수 입니다." 

"네... 지수 씨... 그럼 고생하세요." 

"감사합니다! 작가님!!" 


지수는 돌아서는 메인작가 A를 보며 90도로 허리굽혀 인사했다. 실제 방송 일을 하는 사람을 직접 만나고 나니, 지수는 더욱 꿈에 부풀었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프리뷰 일은 엉덩이 싸움이었다. 

60분 짜리 영상. 2시간이면 충분히 하겠거니 생각했지만, 처음이다보니 낯선 용어도 많고 영상 속의 대화들이 너무 많이 오고가다보니, 돌려보고 또 돌려보며 글을 빽빽하게 채워나갔다. 시간을 보니 어느새 2시간이 지나 있었지만, 정리한 영상은 고작 20분 뿐이었다. 남은 40분을 더 정리해야했다. 뒤로 갈수록 눈도 흐려지고, 집중도 흐려져서 작업시간은 계속 늘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못해먹겠다며 뛰쳐나오고 싶었지만 참았다. 참고 견디며, 저녁도 먹지 못한채 장장 8시간을 매달리고서야, 60분짜리 영상 프리뷰를 겨우 마칠 수 있었다. 지수는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상태를 확인했다. 시뻘개진 두 눈과 푸석해진 피부를 보면서 이 시간에 햄버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면,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었을 듯 싶었다. 그러다가도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아냐. 할거야. 해낼거야." 


그 후로도 지수는 끈질기게 프리뷰 알바 일을 계속했다. 그날도 지수는 에너지 드링크음료를 잔뜩 들고 방송국을 들어섰다. 퀭한 눈으로 엘리베이터를 탔고, 5층에 내렸는데, 누군가 지수를 알아봤다. 


"어? 아직도 프리뷰 알바해요?" 

"네..?"


흐리멍텅한 초점없는 눈으로 허공을 보다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지수가 처음 이곳에 왔던 날 만났던 메인작가A가 서 있었다. 


"며칠 하다가 말 줄 알았는데, 대단하다. 안 힘들어요?" 

"아... 그래서 오늘은 에너지 드링크를 잔뜩 샀습니다. 헤헤"

"아니.. 저... 나랑 잠깐 얘기 좀 할래요?" 

"네? 지금요..?" 


지수는 메인작가 A의 뒤를 쫓았다. 도착한 곳은 한층 아래에 있는 흡연구역이었다. 야외로 통하는 문을 열면, 

너도나도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다. 메인작가 A도 문을 열자마자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지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도 메인작가가 된다면 이렇게 멋있게 담배를 물어야지...' 라고 생각했다. 메인작가 A는 '후-'하고 담배연기를 지수의 얼굴 쪽으로 내뿜다가 입을 열었다. 


"이름이 지수 씨. 맞죠?"

"네. 기억하고 계셨네요?"

"그 때 막내작가 필요하면 써달라고 했잖아요."

"아.. 네네!!" 

"혹시 우리팀에 들어올 생각 있어요? 지금 막내작가를 구하는 중이거든." 

"진짜요?? 전 무조건 좋습니다. 열심히.. 열심히 할게요!"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는 잘 하는 작가가 필요해요."

"네네! 잘할게요. 진짜 잘해보겠습니다." 

"그럼 이력서 준비해서 내일 다시 봐요." 


지수는 드디어 자신도 방송작가가 됐다는 것에 발을 동동 구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엄마! 됐어. 나 됐어!!" 

"뭐가 됐다는거야?"

"방송작가! 이제 엄마 딸, 방송작가라고~! 엄마가 보는 방송 중에 이젠 내가 만든 방송도 있을거야."

"어머머.. 진짜야? 맨날 파김치가 돼있길래 당장 때려치웠으면 했는데... 그럼 이제는 괜찮은거지?" 

"처음이라 쉽지는 않겠지만, 지금보다는 낫겠지!" 


현실 안에 상상했던 것 반만 이뤄져도 좋겠지만, 살다보면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언제나 괴리감이 컸다. 

지수는 그토록 기대했던 방송작가가 됐지만, 이상하게 방송 외적인 일만 할 때가 많았다. 


"지수야. 커피 좀 사와야겠다. 다들 불러봐. 커피 뭐 마실거야?"  


모두가 똑같이 아메리카노로 통일하면 좋겠지만,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취향을 고집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양반이었다. 샷 추가한 아메리카노, 녹차 프라푸치노, 휘핑크림 반만 얹은 카페모카, 

자몽허니 블랙티, 아메리카노에 얼음 한 알만 넣은 커피, 잘 우려냈지만 티백 제거한 페퍼민트티 등등등. 

처음에는 이곳저곳에서 외쳐대는 메뉴를 정신없이 받아적었다가 잘못 사오는 바람에 혼쭐이 나기도 했다. 


"너는 커피 하나를 제대로 못사오니? 이게 그렇게 어려워? 빨리 좀 적응하자. 막내야!" 


그 날 이후로 지수는 휴대폰을 켜고 녹음을 했다. 그래야 실수가 없을 테니까. 

혼자서 커피 열잔을 들고 올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인간의 능력은 무한했다. 놀랍게도 스무잔까지 가능했다.  

어느 날은 손끝이 까맣게 되도록 복사를 한 적도 있었다. 자료를 찾느라 밤을 샌 날도 있었고, 

일반인을 섭외하기 위해 편도가 붓도록 전화기를 돌린 날도 있었다. 

그럼에도 지수는 노력했다. 하지만 노력할 수록 지수는 표정을 잃어갔다. 웃는 법을 잊게 됐고, 기뻐하고, 

감동하는 법도 잊게됐다. 마치 세상의 모든 색이 사라지고, 흑백만 남은 것처럼 지수의 얼굴이 지수의 공간이 오직 흑백으로만 변해갔다. 생기를 잃어간 이유는 간단했다. 인정받지 못해서였다. 이상하게 지수는 메인작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 아이디어도 괜찮았고, 글도 감각있게 쓰는 편이었다. 자료조사는 다른 작가들도 박수를 보낼 만큼 꼼꼼했다. 요령부리는 몇몇 작가에 비해 모든 면에서 애쓰는 중이었는데, 메인작가 A는 지수의 그런 모습을 외면하고 모른척 했다. 그럴수록 지수의 불안감은 커져갔다. 방송작가라는 타이틀이 있지만, 결국 프리랜서였다. 프리랜서는 일에서 자유롭기는 하나, 하루살이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하루 아침에 잘려도 군말없이 나가야했다. 방송작가 일을 계속 하고 싶었던 지수는 그래서 더욱 간절했다. 




"지수야. 네가 잘 모르나본데, 방송작가는 말야. 글도 잘 써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정치야 정치." 


서브 작가 윤경과 같이 밤새 일하다가 술자리를 가지게 됐는데, 거기서 지수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게 됐다. 


"정치요...?" 

"지수 네가 왜 메인언니한테 미운털이 박힌 줄 알아? 정치를 못해서야..." 

"네...?" 

"지난 번 우리 회식 때 말야. 너 피디님이랑 같이 택시타고 갔지?" 

"그게... 방향이 같다고 하셔서요." 

"그러니까. 방향이 같아도 넌 그 택시를 타지 말았어야해..."

"왜..왜요?"

"왜라니! 너 몰라? 우리 메인언니랑 피디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걸?"

"네??? 피디님은... 유부남 아니에요?" 

"그렇긴 하지. 그렇긴 한데... 음... 그걸 뭐라고 하지? 그래! 오피스 와이프!! 뭐.. 그런 거라니까?" 


서브 작가 윤경은 술에 취해 혀가 반쯤 접힌 말투로 쉴새 없이 떠들어댔다. 하지만 지수의 귀에는 그 어떤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메인작가 A와 이 오해를 빨리 풀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밤새 눈이 빠져라 일하고, 술까지 마신 터라 속이 좋지 않았지만 지수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메인작가 A를 찾았다. 


"선배님.. 잠깐 저랑 얘기 좀..." 


지수와 메인작가 A는 빈 회의실로 들어갔다. 


"할말이 뭔데?"

"저.. 선배님. 지난 번 회식 때 말이에요. 제가 피디님하고 같이 택시를 탔던거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가본데.. 저는 피디님하고 방향이 같아서 탄 것 뿐이거든요. 택시비도 내주신다하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날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저는 그냥 집 앞에서 내렸고, 피디님은 좀 더 가셔야 한다고 해서 택시타고 

 가셨고..."

"너 지금 무슨 말 하는거니?" 

"아... 선배님이 피디님이랑... 만난다고 하셔서... 그... 가까운 사이라고... "

"뭐?? 누가 그래?"

"그게.... 윤경선배가..." 

"윤경이...? 야! 이윤경 좀 불러와봐." 


지수는 당황했다. 이런 분위기를 생각한 게 아니었는데,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었다. 잠시 후 어제 지수와 술을 마셨던 서브 작가, 윤경이 머뭇거리다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야. 이윤경. 뭐야? 너 내 얘기 하고 다녀? 내가 누구랑 만나? 김피디랑 나랑 뭐?" 

"아.... 아니요. 저는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지수가 그러던데? 네가 그랬다고?" 

"야. 신지수. 내가 언제 그랬어?"

"네...? 어제.. 선배가.."

"야!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서 서로 완전 절친이나 다름없다고 했지.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아니. 선배가 오피스 와이프라고..." 

"하! 뭐? 오피스 와이프..? 내가? 푸하하하하" 


메인작가 A는 어이가 없는지, 고개까지 젖혀가며 크게 웃었다. 한 사람은 눈물까지 흘려가며 웃었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윤경이는 일해야 하니까 나가보고, 지수는 제일 잘하는 것 좀 해야겠다."

"네...?"

"이번 주 안으로 프리뷰 해줄 게 있어서. 너 프리뷰를 제일 잘하잖아."  


5일 동안 영상 12개를 프리뷰 하는 일은 밥을 먹지도, 잠을 자서도 안된다는 말과 같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주 작은 오해인데, 누군가에게는 유치하다 생각될 수 있는 일인데, 왜 이렇게까지 꼬여버린 걸까. 

지수는 이 상황이 마냥 답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하기도 싫었다. 


"그래... 풀면돼. 풀면 다 괜찮아질 거야... 엄마한테 전화부터 해야겠다.." 


지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르 통화연결음이 네 번 정도 울리고서야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이구~ 우리 딸!! 집에 언제 들어와?" 

"엄마. 나 오늘도 밤새야 할 것 같아."

"뭐? 오늘도...?" 

"최대한 빨리 끝내볼게."

"아이고... 그래그래. 밥 잘 챙겨먹어. 몸 상할라..."

"걱정마. 아주 잘 챙겨먹어서 살이 포동포동하게 올랐다니까?" 

"그런데 지수야. 네가 하고 있다는 그 방송! 내가 동네 사람들한테 그 방송 이름 말하니까 모르는 사람이 없더라? 엄청 유명한가봐?" 

"어? 어어..."

"아유~ 우리딸 장하다! 내가 요즘 우리딸 자랑하는 맛에 사는데, 조금 더 자랑해도 괜찮지? 팔불출이라고 놀려도 괜찮아~ 잘난 걸 잘났다고 하는데.. 안 그래?" 

"엄마... 난 그냥 막내작가야. 자료조사 하고 섭외하는 게 전부야.."

"그게 어디냐! 너 없어봐라. 그 방송이 돌아가겠냐?" 


지수는 엄마의 말에 가만히 생각했다. 내가 없다면 정말 이 방송이 돌아가지 않을까. 나 하나 없다고 방송에 문제가 생길까... 생각을 곱씹을수록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엄마. 나 일해야돼. 그만 끊자." 


닭장 같은 좁은 공간에 벌써 몇시간째. 지수는 영상을 들여다보며 프리뷰 일을 했다. 그러는 사이 

'야! 어디갔어? 커피 주문 받아야지!', '내가 오늘까지 복사 해놓으라고 했는데, 여태 뭐한거니?' 

'지금 급하게 필요한데, 자료 좀 찾아주라'

지수의 휴대폰은 지수가 뭘 해줘야 한다는 문자로 징징징. 계속 울어댔다. 


이 일도 해야하고, 저 일도 해야했던 지수는 몇날 며칠 째 밤을 지새웠다. 제대로 된 식사도 못했고, 

눈만 잠깐 붙였을 뿐. 두 다리 뻗고 잠을 자본지도 오래된 것 같았다. 그런데 같은 팀이라는 사람들은 그런 지수를 오히려 미련하다며 몰아세웠다. 자기 관리도 능력이라며. 일에 순서도 모르고 요령이 없다며 한마디씩 던졌다. 


"지수야. 방송작가는 감이 좋아야 하거든? 무조건 열심히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냐. 내가 말했지. 

 열심히 말고, 잘해야 한다고..." 

"죄송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것부터 안되어 있으니.. 널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 여기가 학원은 아니잖아.." 


지수는 이해가 안됐다. 일을 제대로 못했다며 혼이 나고 있지만, 정확히 어느 부분이 잘못됐는지, 어디를 고쳐야 하는지 짚어주는 이는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말하는 방송 감이라는 것도 뭐가 좋고 나쁜건지 정확히 알려주는 이도 없었다. 매번 두루뭉술했고, 지수에게는 뜬구름이었다. 

나중에는 지수를 향한 말들이 모두 날카로운 화살촉처럼 느껴졌다. 


"지수야. 내가 몇번을 말해. 여기서는 이렇게 하지 말라니까?"

'지수야. 난 네가 싫어.' 

"이런 식으로 적어놓으면 알아보기가 힘들어." 

'넌 방송작가하면 안돼.' 

"어이가 없다 정말. 이걸 아직도 못했다고?" 

'넌 그냥 나가는 게 좋겠다.' 

"됐다. 다른 작가한테 부탁할게."

'내 눈앞에서 사라져. 죽어버려...' 


프리뷰를 하다말고 지수는 슬리퍼를 찍찍 끌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맨 꼭대기층을 눌렀다. 

밤 12시 33분. 사람이 없을 시간이라, 엘리베이터에는 지수 혼자 뿐이었다. 5층에서 20층까지... 

지수는 단숨에 올라올 수 있었다. 밤공기가 유달리 상쾌했다.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진작 이렇게 올라올 걸..." 

지수는 피식 하고 웃었다. 방송국 가장 꼭대기는 탁 트인 넓다란 옥상이었다. 난간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서울의 야경은 가슴시리게 아름답고 예뻤다. 지수의 두 눈에 담긴 야경과 밤을 밝히고 있는 수많은 불빛들은 지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끝없는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쉰 지수는... 

그대로, 아래로, 낙하했다. 퍽....!! 사람의 몸이 땅끝에 부딪힐 때 나는 소리는 그저 묵직했다. 요란하지도 않고 경박하지도 않고, 허무할 만큼 고요하면서 둔탁했다. 그 때 떨어져내린 지수의 몸 위로 나무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꽃 한송이가 떨어졌다. 가련한 낙화였다.   



'엄마! 딱 기다려. 내가 진짜 내 이름 석자. 무조건 이 세상에 남기고 떠난다. 무조건!!' 


지수의 엄마는 장례를 치르는 내내, 지수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수의 말대로 지수의 이름은 각종 뉴스를 통해 들려왔고, 막내작가의 자살은 한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시간은 흘러 지수가 떨어진 그 자리 위로 나무 한 그루가 세워졌다. 지수를 위한 나무가 아닌, 그저 거리 조경을 위한 나무였다. 하지만 그 나무는 얼마 못가 제거가 되었다. 끊임없는 민원 때문이었다. 


<밤만 되면 나무에서 자꾸 퍽퍽.. 뭐가 갈라지는 소리가 나서요. 가까이 가보면 나무는 멀쩡해요... 

 근데 그 소리가 너무 소름끼쳐서...> 


"오케이. 이 장면 여기에 추가하면 되겠다. 인터뷰 장면 이후에는 진행자 화면으로 넘어가면 될 것 같고." 

"아우~ 언니 덕분에 금방 끝났네. 언니! 제가 커피 살게요. 우리 커피 마시러 가요"

"좋지좋지~" 

"언니.. 근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뭐?"

"지수요... 지수를 왜 그렇게 미워하셨던 거에요?"

"나? 미워한 적 없는데...?"

"진짜요?" 

"어. 그냥 일을 좀 답답하게 해서 그랬지. 나는 딱히 걔를 미워한 적 없는데...?" 

"헐... "

"왜?"

"아니에요. 아무것도." 


메인작가 A와 서브작가 윤경은 여전히 한 팀이었다. 그리고 방송은 누구 하나 없어도, 없어져도, 

문제없이 돌아갔다. 방송이라는 게 그랬다. 



(- 창작 소설입니다. 이전에 쓴 창작 단편들은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소재인데 비해 이번의 경우는 조금 

  현실적이라 오해하실 분들이 계실 것 같아서, 좀더 강조해 봅니다. 제 머릿속에 각인된 여러 사건사고들이    버무러 졌겠지만, 허구이며 창작단편이라는 걸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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