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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Feb 16. 2021

소문은 뭉게뭉게

- 다 믿지 말고, 다 말할 이유도 없고. 

낮 12시 프로와 나는 처음부터 '인연'이었나보다. 

처음엔 나를 위해 거절했지만, 

몇개월 후, 담당피디가 다른 분으로 바뀌면서 

그 자리의 제안은 또 한번 내게 찾아왔다. 


첫 면접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속에서 

메인 피디와 조연출이 반갑게 맞아주셨고, 

이전과는 분위기를 확 바꾸겠다며 

새로운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디선가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더불어 '같이 일하고 싶다' 라는 말은 식어가던 열정에 

후후~ 바람을 불어넣어, '열심히 해야지..!' 

내 스스로 의지를 다지는 마중물과도 같았다. 


이전 면접에서 듣던 것과는 달리, 

내 역할이 정확히 구분돼 있었고 

내가 써야 하는 코너 원고도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잘하고 싶다는 의욕만큼, 

내 능력은 따라가지 못했다. 

(- 물론 의욕 이상의 능력을 가진 분들도 계시지만... ) 


무조건 웃기고 봐야 하는 사연 각색 코너를 맡았기 때문에, 

원고 3~4장 안에 어떻게든 웃겨야만 했다. 


절망스러운 건, 나는 정말 안 웃긴 사람이라는 거다. 

근데 웃긴 원고를 써야 한다. 


라디오는 매일매일 생방이라, 

연습은 없었다. 무조건 실전이었고 기본적으로 청취자들의 사연이 바탕이긴 하나, 

매일매일 가래떡 뽑아내듯, 각색을 통해 웃긴 원고를 써내야 했다.   

허나 내 원고는 웃기지가 않았다. 


도무지 글이 써지지 않아 모니터만 뚫어져라 본 적도 많고, 

키보드가 너무 놀고 있는 것 같아서 

피아노 연주하듯 아무 말이나 막 쳐댄 적도 있었다. 


도움이 좀 될까 싶어서 각종 개그 프로그램을 밤새 보기도 했고, 

무작정 인터넷 검색창에 '웃긴 이야기, 웃긴 말' 

지금 생각해도 참 우스운 검색어를 정색하고 입력해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잠은 늘 부족했다. 

엉망인 원고만큼, 내 상태도 엉망이었다. 

그런 중에 개편 전까지 12시 프로를 맡았었던 H선배와 마주쳤다. 

내가 여기에 오게 됐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는, 


'힘들지만, 배울 게 많을 거야. 종합 프로그램이니까

 여기서 잘 익히면 다른 프로가도 금방 적응할 거야~' 


이런 말들을 종종 해주던 선배였다. 

그런 선배와 방송국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걱정해주고 격려해줬던 선배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이렇게 물으셨다. 


'힘들어 보인다. 아직 적응하는 중이라 힘들지? 

 잠은 좀 자구?' 

 

'아니요~ 요새 4시간 정도 자나...? 

 근데 같이 하는 선배들은 더 못주무신대요. 어제 S선배는 2시간 잤대요! 

 설마.. 계속 이러진 않겠죠~ 하다보면 점점 나아질 것 같아요!' 


말 그대로 우연히 마주쳤던 터라, 

딱 이 대화만 하고 우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다음 날이었다. 


녹음을 위해 원고를 뽑아들고 스튜디오로 들어섰는데, 

먼저 와서 준비 중이던 메인피디가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이셨다. 


'너.. 이 프로 맡고 힘들어 죽겠다고 했다면서? 

 잠도 못잘 정도로 힘들다고 한 게 맞니?

 그래서 괜히 했다 싶은거고??' 


네? 아니.. 잠깐만요?!

이게 무슨 말?? 


순간 정신이 로그아웃 할 뻔 했지만, 

얼른 다시 붙잡고 찬찬히 메인 피디 곁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정확히 얘기해야겠다 싶었다. 


'제가 어제 H선배와 복도에서 마주쳤어요. 

 근데 그 선배가 힘들어보인다고, 잠 못잤냐고 해서 

 네... 4시간 밖에 못잤다고 말씀드렸어요. 

 근데 힘들어 죽겠어서 이 프로 못하겠다. 괜히 한다고 했다. 

 그런 말은 한 적 없구요, 아무래도 잘못 전달된 것 같아요. 

 원고가 잘 안써져서 잠 못잔 건 맞지만, 잘 쓰고 싶어서 제 욕심에 그런 거구요.' 


원래의 나였다면 염소 목소리로 바들바들 떨면서 말했을텐데,

그 땐 뭐였을까. 

억울하고 화도 나고, 오해가 있다면 바로 풀고 싶었다.  

나는 메인피디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정확하게, 

떨지도 않고, 내 스스로 참 야무지다 싶을 만큼, 어제의 상황을 설명드렸다. 

그러자 메인 피디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여긴 하나를 얘기하면 순식간에 둘 셋... 열까지 불어나는 곳이야. 

 어디든 소문이란 게 그렇잖아. 처음이라 힘들고 어렵다는 거 알겠지만, 

 굳이 그걸 다 말할 필요는 없어. 다 믿지 말고, 다 말할 이유도 없고. 

 나는 어제 그 작가가 니 얘길 하길래... 듣자마자 깜짝 놀랬다 얘!' 




"다 믿지 말고, 다 말할 이유도 없고" 


맞는 말이다. 


딸 같은 며느리 없고, 

가족 같은 회사가 없듯. 


'괜찮아. 나한텐 얘기해봐' 라고 해서 

내 비밀을 털어놓는 순간, 

더는 비밀이 비밀이 아니지 않은가. 


잘 알고 있지만, 그 얘길 직접 듣고 나니 뒷맛이 씁쓸했다. 

내 편이 되어줄 누군가를 만나기 기대하기 힘든 곳에서, 

내 스스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곳. 

 

지금 우리 모두가 그런 곳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다보니 자꾸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생기는 건 아닌지. 

가끔은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지...?' 

스스로 되묻게 되는 건 아닌지...  


그래서 또 다짐했다. 


실수하고, 깨지고, 넘어지더라도 

오늘은 잘 견뎌낸 나에게, 우리 모두에게,  

노래 제목처럼, '수고했어 오늘도' 

매일매일 건네고 다독이는, 너그러운 내가 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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