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으로 피어나는 온기
겨울의 고요함 사이로,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종알종알 웃음.
그 웃음이 봄 꽃망울처럼 팡팡 터지고,
쏴아 쏴아 소나기처럼 시원하게 쏟아진다.
가을빛 노을처럼 사각사각,
서로에게 울긋불긋 물들어간다.
갓 쪄낸 호빵의 김을 호호 불며
꽁꽁 언 겨울 속에 따숨을 불어넣는다.
여고생들은 온 계절을 함께하며 그렇게 반짝인다.
나뭇가지 끝에 달린 눈송이, 처마 끝 고드름은 겨울의 단면이다. 숨 깊은 고요, 겨울은 그리도 차다. 그렇기에 따스함은 더 귀하다.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이 겨울을 깨고 나온다.
창밖엔 차가운 눈발이 휘 날려도, 미술실 안에는 사계절이 번져 있었다. 대학입시가 주는 무게는 어디로 숨었는지? 등뒤에 붙어있는 등수 따윈 중요치 않았다. 터진 교복을 옷핀으로 부여잡고 모여 깔깔댄다. 축제에 걸 그림보다 오히려 그림을 돋보이게 할 꽃다발 준비에 더 분주하다.
신난다! 재미난다! 풋풋함이 미술실안에 그득했다. 스케치북에 번져가는 알록달록한 수채물감처럼 우리의 우정은 다채롭게 쌓여갔다. 사각사각 붓끝이 종이를 스칠 때마다 교복 치맛자락도 흔들흔들 리듬을 탔다. 웃음은 음악이 되고, 우리는 꿈을 추는 소녀들이었다. 미술실은 화폭이자 무대였다.
무지개 너머의 세상은 가까이 있다. 온정이 번져가는 그곳은 우리 곁에서 자라난다. 여고생들의 웃음이 바로 그렇듯, 따스한 찻잔처럼 손끝으로 번지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얼큰한 어묵국물 한국자처럼 목청을 뜨끈하게 넘어간다. “ 자! 이건 네 꼬치야! 같이 먹자!라고 외치며 간장에 푹 적셔 내게 건네진 어묵에는 친구의 마음이 그득하다. ”꼬리부터! 머리는 내 거야! “라며 뜯긴 붕어빵 한입에서 터져 나오는 팥은 참 다정하다. 온통 주황색으로 물든 손, 까도 까도 끝이 없는 귤은 이리도 달다.
차디 찬 겨울은 이렇게 작은 손길과 웃음 속에서 녹아내렸다. 삶의 추위도 다르지 않다. 누군가 내민 나눔의 손끝이 서로의 온도를 높인다. 마음을 데운다.
집 앞 초등학교와 건너편 중학교 사이의 신호등은 한겨울이면 더 붉고 푸르러진다. 코끝이 시려질 즈음이면 주황색 붕어빵 트럭이 짠하고 나타난다. 봄, 여름, 가을동안 어디에 숨어 있다 오는 걸까. 달력이 얇아질 즈음이면 그 앞은 늘 시끌시끌하다. 입김 사이로 오가는 “ 팥 하나, 슈크림 둘!” 버스럭거리는 종이봉투 속 달콤한 냄새에, 문득 오래전 미술실의 웃음이 떠오른다. 친구의 손에 건넸던 붕어 한 마리가 지금은 아이의 입안에서 녹아간다. 시간을 타고 온기는 손에서 손으로 이어진다.
지난 방학, 큰 아이와 함께 동네 어르신들께 점심을 대접해 드리는 봉사를 했다. 반찬을 담고, 뜨끈한 국 한국자 퍼서 담아드리는일. 불편한 발걸음을 대신해 식판을 가져다 드리고, 빈 그릇을 치우며 자리를 닦는 일. 소소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건네받은 미소와 눈빛, ‘고마워요.‘라는 짧은 인사는 따스하게 내 마음에 머물렀다. 콩 한쪽을 나눈 것뿐인데, 그 온기가 내 안에서 퍼져나갔다.
혼자 봉사 가기가 낯선지, 매번 함께 하던 아이가 방학이 끝나기 전에 몇 번 더 가보겠노라 말했다. 그리고 내가 혼자 가야 했던 하루, 급한 일이 생겨 고민을 하는 내게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아이의 마음도 성큼 자란 순간이었다.
메신저가 울렸다. 식판 사진 하나. 그리고 한 줄의 말이 내게 왔다. 내 마음과의 행간이 얼어붙은 겨울의 한 자락을 꼭 안아 녹였다.
“엄마도 점심 잘 챙겨 먹어. 난 여기서 먹었어.”
건조한 몇 글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한겨울 교실을 덮이는 연탄난로 같았다.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우리를 그려본다. 귤 한쪽, 붕어빵 꼬리, 어묵 국물 한 숟가락, 이런 소소한 것들이 생의 체온을 올린다.
이 작은 나눔들이 모여 얼어붙은 삶의 조각들을 녹여낸다. 그 따뜻한 보상처럼, 우리에게는 일상의 잔잔한 온기들이 다가온다. 손난로의 잔열, 아직 따스한 머그컵의 손잡이, 가로등 아래 포개진 발자국, 찻물이 끓는 숨소리, 막 구워진 빵의 고소한 냄새, 장갑 속 맥박의 떨림이 겨울밤을 연다. 밤새 까놓은 꿀껍질의 상쾌함, 책사이에 아무렇게나 꽂아둔 사진들, 누군가 막 떠난 의자의 온기, 이불속 햇빛 냄새, 겨울비가 내 맘을 두드리는 소리에 창너머를 본다. 저만치에서 날아드는 오렌지빛 불빛 위로 낮은 웃음이 떠오른다.
끝없이 밀려오는 바다의 두드림처럼, 발아래 모여 따스해진다. 일상의 소중함이란 이렇듯 하나의 큰 마음을 만든다. 우리의 체온은 그렇게 이어진다. 서로가 나눈 심온이 나를 밖으로 밀어낸다. 모든 움직임이 그렇듯 처음이 된다. 우리가 먼저 무대에 오른다. 내리다 녹아버릴 잔불의 흩날림 속에서 마주 선 우리가 춤을 춘다.
나와 함께 춤을? Shall we dance?
아니면, 이 겨울을 함께 따뜻하게 만들어볼까? shall we warm this winter toge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