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이런 시간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지금을 떠나보내며 나를 기억하고 시간을 소중히 하기 위한 길.

by 화몽

졸졸졸 조르르 졸졸, 유월의 한낮 그 뜨거움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산기슭의 샘물. 투명한 빈 페트병에 햇살로 반짝이며 차오르는 시원함을 한 모금 마시니 근심 걱정이 찰나로 지워져 간다. 흐르는 물에 손을 비벼 씻으면 조금 전 낚아챘던 영롱한 물빛은 손가락 사이를 넘어 흙 위를 촉촉이 젖게 한다. 시간이란 이런 것일까? 손가락 틈으로 내려뜨려진 물처럼 잡을 수 없는 것. 담아내려 애쓰고 잡으려 발끝을 동동거려도 결국 솟아오른 샘물처럼 흘러가 버리고 만다. 나는 사십여 년의 시간을 지나며 어디로 번져가고 있을까?


내 그림자 위를 눅여낸 시간을 말려 한아름으로 안을 수 없음을 이제 알았다. 매일을 살아가며 마음속 불들이 타들어가 허연 재로 굳어 여기저기 들러붙었다. 쉼 없이 기침을 토했다. 꼬맹이 시절부터 모아 온 꿈이란 조약돌이 불똥이 만든 구멍 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흘러가 버린 것들을 뒷걸음질로 찾아가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걸까? 길이란 뚜렷이 눈에 띄기도 하나 가려고 하면 이내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그제 나는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의 주사위를 던졌다. 내 나이 40이 넘어 찾아온 기회, 새로운 공부. 이제라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진정 열렬히 배웠고 바람을 더해 더 공부하고 싶었다. 할 수 있다는 소망을 앞에 놓인 시간을 향해 힘껏 던졌다. 소유격으로의 내가 아닌 주격인 내가 되기를 바라며 홀로 걸어야 할 그 위로 내뿌렸다.


시간이란 정녕 얄미운 존재다. 달력에 크게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기다리면 기다림에 지쳐 쓰러질 때쯤 눈앞이 떨어져 찰나의 순간에 지나치게 된다. 다시 오지 않게 돼버린다. 아무리 아쉬워하고 그리워해도 지나간 버스이며 잡지 못한 님이다. 기다림의 하루하루는 켜켜이 쌓여 더디게 온다. 정해진 시간은 창틀에 미련이 매달려 초봄볕에 녹아내리는 고드름 같다. 대학원 원서 접수일은 다가오고 내 마음은 마침표를 쉬이 찍지 못했다. 두 눈 딱 감았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망설이고 애태우며 그 끝을 봉해 부치지 못했던 대학원 입학 원서. 두려움에 하얗게 질린 봉투를 우체통에 던져 넣었다. 마감일 당일에서야 나를 몰아치듯 닦달하며 서류들을 준비해 원서를 냈다. 그리고, 서류 합격. 6월 20일 학교에서 면접이 치러진다는 문자를 받았다.


서울에서 동대구, 거기에서 또 대구대학교까지는 4시간여 걸렸다. 면접 당일 아침 서두르는 마음을 얹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역전 편의점에서 2+1 초콜릿을 손에 들고 감미로운 내일을 그려봤다. 하나 더하기의 순간이 내게 남은 시간에도 남아있기를 기대하며 기차에 올랐다. 지금이 그 순간이 아닐까? 열차의 서너 개의 계단을 오르는 걸음이 단단해진다. 대구라는 도시를 향하는 급행열차는 하늘 높이 오르는 태양을 뒤쫓아 달린다. 면접 질문에 준비하려 전공 기본서의 목차를 프린트했다. 나란 사람의 속내와 생각의 씨실 날실을 엮어 써낸 자기소개서도 한 부 챙겼다. 또각또각 펜을 이리저리 굴리며 읽어나갔다. 교수님들이 어떤 질문을 하실까? 혼자 답하며 입을 뻥긋거리고 배시시 웃었다. 차창 가리개를 넘어 들어오는 햇살이 계절을 벗어난 열차 안의 차가운 기류를 따사롭게 해 준다. 유독 에어컨 바람에 민감한 내게 뜨거운 초여름 햇살이 고마울 따름이다. 가리개를 걷어 올려 밖을 내다본다. 이렇게 홀로 기차를 타고 온전히 나를 위한 길을 떠나본 게 언제였던가 기억 속을 한참 더듬어봐도 생각나지 않는다.


무엇이 두렵고 어떤 것이 겁이 났을까?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을까? 식구들 생활을 돌봐야 하는 내 자리에 실금이라도 생긴다면? 거기에 금전적인 부담감. 휴... 이런 것들은 가타부타한 이유일 뿐이다. 사실 나에 대한 자신이 부족했다. 순전히 그것이 지지부진했던 내 모습의 연유일 것이다. 아직 서툴다. 어쩌면 날숨의 시간 내내 덜 익은 풋 향의 것으로 살지도 모른다. 눈동자를 파고드는 햇빛을 마주하니 내 그림자가 선명해진다. 더는 그림자 속에 숨지도 이를 부정하지도 않겠다 다짐하며 면접장 안으로 향했다.


각자의 . 각자의 나날. 각자의 계절, 각자의 생과 시간이 있다. 물리적으로 같은 순간을 지나지만, 감정적으로 설명되는 찰나에 대한 기억은 같을 수 없다. 내게도 항상 같은 어제가 있었고 매번 지금의 날이 온다. 이 또한 지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억지스럽다. 정성을 들인 진심을 다해 답을 내고 오는 것이 내가 할 전부이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이유와 열망을 전하고 오리라. 학교 앞 길가에 뜨겁게 피어오른 붉은 장미가 나를 뜨거이 반겨준다. 심장 밑에 꼬깃꼬깃 접어놓았던 날개로 펼쳐보리라. 하늘을 본다. 벌겋게 달아오른 태양이 이글거린다. 이성의 눈을 감아 마음의 눈을 연다. 칠흑의 심성 속 수많은 별을 바라본다. 별들이 여명에 흩어져가며 새로운 날이 시작하는 때를 살며시 다시 올려본다. 이루려 말고 해내려 말고, 다시 오지 않을 이 시간을 묵묵히 지나야 하지 않을까? 언제가 어디에 있는 누군가가 나를 반짝임으로 기억해주리라 믿는다. 삶에는 이유가 있다. 날지 못하면 어떠한가! 날개가 있었던 순간은 그곳에 흔적을 남길 테니.



글감 명사 : 길, 날개, 기류
글감 동사 : 흐르다, 바라다, 돌아오다.

ps. 혹 궁금해하시는 분이 계실까요? 화몽은 소망을 길로 한 걸음 다가갑니다. 다친 마음, 잃어버린 나를 찾는 길의 짝이 되어드리고 싶어요. 그림을 그리면서요. 오는 가을 다시 학생이 되어요. 제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음에 감사한 날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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