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게를 담은 부엌의 온날
달그락… 달그락… 또르륵. 톡탁틱틱… 탁… 쏴아…
조심스럽게 쌓아둔 그릇들을 정리한다. 어젯밤이 뒤엉켜 있는 개수대 안의 그릇들을 씻어 올린다. 접시에 달라붙어 있는 머스터드를 문질러 닦는다. 머쓱하다. 누구는 이렇게 남겨 놓으면 잠이 안 온다던데. 나는 던져 놓고 잘만 잔다. 하나, 둘, 셋 , 넷… 숟가락을 헤아린다. 설거지를 할 때 생긴 미묘한 습관이다. 언제부터던가 어둑하다. 깔끔함을 멀다. 마음은 그때그때 정리하자지만, 현실의 탑은 높아만 간다. 고무장갑을 낀 손은 네 손이다. 어색함에 물살 안으로 숨어버린다. 네 손은 빠르게 거품을 일어 바다로 밀려간다. 이리저리 오고 가는 그릇들은 작은 종들이다. 뎅뎅… 뎅. 덜그럭 거리는 크고 작은 그릇들의 소란함은 음악이다. 오늘의 소리는 쓸쓸하다. 아니다. 씁쓸하다. 혀 끝에 남은 맛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본다. 아차 아직 미끄덩한 고무장갑손이다. 휘이익 휘져어 거품을 거둔다. 투명하게 번지는 색들은 붉다. 파랗다. 유리잔 너머로 반짝인다. 또르르 굴러내리는 빛들이 다채롭게 소리 낸다. 하나로 모인다.
서랍을 여닫는 소리, 종이들이 스치어 책상 위를 오간다. 다녀오겠다며 음성을 남편이 남긴다. 이내 집은 나 홀로 덜컥 잠긴다. 지지직거리며 “누전기 교체하실… 입주민… 감사합니다.” 발판 위에 서있는 내 등뒤에 남겨진 잡음들. 이렇게들 살지. 다들 그렇지. 베란다 너머에서 보이는 주부는 늘어진 고무줄이다. 매일 같은 곳에 서 있다. 하루하루 조금씩 더 쳐진다. 그날이 어제. 오늘이 그날. 쳇바퀴 속에서 늘어져간다. 이렇게 바삐 보내도 0.5배속이다. 칫…
도마 위로 던져진 무덩어리는 또깍거리며 깍둑 썰린다. 큰 냄비를 꺼낸다. 일 년에 두어 번 손길이 가는 그 안의 꼬신내가 코를 뒤흔든다. 달궈진 쇳덩이 안으로 고기를 던진다. 쌰아악 촤르륵. 딱 딱 탁탁… 향긋하게 뒤섞이는 탕국은 부엌을 가득 채운다. 슬슬 나물거리를 씻는다. 살살 흔들어가며. 손맛이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질감이다. 머리는 냉동실 구석구석을 더듬는다. 훅하고 얼굴을 스친다. 분명히 구분했다. 그 경계는 다시 흐릿해진다. 남은 고기, 아이스크림통, 냉동식품들, 생선, 다진야채들, 부끄러운지 검정 봉지 속에 숨어버린 진창이다. ‘냉동실 깨끗이 해야지..’ 이런 다짐은 오늘뿐이다. 오래된 약속이다. 언젠가 지켜낼 그런 연습니다. 냉동실에 넣어버릴 것은 이런 잡념들인데. 제사 준비로 바쁠 때 후회 따윈 웬 말인가. 이 칸 저 칸 휘저어 전거리를 꺼낸다.
수년 전 돌아가신 시아버님의 제사. 제사란 코흘리개 시절부터 익숙한 장면이다. 지지고 볶고 보글보글 넘쳐흐르는 커다란 냄비. 음식 준비는 어렵지 않다. 쉴 틈 없이 종알거리는 손으로 왔다 갔다 한다. 꼬박 하루를 보내면 온몸은 녹는다. 땀냄새와 지글거리는 기름냄새가 구분되지 않을 때 끝이 난다. 정신이 아찔하면 몸도 무너진다, 몸이 바닥에 쓰러지면 정신은 꺼져버린다. 힘들다와 피곤함이 겹친다. 죽음, 생을 다한다는 건 체력이 완전히 바닥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죽음을 기억하는 의례는 온종일 돌아가는 환풍기의 낮은 숨소리처럼 무겁다.
여름이 가을로 흘러가는 지금, 많은 이들이 삶을 끈을 놓아버린다. 결실의 가을은 풍요와 끝맺음으로 향하는 문턱이다. 여름의 기세에 지쳐 문턱을 넘지 못하나 보다. 체력이 마음을 놓아버린다. 앵앵거리던 매미 소리가 잦아들고 귀뚜라미의 가는 울음이 퍼져간다. 경계에 선다. 햇살의 각도는 낮아지고 그림자는 길어진다. 어둠이 찾아오는 시간이 잦아들면 어른들은 무게를 이겨지지 못한다. 시아버님의 부재가 찾아왔던 때도, 바로 이런 계절의 문턱이었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리듬처럼 삶도 따라 춤춘다. 격렬한 여름의 춤뒤에 그림자 속에 누워버린다. 그리고 다시 일어날 수 없다.
탁하고 계란을 깨다 잠시 멈춘다. 뒷베란다 너머로 나부끼는 초록 그림자를 바라본다. 시간이 흐르는 방향으로 번지는 빛을 안는다.
숨을 내쉰다. 휴… 숨이 들어온다.
오늘을 살고 있다.
오들을 살아 낸다.
죽은 이의 상위에 내가 살아있음을 차린다.
삶은 결국 몸의 힘 위에 세워진다. 몸을 일으키는 건 마음이다. 나의 공간에서 그 안을 가득 채운 시간 속에서 나는 다짐한다. 매일을 버티며 내일을 만난다. 계절의 끝이란 없다. 영원이란 더욱더 없다. 그럼에도 나는 간다. 새로운 시작을 향해. 찡긋 웃는다. 맛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살아있음은 따스하다. 소박한 맘이다. 가을빛이 내일을 비춘다. 그리고 나는 안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이 부엌에서, 오늘의 작은 숨결이 내일의 생명을 지켜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