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쉬운 일은 없겠지 하며 노가다를 갔다. 서른이 넘어서도 취업 준비생 타이틀을 달고 있는 나에게 하루하루 노가다를 하면서 들어오는 돈은 정말 소중하다. 굳이 용역이 아니라 노가다라고 표현한 것은 일이 너무 힘들고, 더럽고, 위험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3D업종'의 표본이랄까. 날도 덥고 땀은 줄줄 흐르는데, 나는 마땅한 기술도 없이 뙤약볕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을 구경했다. 구경하다 오는 것치고는 단가가 쏠쏠했는데, 반장님들은 이런 내가 안타까웠는지 "젊은 친구가 왜 벌써 이런 일을 하냐."부터 "계속할 거면 기술 배워서 단가를 올려라." 이러저러한 조언들을 많이 해주셨다. 나는 입고 간 작업복에 소금기가 가득해질 때까지 반장님들께서 해주시는 조언들을 차곡차곡 내 속에 머금으면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이 카메라 없는 '체험 삶의 현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나를 지탱해 주는 것은 꿈도 희망도 아닌,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다. 일을 잘 못해서 욕을 먹어도, 용접을 보조하다가 팔에 화상 흉터가 남아도 꾸역꾸역 일을 해나가면서 자꾸만 살아생전에 미워했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빠는 건강하실 무렵 조선소에서 사출 되는 모래로 철판 표면을 다듬는 샌딩(Sanding) 작업과 용접 작업을 도맡아 하셨다고 하셨다. 어릴 적에는 아빠의 모험담을 들으며 아빠가 선박에 그네를 타고 모래를 쏘는 모습을 상상했었는데 막상 내가 현장에 나가보니 아빠가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들을 하셨었는지 체감이 되었다. 일을 하면서 틈틈이 반성을 했고, 눈물을 흘릴 새 없이 땀을 흘려야 했다.
클라이막스(Climax)는 대못을 주울 때였다. 토목 공사 현장에서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콘크리트용 대못을 주워 담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녹슬지 않고 이쁘게 잘 뻗은 대못은 다시 쓸 수 있다며 자루에 주워 담았는데, 그럼 녹슬고 휜 저 못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감성적인 나는 버려진 못들에게서 나를 보았다. 예전에 군대에서 실용음악과 선임에게 기타를 배운 적이 있다. '휴가 나가면 엄마, 아빠께 불러드려야지. 히히.' 하면서 손끝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김종환 님의 사랑을 위하여 한 곡을 연습했다. 내 나름의 효도를 해야지라는 생각에서였던 것 같다. 대망의 휴가 날 나는 귀가하자마자 연습한 사랑을 위하여를 연주했고, 연주를 들은 엄마는 가슴속에 오래 담아두었던 말씀과 당신께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을 하셨다. "어릴 때 피아노 안 시켜줘가 음악 못한 다더마. 이제 잘하네."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했다. 나는 도대체 어떤 불효를 저지르며 살아왔던 것일까. 부모님의 가슴에는 몇 개의 못이 박혀있을까. 가늠할 수 없는 대못들 가운데 하나를 힘겹게 뽑아내서 손에 쥐고 효도랍시고 까불었던 나 자신을 반성하자. 정말로 감성적인 사람은 살기 힘든 세상이다. 버려진 못들을 주우면서도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면서 체력을 소모하다니. 나 자신이 우스우면서도 딱하달까. 스스로가 자꾸만 처량하게 느껴져서 노가다를 오래 하면 안 되겠다는 결론이 섰다. 매일 반복되는 각오이지만, 내일 하루만 더하고 그만해야겠다. 힘내라 통장 잔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