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말

'공심재. 신나는 글쓰기 2기' A06_시를 산문으로 바꾸기

by 화몽

"어떻게 지내니? 잘 지내지? 난 뭐 그냥 그래. 사는 게 뭐 특별할게 없지. 그날이 그날이야. 아! 그래도 오늘은 오랫동안 벼르고 별렸던 일을 했어. 머리 스타일을 좀 바꿨어. 너무 길어진 것 같아서 곧 6월이 되니 바람도 덥더라. 그거 빼면 뭐 다 거기서 거기지. 이거 빼곤 다 비슷해. 음... 달라진 게 있다면..."


'뚜뚜뚜...뚜뚜...' 이렇게 또 수화기를 힘없이 떨군다. 이 시간이면 습관적으로 그에게 전화를 건다. 창가에 서서밖을 내다보니 빠르게 길위를 지나는 아이들이 보인다.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녀석들. 대여섯 명인 쪼르르 달리다 이내 엉켜 붙어 뒹굴거리며 키득키득 웃기를 반복한다. 앞으로 간다기보다는 원을 그리며 나아가기를 망설이는듯해 보였다. '풋. 나 같아. 나도 지금 제자리걸음 중인데...' 뭐한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아니면 다 그렇게 보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녀석들의 웃음소리가 꼭 닫힌 내 방 창문을 넘어오는데도 난 아이들이 웃지 않는다 믿고 있다. 내가 그렇기에. 나의 시간은 여전히 2020년이 아닌 분홍색 꽃비가 내리던 2019년의 너의 뒤를 따르던 그 밤에 머물러 있기에...


우리는 그랬다. 서로의 눈에 비친 각자를 바라보기 보다는 두 손을 꼭 잡고 서로의 발걸음을 맞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의 마음의 키는 비슷해져 갔고 보폭은 닮아갔다. 코 끝을 간질이던 꽃바람에도 우리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잡은 손에 생각이 적혔고 움찔거리는 손가락이 그 문자들을 읽어냈다. 항상 같았다. 하얗고 통통한 내 손바닥과 맞닿아 있는 그의 손바닥에도 세 글자가 적혀있었다. '사랑해.' 우리 둘에게 말이란 어깨에 뽕이 가득 들어간 거추장스러운 외투였다. 그랬다. 그래 그랬다. 유한한 것은 없다. 세상은 흘러간다. 시계가 또각거리며 움직이기에 흘러가는 것이 아니었다. 흩날리는 꽃잎에 연둣빛 새싹들이 올라오듯이. 하늘을 바라며 자라나는 짙푸른 신록이 이내 차가워진 바람에 실려 여기저기로 몸을 숨길 때. 그때처럼 변해간다.


이제야 아이들이 꼬리잡기를 마치려나보다. 한 녀석이 핸드폰을 꺼내 들고 잠시 멈춤이다. 나머지는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그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아이들의 언어로 보이는 수신호를 나누더니 가방을 고쳐맨다. 그래 집으로 돌아가야지. 너희에게는 아직 따뜻함을 나눠줄 곳이 있으니 어서 가자. 내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아이들은 블랙홀에서 나와 숨이 틔려는데 난 다시 빠져든다. 그 검은 구멍 속으로. 손 끝으로 전화기를 만지작거린다. 너무 깊이 새겨져 버렸다. 지워지지 않으려나보다. 엄지 손가락에 힘을 주어 손바닥을 문질러본다. 보이지도 않는 이 세 글자가 이 시간이면 전화기의 '0'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내렸다 한다. 영원하리라 믿었던 동그란 모양으로 눈길을 옮긴다.


내 시선을 묶어볼 무언가를 애써 찾아보지만 목이 마르다. 작은 생수병을 열어 컵에 쪼르르 따랐다. 이 소리의 공명이 내게 말을 건다. 이렇게 큰 소리를 내었었나? 흐르는 물이? 아차 하는 순간 물이 컵을 가득 채웠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 어떤 향도... 찾을수 없는 그런 순간의 연속이다. 컵에 입을 맞추는 순간 입술이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입술이 이렇게 말라비틀어져있는데 이제야 물을 찾다니. 이럴 때면 나 자신이 어찌나 미련하다 느껴지는지. 마시는 물이 비릿하다. 억지로 벌린 입술에 찢어진 모양이다. 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닦아냈다. 여전히 흐른다. 쉽게 멈추지 않을 모양이다. 붉게 번진 종이컵을 내려놓고 창을 열었다. 멀어져 가는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흔들어주었다. 심장에 뱉어낸 자국이 선명한 그 손으로. 그 녀석들은 모를 거다. 이 순간을 훔쳐낼 사람이 있을까? 이 움직임을 앗아갈 이가 있겠냐는 말이다. 없지. 없어. 나 만 알아. 창문틀에 '0'을 그리며 오늘 나의 하루를 중얼거리는 나를. 초여름밤바람에는 사과 향이 묻어있다. 풋사과가 남겨놓은 이 밤의 내음을 공허한 하늘에 날려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오늘 밤도 잠들 수 없을 것이다. 바보 같은 너를 이리도 안고 있는 나는 바보 천치니까. 전화기로 전하지 못한 밤의 인사를 바람에 실려 보낸다.


'사랑해... 너를 잊을 수가 없어. 이렇게 잠이라도 청할게. 난 너를 계속 그리워 하겠지.'


바람의 말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놓으리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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