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주관적인 행복감, 이를 키우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일지 모른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이루는 한자를 가만히 살펴보면 복을 지닌 상태이다. 누구나 원하는 삶의 지향점이 행복일지 모른다. 정치사상도 마찬가지로 현세의 행복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플라톤(Piatōn)이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ēs)와 같은 고전적 체계에서도 행복(에우다이모니아)은 궁극의 목적이었다. 애써 불행해지려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정상적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행복을 향한다. 시중에 나와 있는 행복에 관한 책들이 수천 권을 넘는다. 행복을 둘러싼 주장과 생각들도 수천, 수만 가지로 뻗어 나간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인간은 행복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무향 무취의 몽글거리는 그 감정, '행복'을 찾아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파이팅을 외친다.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를 행복이라 한다. 만족과 기쁨으로 인한 즐거움이 행복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행복=기쁨'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 등식이 정답은 아니다. 작은 사탕을 입에 물었을 때, 마음에 쏙 드는 무언가를 겟했을 때, 원하는 목표를 이루었을 때 기쁘다고 느낀다. 그 찰나에 기쁨을 느낀다. 기쁨이 계속 이어진다면 우리는 행복감을 느끼다가 조금 더 올바른 표현일지 모른다. 문제는 기쁨이 계속된다고 항상 행복하다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의 기쁨이 꼭 내일의 기쁨이 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상황에 적응되면 또 다른 무언가를 찾으려 한다. 더 큰 자극을 찾아 헤맨다. 사실 행복이라는 단어 자체가 인간의 감정을 뜻하는 것으로 그 뜻을 정의 내린다는 것 자체에 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감정이라는 것 자체가 정해진 기준이나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기쁘고 즐겁지만, 너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기에.
행복이란 지극히 주관적 안녕감이다. 쾌감에 가까운 감정보다는 평온한 상태에 가깝다. 또 주관적인 감정이라는 것이다. 개인 즉 내가 느끼는 것이 주가 된다. 그래서 그 기준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즐거운 순간순간이 반복되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쾌락주의자의 행복도 있고, 자신이 정한 목표를 달성할 때의 느낌(성취감)을 행복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고, 가족이 잘 지내는 것에 만족하는 행복도 있고,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더라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밀물과 썰물처럼 왔다 사라지는 파도의 거품을 바르게 느껴야 한다. 누구나 행복할 수 있지만, 행복감을 자주 오래 가져가는 것은 그 누구의 몫이다.
내게 행복감을 키워주는 씨앗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티브이 드라마의 단골 스토리처럼 돈, 명예, 사랑, 건강이 그 씨앗의 전부일까? 물론 이가 중요한 충족요건들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더해본다. 바로 행복을 대하는 자세이다. 같은 돈, 같은 결과, 같은 상황 속에서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고 중요하다. 행복이라는 씨앗을 크고 시원한 그늘과 다디단 과일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로 자라게 하는 것은 나의 마음가짐이다. 내 주변에서 맴돌고 있는 행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소중히 하는 능력을 연마해야 한다. 대단한 방법도 극한의 어려움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를 소중히 여기고 나를 아끼는 만큼 주변의 관계 맺음을 소중히 하는 것, 그리고 지금 여기에 최선을 다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순간을 온전히 느끼면 된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삶을 꾸려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로또에 당첨되는 것보다 훨씬 쉽게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진정 행복에 이르는 방법이기도 하다.
법정 스님은 "행복은 다음에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입니다."이라 말씀하셨다. 오늘의 나와 주변에 감사하며 이를 받아들이려 노력한다면 누구나 드라마 속 주인공의 삶이 아닐지라도 충만한 행복감 속에 살아갈 수 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자. 당신은 눈앞에 있는 행복이란 이름의 씨앗을 어떤 나무로 키워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