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며 배우는 시간, 여름의 교과서
컴퍼스를 꺼내 들고 전에는 잘 그리지 않던 커다란 원을 종이 위에 올린다. 스케치북의 남은 장수를 확인해 본다. 이리저리 봐도 원이 완전히 동그랗지 않다. 다시! 서너 장의 종이에 원을 그려놓고 개중 가장 맘에 드는 것으로 선택한다. 연필을 새로 깎고 색연필의 개수를 세어본다. 개수는 12개인데 똑같은 색이 있다. 역시 동생의 색연필 통에 내게 없는 색이 2개가 들어있다. 하늘색은 필수지. 요 녀석 여기 있구나. 시계를 올려다보고 시간을 옮긴다. 8시에 줄을 그었다가 지웠다가 두어번 반복한다. 9시로 옮겼다가 새 나라의 어린이로 거듭날 다짐을 하고 8시에 연필을 꾹 찍는다. 밥 먹는 시간과 꿈나라로 떠날 시간에 긴 줄을 그리고 숙제, 놀이, 티브이 볼 시간 등등을 크게 나눈다. 사실 내용보다 알록달록 색칠해 가는 과정이 방학 시간표의 화룡점정. 한 달여의 방학이 얼마나 쏜살같이 지나간다는 것은 수년의 경험으로 이미 잘 안다. 욕심이 앞서면 쫄딱 망할 것이 뻔하지만 그건 그때 생각하기로! 이미 마음은 계곡과 바다에 가 있다. 저물어가는 여름날 하늘이 시원한 수박 한 조각처럼 붉어져 간다. 이렇게 방학의 첫날이 어둑해진다. 이번 방학 완수해야 할 과제들은 내일로 쭉 미뤄놓은대 잠을 청한다.
시험기간의 시작은 공부 계획을 짜는 것이요. 시간표 만들기가 방학의 출발선이다. 지킬 수 있게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이를 아는 국민학생이 어딘가 비정상 아닌가? 꿈은 크고 높게 가져라. 과하게 밀도 높은 시간표로 하루이틀 지내보면 여기저기 무너져 내린다. 책상 앞에 붙여놓았던 총천연색 무지개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다. 재미있게 노는 것이 방학의 제1과제라며 형제자매와 의기투합해 온 동네를 쏘다니며 까맣게 그을릴 때쯤 까마귀사촌이 되기 위해 산과 바다로 떠난다. 그땐 그랬다. 쪼개어 뛰어놀던 시간을 하루 종일 노는 게 방학이었다.
“재미있게 노는 것이 방학의 제1과제였다.”
아파트 입구를 바쁘게 오가는 노란색 버스들을 보면 맘 한구석이 짠해진다. 대형 버스에 꽉 채운 아이들의 표정이 차갑다. 국민학생과 초등학생의 가장 큰 차이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인 듯하다. 놀면서 큰다는 명확한 진리를 알지만, 부모가 된 우리는 그때를 다 잊어버렸나 보다. ‘나중에 후회해.‘ ’이런 경험이 중요하지. 휴가는 여기로 가자.‘ ’친구들은 다 한다더라.‘ ’그건 위험해. 거기서 놀지 마라. ‘이런 말들로 아이들에게 목줄을 맨다.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뛰어놀았는지 까맣게 잊은 채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 포장한다. 해야 할 일들보다 즐거운 일들로 채워나가야 할 시간임을 잊고 나 역시 그렇게 살고.
“방학이란 아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닐 수도 있다.”
방학이란 아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닐 수도 있다. 쉼표가 필요한 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일지도. 세상의 잣대에 길들어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우리도 함께 잠시 멈춤 해야 할지도. 계절 덕에 쉬라는 취지에 맞게 함께 일상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보자. 가로수에서 온몸으로 노래하는 매미처럼 이 한 몸 불태워 놀아봐야지. 뛰다 더위에 지치면 커다란 나무 그늘 밑에서 바람에 실려 오는 초록 내음을 한껏 들이마시며 눈을 감는다. 행복이 이렇게 가까이 있음에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