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 속에 깃든 온기, 겨울_ 눈의 결정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무늬

by 화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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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에도 눈이 내린다.

스무 살, 그 겨울의 하루가 아스라이 함께 내려온다.

그날 우리를 흔들건 눈발의 차가움이 아니라,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걸어갈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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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르륵…

그녀에게 음성을 남기고 내려놓는 수화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어떤 떨림이 우리 사이에 있는 걸까. 우리는 서로에게 그랬다.

하늘을 삼키듯 쏟아지는 눈이 우리를 불렀는지도 모른다.

이 눈이 멈추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얀 설렘 속에 만나자며 나눈 약속.

슬며시 감은 눈 위에 하얀 눈이 내려, 기다림은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잠겼다.


“ 이 눈에 어디를 가니? 길이 다 얼었어. 수업이 있는 날도 이렇게 안 나가더니?”


이른 새벽, 엄마의 물음표를 뒤로하고 서둘렀다.

세상에! 순백의 아침이었다. 세상은 천사의 옷을 입고 있었다. 매서운 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그러나 천사는 이미 도심을 떠났다. 오고 가는 발자국에 종적을 감췄다. 세상에 뒤엉킨 햇살에 순백의 빛은 사그라졌다. 내 마음은 좌불안석이었다.


서울의 끝자락에 위치한 대학 덕분에 인파를 피해 순백을 만날 수 있었다.

심장마저 투명하게 드러내는 흰 빛,

모든 것을 비쳐낼 듯한 거울,

순간순간이 첫발, 발을 옮기기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뒤꿈치를 바짝 올렸다.

토슈즈를 신은 발레리나처럼,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미끄러지듯 춤을 추었다.

움직임은 조심스러운 그림이 되었고, 웃음은 노래가 되었다.

순간순간이 순백의 도화지 위에서 번지며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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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 나는 내년의 이름을 흰 눈 속에 덮어두었다. 지나친 열망과 싸우기보다. 이 순간의 순수한 기쁨에 항복하기로 했다. 막 성인이 된 나의 고민은 사그라졌고, 세상에 안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겨울, 봄, 여름, 가을을 재수라는 간판을 단 사각의 학원에서 보낼 용기가 없었다. ’ 그래, 오늘은 행복하자. 이 정도면 충분해.‘ 열정, 꿈, 미래 이런 단어들은 내 곁을 떠났다.

그 겨울, 그 눈 속에 나는 나의 한쪽 마음을 묻어버렸다. 더 이상 애쓰지 않기로 했다. 남아있던 미련을 눈으로 덮었다. 열정의 불씨마저 눈밭에 던져버렸다. 상처는 강제로 덮였다. 무시당한 채로.


꿈을 묻어버린 눈밭은 시간이 지나 거울이 되었다. 묻어둔 아픔은 결국 나를 비추는 빛이 되어 있었다.


계절은 수없이 흘러, 지금 나는 곧 오십이 된다.

함께한 발자국 같은 작은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이루는 무늬 속 하나의 선으로 남았다.

평온한 매일이 감사하지만…

겨울이 오면, 그때 묻어둔 쓸쓸한 상처가 다시 욱신거린다.

아련한 아픔. 이젠 무엇이 낸 상처인지도 희미해져 흉터도 찾기 어렵다.

그래, 나는 이제 안다. 그날의 선택은 온전히 나의 것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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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누구에게는 추위지만, 다른이 에게는 빛이다. 눈의 결정은 모두 다른 무늬를 가진다. 우리도 그렇다. 우리 삶의 조각도 각자의 무늬를 지닌다. 자신의 무늬는 스스로 결정하고 만들어 나간다. 그날 눈 위를 걸어내던 내 발걸음처럼 오늘 어떻게 걸을지도 결국은 내 몫이다. 따뜻한 차 한잔이 나를 다독이듯 거창할 것도 없다. 한 발자국 나아가는 것, 소소한 실천이 내 삶의 무늬를 새로이 한다.


눈은 누구에게나 내린다.

어떤 이는 발자국을 남기고, 어떤 이는 자취를 지운다.

나 역시 멈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눈처럼, 삶의 무늬는 흘러가며 다시 쌓인다.

오늘의 발자국은 오늘의 내가 새기는 것이다.


뽀드득… 뽀드득, 한발, 또 한발.

쏟아지는 눈발이 자국을 지워내도 나는 길을 찾아가야 한다.

한 치 앞을 보이지 않아도 그 길을 그려가야 한다.


눈은 누구에게나 내리지만, 그 의미는 각자의 몫이다.

내가 그랬었다. 그날의 선택이 내 삶의 무늬를 그려왔다. 눈꽃이 만든 무늬들은 멈추지 않는다. 두려워말고 내 삶의 결정을 오늘에 새로 하자. 오늘의 무늬는 내가 선택한다. 내 삶의 선택은 나만의 모습으로 그려가리라 다짐하며,


세상을 덮은 눈은 곧 봄의 강으로 녹아내린다.

오늘의 결정은 내일의 계절에 싹 틔울 씨앗이 된다.

흩날리던 눈발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길을 그려간다.

그리고 어제의 나에게 오늘이 다가가 말한다.

“순백의 눈은 추위 속에서 더 반짝이는 빛이야. 내일을 살아가게 하는 이유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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