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108

눈의 결정을 따른 내 삶의 결정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은 단하나. 지금이라는 시간이다.

by 화몽
드르륵... 드르르르륵... 드르르륵...


그녀에게 음성을 남기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를 삼키듯 반쯤 열린 내 방문 사이로 얇은 떨림이 들려왔다.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되어 있었던 걸까? 그녀와 나는 동시에 서로를 찾았다. 우리를 원한 것은 서로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검은 하늘은 하얗게 채우고 있던 눈이 우리를 부른것일지도. 나는 답을 남기고 이불속으로 들어가 내일을 그려봤다. 만약 눈이 많이 오면 다음날 학교에서 만나자던 우리 둘만의 기약 없던 약속. 오지 않을것 같던 날이 내일로 다가와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기에 나머지 그림은 꿈속에서 만나기로 하고 설렘에 감기지 않는 오늘의 셧터를 내렸다.


학기 중에도 지각만 면할 시간즈음 눈썹을 날리며 문을 박차고 나가던 딸의 뒷모습이 항상 불만이셨던 엄마는 이런 내 모습이 의아하다며 오히려 걱정을 하셨다. 그것도 방학중이고 몇 년 만의 폭설에 서울이 꽁꽁 얼어붙었다고. 이런 엄마의 말씀이 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나는 순백의 세상을 만나러 가려고 준비 중이었다. 밖을 여전히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단단히 옷을 입고 가방 속에 카메라가 들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을 했다. 서둘러 버스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이미 사람들이 오가는 도심의 눈은 그들의 구둣발 밑에 으스러져 있었다. 달과 해가 만나던 그 시간 이미 순백은 그 빛을 다했고 세상과 뒤엉켜지고 있었다. 차가운 새벽의 내음은 사라지고 사람의 살 내가 스며들고 있었다.


내가 다니는 대학은 인 서울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의 장소에 있었다. 4년 내내 나를 괴롭히던 통학거리 덕에 나는 순백을 만날 수 있었다. 태초의 숲 속에서나 만날 수 있으리라 여겼던 그 빛. 내 심장이 고스란히 비치던 그 투명한 하얀색. 모든 것을 비쳐낼 듯한 거울이 그곳에 있었다. 순간순간이 첫발이었다. 영화 속에서나 봐왔던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발을 옮기기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대강의 시간에 지각한 학생의 심정으로 뒤꿈치를 바짝 올렸다. 토슈즈를 신고 걷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녀와 나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조금씩 나아갔다. 끝이 없을듯한 순백의 벌판으로. 이따금 서로를 향하며 웃음만 전했다. 순백의 도화지에 내 몸으로 조심스레 그림을 그려갔다. 그렇게 그 순간을 내 가슴에 각인시켰다.


그 겨울 나는 그곳에 머무르기로 마음을 정했다. 사실 나는 이미 세상의 품에 안겨버렸다. 막 성인이 된 내가 있는 곳은 덥지도 춥지도 배고프지도 배부르지도 않은 그런 곳. 내일에 대한 고민이나 어제에 대한 반성이 불필요한 곳이었다. 오늘이 즐겁고 행복하면 그만이었다. 살벌한 통학거리도 버스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참아낼 수 있었다. 무더운 여름 다시 입시학원을 등록한 친구들의 소식도 쉽게 흘려버릴 수 있을 만큼 상처는 아물어갔다.

내게 눈은 눈보라가 아니었다. 온몸을 얼려버리는 고통의 순간으로 남아있지 않았다. 눈부신 순백의 빛일 뿐 눈 속에 파묻혀 있는 삶의 이면은 보이지 않았다. 알려고 힘쓰지 아니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으니까. 파란 하늘과 흰 눈이 닿아있던 그날 그녀와 나는 더 이상 애쓰지 않기로 했나 보다. 남아있던 미련을 눈 속에 묻어버렸다. 그리고 참 쉬이 살아왔다. 열정이라는 불씨가 그 날의 눈 속에서 잠들어버렸다.


2021년의 내 하루가 고단하거나 어려운 것은 아니다. 여느 40대와 비슷한 매일을 보낸다. 감사하고 행복한 순간도 많지만 오늘처럼 추운 날이면 지난날에 남겨진 알싸한 상처가 욱신거리곤 한다. 그럴 때면 따뜻한 커피 한잔을 끌어안고 폭신한 순간을 스스로 청해 본다. 따뜻한 집안의 온기에 몸을 녹일것인지 차가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봄을 만나러 길을 나설것인지. 이를 선택하는 것은 순전히 내 몫이다. 눈이 주는 인상은 모두 다르다. 누눈가에게는 황홀한 아름다움으로 다른 이 에게는 살을 에는 눈보라로 남을 것이다. 내게 눈은 순백이다. 모든 순간을 비춰내는 거울이다. 바라보기만 하며 마음속에 안고 지낼 것인지. 발자국을 찍어내야 할지 고개를 돌려가며 시선을 넓혀가야 하지 않을까? 이어 내리는 눈이 내 걸음을 지워낼지라도 한발 그리고 또 한발. 뽀드득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아갈 때다. 늦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유명한 책의 제목처럼, 지금이 가장 빠른 때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눈의 결정이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듯이 내 삶의 결정도 나만의 모습이있으리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