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흐름의 연결
정적의 황궁
카일리스가 대륙을 떠난 지 보름째 되는 날, 황궁은 분명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설명하지 못할 정적에 잠겨 있기도 했다. 아무도 미묘한 흐름의 떨림을 느끼지 못했기에 변함을 느끼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카일리스의 부재가 남긴 공백의 무게였다. 누락된 무엇인가가 전체 구조를 미세하게 당기고 있다는 느낌이었고 기둥과 아치 사이의 공기의 흐름도 전과 달리 고여서 멈춘 느낌이었다. 카일리스는 황궁에서 질서, 체계, 정무부터 알게 모르게 오고 가며 정리하던 실무적인 일뿐 아니라 사람들의 감정, 관계의 중립, 전체적인 사고의 영역에도 굉장히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런 카일리스가 황궁을 떠나자 그가 하던 일을 여러 명이 나눠서 맡아도 그의 빈자리는 쉽사리 채울 수 없었다. 그렇게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는 미세하게 균열을 일으켰다. 황궁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지는 않았으나 갈등과 분쟁의 기틀이 생겨났다. 모두를 납득시키는 최고의 선택만을 하는 사람이 없어지자 이 갈등과 분쟁 그리고 선택을 맡을 사람은 자연스레 여사제의 몫이 되었다.
황궁에서 오랜만에 여사제를 찾는다는 문서가 전달했다. 과거, 카일리스가 입궁 전부터 황궁에 확고히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항상 직접적인 대면으로 찾으러 왔고 반강제적인 부름으로 불렀으나 지금은 사뭇 달라진 요청이었다. 엘리안은 이 문서 하나만으로 카일리스가 황궁을, 대륙을 떠났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카일리스가 황궁에 있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황궁에 있는 한 황궁은 스스로 균형을 잡았을 것이며, 조정의 논쟁은 길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정무의 우선순위는 정갈한 흐름처럼 자연히 결정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감정과 사고의 방향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논란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사제보다는 상담가로서 조용히 일상을 살아가던 엘리안은 오랜만에 도착한 황궁의 문서를 뜯었다.
'카일리스... 그대가 황궁을 먼저 떠나게 되었군요.'
찾아와 달라는 부름만이 적힌, 별다른 내용이 없는 문서를 읽으며 엘리안은 한숨과도, 미소와도 닮지 않은 숨을 내쉬었다. 중요한 내용이 담겼을지라도 그녀에겐 내용이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황궁에서의 방향성을 어떻게 잡을지가 더 중요했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황궁이 여사제를 부른다는 것은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엘리안은 의도치 않게 잠시 문서를 집어 들고 있었다. 얇은 종이였지만, 손끝에 닿는 감각은 이상하리만치 무거웠다. 그 무게가 종이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황궁이 그녀에게 떠넘기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결핍 때문이라는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후 황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엘리안은 황궁에서의 시간이 여사제로서의 삶이 떠올랐다. 짜여진 판에서 짜여진 말만 하는 공허함부터 모든 걸 짊어지고 답해야 하던 어린 소녀의 모습. 카일리스라는 어린 소년이 등장한 이후 변해가던 황궁의 모습. 카일리스가 자리매김을 하고 난 후의 황궁의 모습등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은 카일리스가 떠난 후의 황궁의 모습을 맞이하러 가고 있다.
'지금 여사제를 부른다는 것은 단순한 갈등 문제가 아니라는 거야. 황궁은 지금 결정하는 능력을 잃어버렸을 거야. 루카르가 있는 한 결정은 정보의 부족으로도, 힘의 균형으로도 막히지 않아. 다만, 지금은 나의 도움 없이 자연스레 답을 하나의 방향으로 모으고 책임까지 감수하던 카일리스가 없을 뿐이지. 그러니 결정의 책임을 질 희생양이 필요할 거야.'
엘리안은 황궁의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카일리스의 공백에서 파생된 정적을 전신으로 느꼈다. 오랜만에 황궁을 거닐며 보이는 구조들은 전보다 더 잘 정리가 되어있고, 정돈되어 있고, 훌륭했다. 거기에 각자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사람들의 침착함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견고한 황궁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풍경, 모습이 겉모습만 화려한, 어딘가 비어있는 장식품처럼 보였다. 황궁의 전체적인 움직임은 있으나 흐름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 모습, 그 느낌은 마치 폭풍전야처럼 고요했다. 이는 황궁의 반복되는, 안정된 일상이 현재 정체됨을 의미했다.
'이곳의 시간은 그대가 떠난 후 멈춘 거나 다름없군요.'
엘리안이 회랑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길수록 마주치는 사람들은 침잠되어 있었다. 그들의 모습엔 존중도 있었고 외면도 있었다. 이는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음의 침묵과도 같았다. 자리에 도착해 앉자 달라진 게 없는 루카르의 존재가 그들의 침묵을 대변했다. 회의의 안건은 역시나 그답게 정답이 정해져 있는 갈림길에서의 선택이었다.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신이 정해놓은, 정해진 문제에서, 정해진 답을 듣기 위한 것이었다. 안건을 들은 엘리안은 이제 선택해야만 했다. 선택의 순간이 되었음에도 누구도 쉽사리 채우지 못하는 카일리스의 빈자리를 자신이 채울 것인지, 신의 계시는 아니나 루카르의 뜻에 따라 신의 대변인으로써 말을 할 것인지 등 무엇 하나 만족스러운 선택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상담을 할 때처럼, 마치 카일리스의 물음처럼 루카르에게 먼저 되묻게 되었다.
"먼저 황궁에서 오랜만에 찾아주심에 대해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안건의 답을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루카르 대신관께서 물음에 답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여사제님의 물음이라니, 오히려 영광입니다. 물음에 답을 드리도록 하죠."
"사람이 일궈놓은 노력과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과 자리가 없어지자 다른 사람들의 노력으로는 그 자리를 채우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신의 힘을 빌리려 했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신의 공백을 메우던 사람이 사라지자, 그 사람의 공백을 신이 메우는 상황이 되었어요. 혹시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엘리안은 단둘이 있는 자리도 아닌 모두가 모여있는 회랑에서 루카르에게 회의의 안건이 아닌 더 중요한 것을,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아무도 루카르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이 장소에서, 따르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나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리고 루카르는 신의 대리인인, 신의 계시를 받은 여사제의 이 말을 부정할 수도, 고집을 부릴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물음 자체가 그의 계산 밖의 물음이었다. 루카르는 결국 정해진 답을 듣기 위한 자리가 아닌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한 자리를 만들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녀는 혼자 들었던, 묵인하고 있던'나라를 세운 자의 후손이 나라를 바로잡지 않으면 곧 위기가 닥쳐올 것이다.'라는 계시를 들었을 때부터 짊어진 무게가 가볍지도 않고 사라진 적도 없었다. 그리고 계시가 내려진 뒤로 황궁의 흐름이 멈췄기에, 계시를 전달하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계시의 대상이 정말 카일리스였다면. 이 흐름을 다시 올바르게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 또한 카일리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황궁의 부름을 받고 뒤늦게 파악한 그의 소식을 미루어보아. 그가 다시 황궁에 돌아올 수 있음에 뜻을 걸었다.
절제 키워드 - 조화, 절제, 중용
그 누구도 카일리스가 만들어 놓은 길을, 흐름을 채울 수는 없었다.
그리고 엘리안도 카일리스가 만들어 놓은 길을 채우지는 못한다.
그러나 멈춰있는, 카일리스가 만든 길의 방향성을 이어가기로 했다.
자신이 짊어진 무게가, 희생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수 있을지언정
다시 상담가로서의 엘리안이 아닌 이름 없는 여사제가 되기로 한 것이다.
멈춰 있는 황궁의 흐름이 위기를 맞이해 무너져 내리기 전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