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 속에 깃든 온기, 겨울_ 침묵, 봄의 결

고요한 말 사이, 얼어붙은 강물 위를 건너는 우리

by 화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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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히 부는 바람이 서로의 온도를 얼어붙게 한다. 서리 내린 창밖은 모호한 추상화다. 발자국 하나 없는 눈길의 주인은 사람이 아닌 들짐승이다. 쉬이 떠올리는 겨울의 한 조각은 외롭다 못해 가슴을 저민다. 끝없이 기다린다. 이 차가움의 끝을… 그래서 더욱 감사하다. 누군가의 햇살 같은 눈빛이, 난로 위의 주전자 같은 온기가, 머플러가 안고 있는 배려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다. 얼어붙은 시냇물을 깨어 줄 한마디를 기다린다.

고요한 대화는 겨울의 언어다. 얼어붙어있지만 생명을 품고 있다. 말이 멎을 때, 마음은 비로소 제 온도를 드러낸다. 침묵은 마침표가 아닌 나와 너 사이의 쉼표다.


인간(人間)이라는 말에는 ‘사이’의 뜻이 담겨 있다. 서로 오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동물과 무엇이 다를까. 사이의 강에는 언제나 말이 흐른다. 말은 숨을 불어넣고, 가슴의 온도를 올린다.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다.

너와 내가 ‘우리’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대화는 필연적이다. 말은 관계를 잇는 풀과 같다. 서로의 틈을 좁히고 이를 단단하게 이어준다. 물론 그 바탕에는 공감과 배려가 깔려있어야 한다.


간혹 말은 다의성을 지닌다. 사전적 의미가 아닌 화자의 마음이 반영된 주관적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미묘한 차이를 지닌 표지판을 잘 따라가야 상대의 마음에 닿을 수 있다. 이리저리 뒤집어보며 말맛을 느껴야 한다.

사이를 좁히지 않아도 될 관계라면, 이처럼 겹겹의 말속을 헤매는 일은 얼마나 고단한가. 공식적인 말의 무게는 얼어붙은 강물 같다. 단단한 얼음덩어리 위에 서면 시간은 멈춰있는 듯하다. 그러나 강은 끝없이 바다로 향한다. 그 흐름을 놓치면 끝내 서로에게 닿지 못한다. 그래서 가끔은 무언의 공간으로 나를 집어넣고 싶은 생각이 깨어진 얼음 틈으로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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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있는 말들이 켜켜이 쌓인 관계는 때론 고요한 대화가 가능하다. 시공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서로를 나눌 수 있다. 척하면 착하고 눈빛만으로 통한다. 그러나 이심전심이 가능한 사이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막연히 기다린다고 내가 다가오지 않는다. 오가는 진심 속에 공감의 싹이 튼다. 애정이 물꼬를 트면 우리라는 나무는 쑥쑥 자란다. 침묵은 더 이상 어둠이 아닌 여명을 가지고 오는 별이 된다. 서로의 눈 속에서 빛을 찾는다. 함께 걷는 발자국이 나란히 남은 눈길 위에서 침묵은 서로의 약속이 된다.


우리는 각자의 잣대로 세상을 재단한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을 것만 듣는다. 많아도 탈이고 없어도 틈을 만드는 게 말이다. 여기에 서로의 기준을 가져와 버리면 말은 시한폭탄으로 돌변한다. 누군가에게는 깊은 상처가 된다. 칼자루를 쥐고 있다고 해서 칼끝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두려워 입을 닫아버리면 상처는 깊게 곪아간다. 누군가와 마음을 나눈다는 건 모래성을 쌓아 올리는 것처럼 힘겨운 일이다. 나와 너 사이의 피로감이 쌓이면 말이 필요 없는 대화 상대가 절실해진다. 그들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와 항상 함께 있다. 신발 끈을 조여 매고 문밖으로 나가면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


나에게 기준을 들이밀지 않고 기다려주는 그는 자연이다.

주지 않아도 굽이굽이 흘러 나를 채워준다.

억지로 털어내지 않아도 나는 그득히 담아낸다.

자연이 지닌 너그러움과 그윽함은 세상에서 받은 상처는 보듬어주고 사랑은 부풀려준다. 산등성이를 탈 때 푸른 하늘과 닿는 나는 자유롭다. 모래밭에 흘려놓은 쓰라림은 은빛 거품들이 씻어준다. 수풀 사이로 흐트러지는 나를 산들바람이 안아준다. 사방 천지 가득 피고 지는 풀꽃들이 내게 속삭인다. 자연과 주고받는 말이 필요 없는 대화는 일생에 절정경험을 남기기도 한다. 지리산 고개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숨이 다할 만큼 고통이 차올랐을 때 만난 붉게 타오르던 구름처럼 경이로운 찰나처럼 내게 박힌다. 시간이 멈추고 오롯이 나만 존재했던 순간은 격렬한 대화로 새겨진다. 잔잔한 물결이 일듯 늘 만나는 둘레를 세세히 살피면 조곤조곤 말을 걸어오는 존재가 있다.

말이 아닌 함께 존재하는 공간의 진동으로 교감하는 자연.

자연은 그런 벗이다. 자연은 그런 어머니다. 자연은, 그런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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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필요 없는 관계는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지내온 시간이 이런 관계를 만들어준다.

관계 안에서는 더 이상 말이 가장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오히려 어긋나게 한다.


내 안에서 자연을 찾아보면, 이내 드러난다.

자연스럽게 침묵으로 서로에게 다가가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더 깊이 빠져들어 간다.

우리는 결국 더 단단해진다.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손끝에 스쳐가는 바람.

숨결이 담겨있는 온기.

천천히 맞춰오는 발걸음.

시간의 먼지를 털어내는 손길.

믿음에서 나오는 끄덕임.

그렇게 말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말이 고요히 사라진 순간, 서로는 우리가 된다.

사이는 무릇 하나로 겹치고,

바람이 계절을 따라 흐느껴 노래하듯,

침묵 안에서 움트는 대화는 나무의 눈(芽) 속에서 겨울을 견디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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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눈길 위에 새겨질 우리의 발자국 위로,

하얀 숨결이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 우리의 손을 모은다.

말과 침묵이 포개져 피어오르는 사계의 길, 우리는 나란히 걷는다.

겨울의 숨결이 녹아 흐르는 곳, 그 길 끝에는 언제나 봄이 있다.

겨울의 침묵은 그렇게, 봄의 속삭임을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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