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감자
오늘도 자기 파괴적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서른 중반의 인생을 쥐어짜는데 좋은 글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새삼 괴로운 일이다. 나는 집에서 며칠 굶는 식솔들을 생각하며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사냥에 나선 가장이 된 것처럼 달달 떨리는 손에 볼펜을 힘껏 움켜쥐고 인생이라는 맹수를 향해 글을 칼처럼 휘두르기 시작했다. 필살의 일격이 빗나가고 등골이 송연함을 음미할 새도 없이 인생은 나를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목덜미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생애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처음 해수욕장에 물놀이를 나가서 튜브가 뒤집혀 바닷물을 배불리 먹었던 일. 태풍 부는 날 휴교한 학교에 나 혼자 등교한 일. 새끼 오리를 잡으려다가 배수로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던 일. 멸종 위기종인 장수하늘소를 잡겠다고 학교에 심어진 플라타너스 나무에 신발을 던졌다가 그 신발이 나뭇가지에 걸리고, 그 신발을 되찾겠다고 반대편 신발까지 쏘아 올려서는 맨발로 집까지 걸어간 일. 중학교에서 당한 텃세와 학교폭력들. 지독했던 가난, 가난, 가난. 실내화를 뺏겨서 남은 중학교 생활 내내 실내화를 주워 신고 다녔던 일. 체육복을 뺏겨서 찢어진 체육복을 주워서 기워 입고 다닌 일. 이렇듯 돌이켜보면 슬펐던 일들만이 떠오른다. 후회가 가득한 인생이었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자. 나는 초여름 더위가 가시지 않는 월세방에서 괴로움을 즐기며 이 낱말 저 낱말을 요리조리 요리하며 글이랍시고 여기저기 써 나르고 있다. 다행인 것은 글을 쓰는 행위도, 지우는 행위도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이너스 인생에게 글쓰기는 소소한 행복이 된다. 비록 자기 파괴적인 글쓰기일지라도 내 삶을 회피하지 않고 다시 한번 마주하고 고민하며 더 나은 내가 되도록 고쳐나간다는 점에 의의가 있지 않을까. 이런 소소한 깨달음에서 스스로 어른이 되어가고 있구나 느끼고는 한다.
우주적인 절대자가 나타나 기억을 소거하는 조건으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다시 한번 생을 살아갈 기회를 준다고 해도 나는 비슷하게 살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비슷하게 기회를 날려버린 건지도 모른다. 남은 생이라도 의미 있고 주체적으로 살고 싶어서 꾸역꾸역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를 글을 써 내려간다. 이 글의 끝에는 무엇이 자리할까. 확실히 이 글도 돈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읽고 쓰는 행동에서 오는 자기 위안 그 자체가 낭만이 있지 않나 싶다. 새벽에 눈떠서 공사판에 출근해서 하루 종일 생산적인 생각과 행동만을 하다가 퇴근해서는 비생산적인 활동이더라도 나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비록 많은 돈을 벌지는 못하고 학자금 대출이며 생활비 대출이며 갚아야 할 돈이 많아서 금전적인 여유도 없는 지금이지만 이런 삶이라도 꾸역꾸역 기록하고 살아가다 보면 '이런 때가 있었구나. 이때는 이걸로 힘들었구나.' 이렇게 되돌아보면서 술자리 안주라도 되기를. 글솜씨가 늘어서 마음 놓고 소주라도 사서 마실 수 있게 되면 더 좋고 말이다. 글은 늘지 않는데 소줏값은 하루하루 느는 걸 보면 조바심이 자라난다.
어느덧 비관과 자책이 끝나간다. 이 밤도 무르익어 가고 말이다. 글쓰기가 끝나면 잠자리에 누워 부쩍 가까워진 천장에 오늘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고 내일 해야 할 일을 정리하다가 잠들 테다. 그러다 새벽이면 알람시계보다도 먼저 일어나서 어떻게든 출근하기 싫은 마음에 시간이 지나가지 않도록 붙잡으려 할 테다. 마지못해 일어나 작업복에 몸을 끼워 넣고 안전화에 다시 발을 끼워 넣고 뚜벅뚜벅 걸어 나가겠지. 내가 생각했던 삼십 대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어찌하리. 인생이 내게 손짓한다. 실패한 이립은 다가올 차가운 불혹을 준비해야 한단다. 끄덕끄덕. 나는 출근하는 차 안에서 졸음에 못 이긴 대답 아닌 대답을 하며 내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