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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몽 Nov 04. 2020

나는 그를 향했고 그는 나를 스쳐갔다

고흐의 '밤의 카페테라스'를 내게로 적는다.


전철 안이 붐비기 시작했다. 주변으로 사람들이 겹겹이 쌓여갔다. 내리는 역이 얼마나 남았는지 살펴야 하는데. 전철문이 열고 닫힘을 반복할 때마다 머리가 까만 콩나물들이 촘촘히 밀려 들어왔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내릴 곳을 지나버리면 항상 그랬듯이 나는 약속에 늦을지도 모른다.


'아, 오늘이 금요일이지. 이런 복잡한 날 약속을 잡다니. 요일을 확인하지 않고 시간을 맞춘 내 잘못이지.'


정확하게 마침표를 찍기보다는 점점점. 말줄임표가 일상이 돼버린 내게 요일, 날짜, 시간 등의 정량화된 개념들은 항상 낯설었다. 정말 어려웠다. 아직 몇 정거장이 남은 것 같은데 자리에서 일어나 확인해야 하나?라는 고민이 시작될 즈음 다음 역이 환승 역임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무릎 위 가방을 어깨에 걸고 비좁은 틈을 이리저리 헤치고 앞으로 향했다.


"넌 기본이 안되어있어. 내가 주머니 속 휴지보다 못한 존재야?
넌 약속이란 것을... 아니다. 내가 잘못인지도 몰라.
네 잘못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래, 다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미소야... 우린."


한 달 여전 그와의 통화 끝자락에 반복되던 단어들이 지금 이 시간 동대문운동장역에서 어딘가를 향해가는 수백의 발걸음 소리처럼 웅웅 울려왔다. 차가운 역사를 걷고 달리는 수많은 음성이 말을 걸었다. 잘못이라는 말. 난 네게 무엇을 잘못한 것이고, 넌 내게 그것마저 네 몫의 잘못이라고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늘의 별보다 더 많은 점들만 지나는 이들의 발자국 뒤로 찍히고 있을 뿐이었다.


'8282555.' 문자메시지를 확인하며 시계를 보니 역시나 약속시간이 코앞이었다. 주영이는 기다릴 줄을 몰랐다. 약속 시간은 아직 여유가 조금 있었다. 그런데도 빨리 오라고 재촉을 하는 것이었다. 항상 그런 식이 었다. 고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었다. 어쩌면 주영이가 아니라 내가 달라지지 못한 것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오늘도 또다시 늦을지도 모르니까.


4호선으로 갈아타고 문 앞에 기대어 서니 재킷 주머니가 또다시 울린다. 날이 제법 더워져 가벼운 재킷을 걸쳤더니 그 떨림이 제법 시끄러웠다. '주영이겠지'라며 확인도 안 했다. 빨리 내려 뛰어갈 생각만 했다. 두정거장만 가면 바로 혜화역이까. 역에 도착하자마자 약속 장소에 가까운 출구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재킷이 부르르 계속 떨려온다. 혼자 기다리는 것에 익숙지 않은 주영이는 오늘도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주머니 속의 삐삐를 꺼내 들고 출구를 찾았다. 마음이 급하니 출구 번호보다 계단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한숨에 뛰어 올라와 땅 위 세상을 보니 3번 출구. 2번 출구로 나왔어야 하는데 항상 난 그랬다. 몸이 피곤한 사람이었다. 다시 뛰는 수밖에 없었다. 오래간만에 짧은 치마에 힐을 신고 나왔는데 말이다.


몇 걸음 뛰기도 전에 건널목에 닿았다. 햇살에 달아오른 초여름 금요일 저녁. 풋사과 향이 넘쳐나는 대학로의 건널목. 빨간 신호가 바뀌기만을 기다리는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좌우의 모두가 약속시간을 향해 발돋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출발선에 서있는 달리기 선수들처럼. 초록 신호가 들어오자 나는 그 누구보다 빨리 움직였다. 새 구두라 그런지 발이 아팠다. 조금 뛰었을 뿐이데, 익숙지 않은 것들은 매번 이렇게 상처를 주었다. 낯선 것에 아팠다. 그가 그랬듯이... 잘못은 자신의 몫이라 말했듯.


'그래, 너 말이야. 너.'
'어, 너... 왜 여기에 있어?'


해가 넘어가는 금요일 4호선 혜화역 3번 출구 옆 건널목. 오렌지빛의 해는 숨을 멈췄고 시간은 찰나에 섰다. 그와 나, 우리 둘만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너... 그도 나처럼 들리지 않는 말만 뱉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멈췄던 시곗바늘은 다시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째깍거리는 바늘을 따라 나는 길을 건넜고, 그 역시 반대편을 향했다.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전철 안에서 귓가에서 시끄럽게 울려대던 말들이 오늘 아침 알람 소리보다 더 크게 요동을 쳤다. 그런데도 앞만 향해 걸었다. 내가 무쏘도 아니고 뿔도 없는데 이렇게 앞만 보고 가다니. 내 목은 장맛비에 젖었다 말라 빳빳해진 수학 교과서 같았다. 교과서 속 함수 문제처럼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소야! 여기야!"

나를 부르는 목소리보다 하얗고 긴 주영이의 손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아지트이기도 이곳은 재즈를 주로 연주해주는 곳이라 온통 밤의 색이 그득했다. 창밖에는 아직 어둠이 완전히 내리지 않았지만 이곳은 이미 한밤에 와 있었다.


"계집애, 평소에도 좀 이렇게 입고 다니라니까. 내가 꼭 코디를 해줘야 되니? 그래도 요즘 물에 젖은 생쥐꼴이더니 오늘은 좀 봐줄 만하다."

"말 참 이쁘게도 한다. 이쁜 입술에서 고운 말만 나오면 안 되니?"

"웃겨, 너도 크게 다를 바 없으면서, 그나저나 우리 먼저 한잔하고 있자. 곧 올 거야."

"누가와? 우리 둘이 마시는 거 아니니?"

"풀 죽어 있는 널 위해 언니가 신경 좀 썼다. 기다려봐. 여기요. 버드와이저 4병 주세요. 과일이랑요."


주영이가 평소와 다른 게 좀 이상하긴 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이게 아닌데, 뒤를 돌아보지 못했던 목이 문제인데. 일단 가져온 맥주를 한 모금 넘겼다. 그 사이 밖의 하늘은 어둠에 빠져들고 있었다. 포도알 하나를 집어 먹었다. 쉴 새 없이 종알거리는 주영이의 단어들이 귀에 담기지 못했다. 여전히 목만 뻣뻣했다. 앞만 보던 내 눈앞에 별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에게도 떠오를 혜화동의 별들이 밤하늘에 촘촘히 박혀갔다. 그도 나처럼 굳어가는 신경을 주무르며 이 별을 보고 있겠지.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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