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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쟁이 허수아비들

가을에는 트렌치코트를 입고 참새를 쫓아야 해

by 설애

나는 허수아비

나는 논을 지키는 허수아비다. 벼가 익어가니 마음은 바쁜데, 참새들은 도망갈 줄 모른다. 바람이 도와주면 코트 자락 펄럭이며, 참새를 쫓아낼 수 있을 텐데.

나는 동구

우리 아빠는 내가 ​동쪽(東)의 해처럼 오래도록(久) 밝게 빛나라고 내 이름을 동구라고 지었다. 나는 내 이름이 동그라미 같아서 좋다. '동구란' 동구! 엄마는 '동구르르 동구'라고 부른다.

나는 여섯 살, 내년에는 유치원을 갈 수 있다. 엄마랑 집에 있는 것도 좋지만, 친구들이 많이 있는 유치원을 얼른 가고 싶다. 동네 형들이랑 누나들은 다 학교 간다. 아침에 오는 버스를 타고 간다. 얼마 전에는 버스 타고 같이 갔다가 학교에서 기다리면 안 되냐고 옆집 민식이 형아한테 물어봤는데, 형이 혼자 기다리는 거 심심할 거라며 안 된다고 했다. 치, 집에서도 심심한데.

나는 모두 버스 타고 가면 쫑쫑이랑 논다. 쫑쫑이는 귀여운 강아지다. 엄마랑 밭에도 가고, 밥도 먹고, 그림도 조금 그리고, 퍼즐도 맞추고, 만화도 보다가, 쫑쫑이랑 버스를 기다리러 간다. 버스는 하루 네 번 왔다 간다. 세 번째 오는 버스에는 민식이 형아가 있다.


민식이 형아

민식이 형아가 오면 버스에서 내려서 집까지 뛰고 가방을 집에 놓고, 메뚜기도 잡고 강아지풀도 꺾고 감도 따고 밤도 줍는다. 여름에는 물고기도 잡고 놀았는데 엄마가 이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래도 엄마는 형아랑 놀고 있으면 집으로 부르지 않는다. 오늘은 민식이 형아랑 논으로 갔는데, 허수아비에게 돌을 던지고 놀다가 어른들께 혼났다.

치이, 맞추지도 못했는데


동구 아빠

아빠는 허수아비에게 돌 던졌다는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논에 돌을 던지면 안 된다고 하셨다.

"네에"

라고 대답했다. 그러더니


"동구야, 허수아비 하나 더 만들까?"

"그럼, 그 허수아비는 동구 거야?"

"그래, 어때?"


"우와, 좋아요, 민식이 형아랑 같이 할래요."


허수아비 만들기

아빠는 큰 감나무를 잘라 장대를 준비하고 두 개를 철사로 묶었다. 아빠의 옛 교복을 꺼냈다.

민식이 형아랑 나는 얼굴을 만들 자루를 보며 고민했다. 웃는 얼굴, 눈, 코, 입. 형아랑 나는 천천히 얼굴을 그리기 시작하다가 눈은 너무 크고 동그랗게, 코는 너무 세모나게 그렸다. 다 그리고 나서는 너무 웃겨서 마루를 데굴데굴 굴렀다. 엄마가 동구르르 동구 떨어지겠다며 같이 웃었다. 얼굴을 묶고 교복을 입혔다. 동구표 허수아비다!


나도 허수아비

나는 오늘 태어났다. 웃는 얼굴에 교복을 입은, 눈이 크고 동그란 허수아비다. 나는 멋진 허수아비다.



나는 동구

트렌치코트 입은 허수아비와 내가 만든 교복을 입은 동구표 허수아비를 본다. 민식이 형아랑 심심해서 허수아비에게 돌을 던졌던 일이 생각난다. 허수아비는 참새를 쫓아내는 논 지킴이인데, 돌을 던졌던 일이 새삼 미안하다.


앞으로 허수아비에게 돌을 던지지 않을 테야.


허수아비들

허수아비 둘이서 논을 지킨다. 참새를 쫓는 일은 끝없이 이어지지만, 이제 둘이라 외롭지 않다.


가을을 지키는 허수아비들이,
모델보다 멋있다!


동구표 허수아비가 으스대며 생각한다. 허수아비 위로 가을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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