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 믿지 말고, 다 말할 이유도 없고.
낮 12시 프로와 나는 처음부터 '인연'이었나보다.
처음엔 나를 위해 거절했지만,
몇개월 후, 담당피디가 다른 분으로 바뀌면서
그 자리의 제안은 또 한번 내게 찾아왔다.
첫 면접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속에서
메인 피디와 조연출이 반갑게 맞아주셨고,
이전과는 분위기를 확 바꾸겠다며
새로운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디선가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더불어 '같이 일하고 싶다' 라는 말은 식어가던 열정에
후후~ 바람을 불어넣어, '열심히 해야지..!'
내 스스로 의지를 다지는 마중물과도 같았다.
이전 면접에서 듣던 것과는 달리,
내 역할이 정확히 구분돼 있었고
내가 써야 하는 코너 원고도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잘하고 싶다는 의욕만큼,
내 능력은 따라가지 못했다.
(- 물론 의욕 이상의 능력을 가진 분들도 계시지만... )
무조건 웃기고 봐야 하는 사연 각색 코너를 맡았기 때문에,
원고 3~4장 안에 어떻게든 웃겨야만 했다.
절망스러운 건, 나는 정말 안 웃긴 사람이라는 거다.
근데 웃긴 원고를 써야 한다.
라디오는 매일매일 생방이라,
연습은 없었다. 무조건 실전이었고 기본적으로 청취자들의 사연이 바탕이긴 하나,
매일매일 가래떡 뽑아내듯, 각색을 통해 웃긴 원고를 써내야 했다.
허나 내 원고는 웃기지가 않았다.
도무지 글이 써지지 않아 모니터만 뚫어져라 본 적도 많고,
키보드가 너무 놀고 있는 것 같아서
피아노 연주하듯 아무 말이나 막 쳐댄 적도 있었다.
도움이 좀 될까 싶어서 각종 개그 프로그램을 밤새 보기도 했고,
무작정 인터넷 검색창에 '웃긴 이야기, 웃긴 말'
지금 생각해도 참 우스운 검색어를 정색하고 입력해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잠은 늘 부족했다.
엉망인 원고만큼, 내 상태도 엉망이었다.
그런 중에 개편 전까지 12시 프로를 맡았었던 H선배와 마주쳤다.
내가 여기에 오게 됐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는,
'힘들지만, 배울 게 많을 거야. 종합 프로그램이니까
여기서 잘 익히면 다른 프로가도 금방 적응할 거야~'
이런 말들을 종종 해주던 선배였다.
그런 선배와 방송국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걱정해주고 격려해줬던 선배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이렇게 물으셨다.
'힘들어 보인다. 아직 적응하는 중이라 힘들지?
잠은 좀 자구?'
'아니요~ 요새 4시간 정도 자나...?
근데 같이 하는 선배들은 더 못주무신대요. 어제 S선배는 2시간 잤대요!
설마.. 계속 이러진 않겠죠~ 하다보면 점점 나아질 것 같아요!'
말 그대로 우연히 마주쳤던 터라,
딱 이 대화만 하고 우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다음 날이었다.
녹음을 위해 원고를 뽑아들고 스튜디오로 들어섰는데,
먼저 와서 준비 중이던 메인피디가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이셨다.
네? 아니.. 잠깐만요?!
이게 무슨 말??
순간 정신이 로그아웃 할 뻔 했지만,
얼른 다시 붙잡고 찬찬히 메인 피디 곁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정확히 얘기해야겠다 싶었다.
'제가 어제 H선배와 복도에서 마주쳤어요.
근데 그 선배가 힘들어보인다고, 잠 못잤냐고 해서
네... 4시간 밖에 못잤다고 말씀드렸어요.
근데 힘들어 죽겠어서 이 프로 못하겠다. 괜히 한다고 했다.
그런 말은 한 적 없구요, 아무래도 잘못 전달된 것 같아요.
원고가 잘 안써져서 잠 못잔 건 맞지만, 잘 쓰고 싶어서 제 욕심에 그런 거구요.'
원래의 나였다면 염소 목소리로 바들바들 떨면서 말했을텐데,
그 땐 뭐였을까.
억울하고 화도 나고, 오해가 있다면 바로 풀고 싶었다.
나는 메인피디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정확하게,
떨지도 않고, 내 스스로 참 야무지다 싶을 만큼, 어제의 상황을 설명드렸다.
그러자 메인 피디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여긴 하나를 얘기하면 순식간에 둘 셋... 열까지 불어나는 곳이야.
어디든 소문이란 게 그렇잖아. 처음이라 힘들고 어렵다는 거 알겠지만,
굳이 그걸 다 말할 필요는 없어. 다 믿지 말고, 다 말할 이유도 없고.
나는 어제 그 작가가 니 얘길 하길래... 듣자마자 깜짝 놀랬다 얘!'
맞는 말이다.
딸 같은 며느리 없고,
가족 같은 회사가 없듯.
'괜찮아. 나한텐 얘기해봐' 라고 해서
내 비밀을 털어놓는 순간,
더는 비밀이 비밀이 아니지 않은가.
잘 알고 있지만, 그 얘길 직접 듣고 나니 뒷맛이 씁쓸했다.
내 편이 되어줄 누군가를 만나기 기대하기 힘든 곳에서,
내 스스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곳.
지금 우리 모두가 그런 곳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다보니 자꾸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생기는 건 아닌지.
가끔은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지...?'
스스로 되묻게 되는 건 아닌지...
그래서 또 다짐했다.
실수하고, 깨지고, 넘어지더라도
오늘은 잘 견뎌낸 나에게, 우리 모두에게,
노래 제목처럼, '수고했어 오늘도'
매일매일 건네고 다독이는, 너그러운 내가 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