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녹아들 나

2월,흰 - 사물의 시점

by 화몽

나는 참 운이 좋다. 누군가는 평생을 솟아나 바라보지 못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눈을 뜨자마자 스르르 삶의 끈을 놓아버리기도 한다. 하루살이의 하루만큼의 몫이 전부가 되기도 하지만 나는 꽤 오랜 시간을 노닐다 저 멀리 너머로 넘어갈 수 있다. 물론 영원히 남겨지는 것도 어렵지 않지만 오롯이 홀로 해를 맞이하고 별을 헤아리며, 조금씩 굴러간다는 것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니지. 과하지도 덜하지도 아니한 오늘의 나, 난 그런 지금이 참 좋다. 그러니 나는 정녕 좋은 운을 타고난 거다.


나는 항상 같은 곳에 머문다. 돌돌 말리며 여기 저기 구르고 다져진 내가 우뚝 선 이곳에서 오가는 바람을 보고 피어나는 구름을 듣는다. 스치는 달빛은 단단하고 떠오르는 햇빛은 보드랍다. 여기저기를 오고 갈 수 없음에도 난 청춘의 나날을 온전히 보낸다. 다가가지 않아도 내게 스며드는 것들은 너무도 많다. 까르르 웃는 소리에 나도 따라 미소 짓고 쿵쿵거리는 발걸음에 내 심장도 두근거린다.


맑고 하얗던 나의 근본은 완벽히 눈부신 것만은 아니다. 창백한 핏줄을 타고 흐르는 맥박은 살아있다는 감각을 조절한다. 멀리 우주에서 보내는 언어가 내게 닿듯이 한걸음에 내가 다가와 눈을 맞추는 너는 그 두 눈을 깜박이며 말을 건다. 성글게 짜인 두툼한 장갑 위로 늘어져있는 목도리가 너울거린다. 흔들리는 너의 단어들은 주워 담기가 바쁜 나는 네게서 뽀얀 쌀뜨물 내음을 흩어낸다. 자작한 물아래로 장갑 안의 네 손이 조물 거리면 눈길이 뽀드득 거리며 서로로 가라앉는 소리가 날 테지. 떨리는 네 속눈썹 끝에 달린 한 방울, 똑 떨어지는 그다음 한 방울은 더 이상 포근할 생각이 없다. 내게 녹아드는 방울들은 오늘의 밤을 지나 새벽을 거닐어 잊힐 내일을 열어도 살아 숨 쉴 리가 없다. 너는 꿈속에 젖어들고 나는 새 아침에 녹아들 거야.


나는 참 운이 좋다. 스치듯 서리는 너도 그렇고 한두숨 내쉰 차가운 숨결을 따라 별 길을 따르고 나는 그렇게 녹아 응어리질 거야. 지금 마주한 네게 다가가 기대어 잠들게 되기를 바라는 나는 참 보잘것없다. 후하고 불면 푸른 하늘의 우윳빛 반짝임으로 흩어질 테지만 그렇게 너에게 다가갈 수 있는 나는 고단할리가 없어. 네가 남긴 소소한 하루가 남겨준 진솔함이 동그랗게 굴려진 내 삶의 의미를 찾아준다.


‘나는 나’

‘나는 너의 마음에서 왔지.‘

’ 나는 지워져 가는 나를 지우기 위해 여기에 왔고.‘

’ 나는 무엇을 알기를 원하고…‘

’ 나는…‘


너는 나를 마주하고 맞춤표를 줄여가며 너를 향한다.


’ 너는… 너야.‘


너는 네 발자국을 찾아. 마침내 스스로 읊조리는 수많은 물음표들의 끝을 향해가.

네게 녹아들 나는 너를 잡고 마침표를 수없지 던져내고 네 안으로 굴러들어갈 푸른 파도가 된다. 그 끝이 눈부시게 하얀 파란 너울들은 우리를 일어나 발을 띄게 해. 이렇게 함께 걸을 수 있다니. 충분히 소소하다. 작은 것들을 주워낸 나는 온전히 살아냈어. 네가 뱉어낸 수많은 빛들 중에 내게 박힌 조각, 그 하나만으로도 모자람이 없다.


세상의 맛. 말의 맛. 하늘의 맛. 표정의 맛. 손길의 맛. 눈빛의 맛. 숨결의 맛. 시절의 맛. 이 맛과 저러한 맛들을 조물거리는 너의 두툼한 장갑밑에 숨겨진 손가락들이 만들어낼 그 맛을 나는 상상해 본다. 그런 것들이 내는 향을 따라가다 보면 일상은 잔잔한 파도가 되어 밀려오고 오늘이 켜켜이 쌓여 봉긋한 가슴이 된다. 뿜어져 나오는 물길사이로 붉은 지느러미를 흔들거리는 내가 있다. 고단함에 눈꺼풀이 잠시 파르르 떨다 이내 고요해진다. 붉은 지느러미가 푸른 물길을 내고 숨은 고요해진다. 가지런히 내려앉은 말들이 귓가에 몽글몽글 맺힌다. 종알종알 피어오르는 눈망울은 이월의 청회색 새벽에도 터져 나온다.


네게 한껏 녹아들 나는 너를 기대한 거다. 인내와 연민으로 그려갈 우리 인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