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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고 절대적인 하루

멋진 하루,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by 설애

열이 38도가 나니, 병원으로 데려가라는 담임선생님의 연락에 후다닥 아들을 데리고 병원을 다녀왔다. 아들은 인후두가 약해서 감기 들면 금방 심해지는데, 학교에서 에어컨을 세게 튼다더니, 인두염이라고 한다.

나도 몸이 썩 좋지 않던 차에 회사에 반차를 내고 집에서 쉬게 되었다.


매일 이렇게 쉬면 좋으려나, 하루가 갑자기 길어진 기분이다.




하루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영화 [멋진 하루]는 전 남자 친구 병운(하정우)에게 떼인 돈을 받으려고 찾아간 여자 희수(전도연)가 그 돈을 받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병운은 돈이 없지만 돈을 갚기 위해 서울 이곳저곳에서 많은 사람(대부분 여자)을 만나 돈을 꾸거나 받아서 희수에게 돌려준다.

마찬가지로 구보(박태원 작가)가 집을 나서 서울의 이곳저곳을 다니는 하루를 쓴 책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다. 구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에서 공부도 하고 왔지만, 직업이 없어 글을 쓰고 돈을 번다.

이 영화와 책이 서울의 이곳저곳을 다니는 하루를 담았다는 것 외에, 시작 시점의 주인공이 불안한 상태인 점이 같다. 희수는 어딘지 화가 나 보이고, 구보씨는 딱히 갈 곳이 없어 방황하는 것이다.

알라딘에서

불안을 서울 곳곳에 뿌리며 다니는 하루

희수는 돈을 받으러, 구보는 고독을 피하려고


필요 없어. 사과받고 싶지도 않아. 이자 같은 거 달라고도 안 할 테니까 내 돈 지금 당장 갚아.
희수 대사


조그만 한 개의 기쁨을 찾아, 구보는 남대문을 안으로 밖으로 나가 보기로 한다. (중략) 구보는 고독을 느끼고, 사람들 있는 곳으로, 약동하는 무리들의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생각한다. 그는 눈앞의 경성역을 본다. 그곳에는 마땅히 인생이 있을게다. 이 낡은 서울의 호흡과 또 감정이 있을 게다. 도회의 소설가는 모름지기 이 도회의 항구와 친해야 한다. 그러나 물론 그러한 직업의식은 어떻든 좋았다. 다만 구보는 고독을 삼등 대합실 군중 속에 피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12쪽



결국 그 하루의 끝에 구보는 집으로 돌아간다.

이제 나는 생활을 가지리라. 생활을 가지리라.
(중략) 구보는 잠깐 주저하고, 내일, 내일부터, 내 집에 있겠소. 창작하겠소ㅡ.
184쪽

희수는 돈을 받고(330만원), 20만 원은 차용증을 쓰고 헤어진다.

하루가 참 길기도 하다. 구보도 희수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겠지.



하루, 겨우 하루

새로운 것이 없는 하루가 쌓이면 시간은 금방 흐른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으므로 뇌가 새로운 정보를 처리할 일이 없고 시간을 빠르게 인식한다.

일상 중에서 희수나 구보의 하루 같은 날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정리하고, 다시 시작할 힘이 생기는 하루가.

겨우 하루가 아닌 인생을 위한 '멋진 하루'가.


[맞닿은 이야기]

경성탐정이상


25.06.22 뒤늦게 사진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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