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를레앙의 묘지에 새겨진 슬픔

Île d’Orléans 오를레앙 섬

by 스노리

Île d’Orléans 오를레앙 섬은 프랑스가 처음 이주했을 때부터 과일과 곡물이 잘 자라 퀘벡의 곡물 창고라고 불린 섬이다. 특히 포도와 블랙 커런트 같은 베리류가 잘 자라 ‘포도 신의 섬’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야생 과일들이 자라고 농사가 잘되어 1600년대 초기 프랑스 정착민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성당을 짓고 마을을 이루고 살아왔다. 고립된 섬이기에 영국의 지배하에서도 영향을 덜 받고 전통적인 프랑스 문화가 잘 보존되어, 지금은 살아 있는 프랑스 박물관으로 불리게 된 섬이다.


점심을 먹기로 하고 남편 친구가 구글 검색한 섬 입구에서 멀지 않은 레스토랑으로 간다. 길게 줄 서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를 지나면 넓은 포도밭이 있는, 주변 경관에서 8점을 먹고 들어가는 레스토랑이다.

포도밭 앞에 차를 세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주차장에 큰 투어버스가 주차되어 있다. 역시나 단체 예약이 잡혀 있어 빈자리가 없다고 한다.


“단체 관광 예약이 잡혀 있는 음식점은 맛있는 데를 보지 못했어. 내가 찾아 놓은 레스토랑으로 가요”


라고 말하며 길을 되돌려 처음 지나친 레스토랑으로 간다.

역시 신 포도는 달콤하다.


Classis Monna & Filles 모나 앤 피유는 블랙 커런트를 재배해 잼도 만들고 소다도 만드는 공장이 있는 레스토랑이다.

테이블이 만석이라 20분 정도 기다리는 동안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초원이 펼쳐진 강 앞에 있는 파란 지붕의 블랙 커런트 공장을 견학한다.

공장 바로 앞에 심어져 있는 야생의 허브향이 나는 블랙 커런트 나무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유리문 너머 블랙 커런트를 가공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다. 안에서는 최신 기계를 돌리며 작업하고 있지만 밖에는 처음 재배할 당시의 모습과 기계 도입 전에 사용했던 뭉툭한 기구들 그리고 블랙 커런트를 이용한 상품들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전시되어 있다.



레스토랑의 아래층은 블랙 커런트로 만든 와인과 잼, 젤리 등을 맛보고 구매할 수 있는 상점이다. 첫 번째 시식용 잼을 먹고 너무 써서 ‘웩 이게 뭐지’ 하고 번역기를 돌려 보니 블랙 커런트 머스터드라고 쓰여있다. 붙여 놓은 라벨을 확인하고 딸기, 블루베리 등 다른 베리들과 혼합해 만든 블랙 커런트 잼을 먹어 본다. 새콤달콤하고 진한 농도의 잼이다.

잼을 빨아먹고 리큐어도 홀짝거리며 맛보고 있는데 우리의 차례를 알리는 버저가 울려 레스토랑으로 올라간다.


메뉴의 첫 페이지에는 프랑스에서 와인과 음식 사업을 하던 Monna 모나 가문이 오를레앙 섬에 건너와 블랙 커런트를 재배하고 레스토랑을 시작한 이야기가 애피타이저처럼 쓰여있다. 오래된 흑백사진 속의 후손들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가며 그들의 조상에게 영원의 이름을 선사하고 있다.

퀘벡 전통 음식인 푸틴과 오리 다리, 치킨과 샌드위치, 핫도그 등 모든 메뉴에 블랙 커런트가 그 모습을 바꿔가며 들어가 있다. 샐러드에 뿌려진 말린 블랙 커런트, 샌드위치에 스프레드 되어있는 새콤달콤한 블랙 커런트 잼, 그중에서 제일 입맛을 돋우는, 맛깔스러운 색의 블랙 커런트 소스는 느끼한 고기를 담백하고 상큼하게 만들어 줄 뿐 아니라 그 자체도 아주 맛있다.

남편의 친구가 주문한 캐나다식 핫도그는 내가 좋아하는 바게트에 블랙 커런트 소스가 줄줄 흘러내리는 아주 맛있게 보이는 핫도그처럼 생기지 않은 핫도그였다.

어제부터 김치가 자글자글 씹히는 소스에 담긴 딱 한국식 만두같이 생긴 라비올리를 시키더니 오늘도 제일 맛있어 보이는 핫도그를 먹고 있다. 다음에 같이 식사하게 되면 그가 주문하는 것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한다.

시원하게 펼쳐진 초원과 강 옆의 확 트인 야외 테라스에서 블랙 커런트의 향기를 마시며 블랙 커런트가 가득 든 점심을 먹고 블랙 커런트 소프트아이스크림으로 정점을 찍은 후 섬을 둘러보기 위해 떠난다.


처음 만난 오래된 교회 같이 생긴 석조 건물은 Saint-Pierre 생 피에르 마을에 있는 Boutique d’artisan 예술가 상점이다. 마을 사람들의 퀼트, 자수 등 수공예품과 갤러리, 조각 작품을 볼 수 있는 곳인데 관광객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일찍 문을 닫아 버렸다.

근처에는 사과와 블루베리를 재배하는 Domaine Orléans 농장이 있어 과일을 직접 따고 주스도 만들어 먹을 수 있지만 이미 블랙 커런트로 가득 채워진 위에 더 이상의 자리가 없어 빨간 자두처럼 탐나게 심어진 사과나무와 가지런한 초록 들판의 냄새만 마시고 평원을 지나간다.


생 피에르 마을을 지나면 오래된 교회와 고풍스러운 프랑스 스타일의 주택과 돌로 만들어진 집들이 초원 위에 모여 있는 Sainte-Famille 생 파밀리 마을이 나온다.



초록의 평원 위에는 초기 정착민부터 현재까지의 가족의 계보가 보관된 Maison de nos Aïeux 메종드 노제 박물관이 파란 하늘과 초목의 빛을 받아 더 푸르게 서 있다. 자신의 뿌리를 찾아 문서를 열람하고 과거를 헤집다가 우연히 가족의 비밀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는 미스터리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따사로워 보이는 고택이다.

박물관 뒤로는 초창기에 섬을 이루고 살았던 가문을 기념하는 공원이 강과 함께 펼쳐진다. 공원 가운데에 서있는, 땅 아래 발을 묻고 가지가 돋아난 손을 뻗은 인간 형상의 기념비가 자연을 닮으라고 외치며 땅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듯하다.


메종드 노제 가까이에는 섬에서 제일 오래된 생 파밀리 교회가 있다. 1600년대 지어졌다기에는 은빛의 첨탑이 반짝반짝 빛나고 건물이 세련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영국과의 전쟁에서 파괴되고 벼락을 맞아 계속 보수되며 현재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교회 옆의 묘지에는 아주 오래된 비석부터 최근 묻힌 묘지까지 다양한 비석들이 서 있다. 2살 난 아이의 무덤부터 90살을 넘게 산 분들이 외롭지 않게 가족들과 가까운 곳에 누워 있다.


빨간 장미가 새겨진 한 가족묘가 눈에 띈다.

비석에는 오래된 아픔이 새겨져 있다.


Jacques 1971-1989

Lysandre 1936-

Hildegard 1944-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은 아들을 위해 무수히 빵을 굽다가 이제는 무뎌진 가슴만큼 딱딱해진 빵을 나누는 노부부의 삶이 전해져 와 마음이 아려 온다.


섬은 꽤 컸다. 금방 한 바퀴 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중간중간 보이는 예쁜 마을과 오래된 성당들에서 멈춰 구경하다 보니 조선소와 옛 농가를 체험하는 곳들이 문을 닫아 버렸다.

섬을 한 바퀴 돌 무렵 동쪽 해안가에 초록빛의 첨탑이 따스해 보이는 성당 옆에 강을 향하고 있는 공동묘지가 보인다. 다리가 없던 옛날, 배를 통해 농작물을 운송하고 고기를 잡던 시절 선장과 선원들이 거주하던 Saint-Jean 생 쟝 마을이다.

성당 옆의 공동묘지의 비석들이 바다를 향하고 있다. 바다에서 평생을 보낸 선원들이 죽어서도 바다를 마주하며 그리워하고 있다.

돌담길 옆으로 나와 붉은 돌들이 퇴적되어 박혀 있는 해안가에서 망자들과 함께 멀리 바다로 흐르는 세인트 로렌스강을 바라본다.


차를 타고 이제는 일상처럼 뻔뻔하게 길을 잘못 들어 해안도로를 놔두고 그 옆길을 타고 하나둘 불이 켜지는 도시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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