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춰진 족쇄
그의 하루가 시작되는 자리
아침 햇볕이 넓은 창을 통해 거실 바닥에 부드럽게 번진다. 집 전체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고 부인이 식탁 위에 아침식사가 가지런히 놓고 있다. 따뜻한 수프의 향이 집안 곳곳으로 퍼져갔고 화덕에서 데워낸 빵은 천 위에 포근히 놓여 있다. 얇게 썬 치즈와 과일이 나란히 놓여 있는 정돈된 아침상이었다. 계단에서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이 집의 딸 카르세르가 묶은 머리를 매만지며 내려온다.
“안녕 엄마, 오늘 수프 냄새 좋다.”
자리로 앉으며 자연스럽게 빵을 작은 접시에 옮겼다. 익숙한 순서로 수프 먼저, 그다음 빵을 먹는다. 뒤이어 이 집의 아들 카르부스가 느린 걸음으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왔다. 눈은 아직 반쯤 감겨 있었지만, 자연스레 정해진 자리로 걸어가 앉는다. 부인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아들에게 수프를 떠서 건네준다.
“조금 일찍 일어났으니까 천천히 먹어도 돼.”
카르부스는 반쯤 졸린 목소리로 대답하며 수프를 한 숟가락 삼켰다. 잠에서 깰 만큼 수프가 맛있었으나 목을 넘어가자 다시 존다. 그럼에도 입에는 미소가 머물고 있었다. 식탁은 시끄럽지 않았고, 대화는 많지 않았지만 평온하고 따뜻했다. 이 집의 아침은 이렇게, 늘 비슷한 흐름으로 시작되었다. 누구도 그 흐름을 흔들지 않았다. 잠시 뒤, 거실 쪽에서 규칙적인 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아침 운동을 마치고 온 이 집의 아빠였다. 그는 자리에 앉아 부인이 따뜻하게 데워 둔 빵을 조심스레 집었다. 빵의 모양은 모두 비슷했으나 카르세르가 아빠에게 자신이 고른 빵을 건넸다.
“아빠, 오늘은 제가 고른 거 먼저 드세요. 아빠 거 골라놨어요.”
그는 시선을 옮겨 딸을 바라보았다. 표정의 변화는 크지 않았지만, 말투는 부드러웠다.
“고맙구나. 네가 고른 것이라면 괜찮겠지.”
그는 빵을 조금 잘라 수프에 적셨다. 바쁜 일상 속 빠른 식사를 위해 어릴 적부터 들인 습관이었다. 아빠를 발견한 후 반쯤 비몽사몽하고, 반쯤 잠에서 깬 카르부스가 먹던 수프를 삼키고는 고개를 들어 물었다.
“아빠, 오늘은 일찍 오세요?”
그는 잠시 아이 둘을 차례로 바라본 뒤 짧게 대답했다.
“정해진 일정이 빨리 끝난다면 일찍 올 수 있단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카르세르가 잽싸게 말을 이었다.
“그럼 어제 읽던 책, 오늘도 읽어 주세요. 끝까지 듣고 싶었어요.”
그는 수프를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은 뒤 말했다.
“그래. 네가 원하면 읽어주지.”
감정적 과장이 없는, 그러나 충분히 안정적인 그의 짧은 대답에 아이들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일상의 대화를 나눴고 먹을 만큼 먹은 뒤 자신이 남긴 음식을 한쪽으로 모았다. 이는 언제나 그랬듯 작은 정돈으로 아침식사의 마무리와 아침,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그만의 방식이자 절차였다. 그는 절차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가 걸린 쪽으로 걸어갔다. 아이들은 그가 움직이자마자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자연스럽게 각자의 준비를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지시한 것처럼, 이 집은 매일 같은 순서로 흘러간다. 그는 준비를 마치고 잠시 문 앞에 서서 숨을 고르고 정확한 시간에 맞춰 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따뜻한 수프의 향과 빵의 남은 온도, 집의 따뜻함은 뒤로 서서히 물러났다. 그의 하루가 시작되는 차가운 공기가 고요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그 뒤 집안에서는 차례로, 현관에서 부인은 카르세르의 머리 리본을 다시 묶어주고, 카르부스는 신발을 끌어당기며 투덜거렸다. "오늘도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는 집 안의 흐름을 다음 단계로 넘기는 신호가 되었다. 아무 문제도 없는, 누구에게 들려줘도 부러움을 살 법한 계산된 아침 풍경, 너무나 루카르다운 아침이었다.
황궁에 닿는 그의 리듬
햇볕을 감싸듯 받은 황궁 입구의 돌바닥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문지기들은 루카르를 보자마자 따로 신호를 주지도 않았는데 문을 여는 순서와 타이밍이 자연스럽게 맞춰졌다. 아침 공기처럼 단단하고 조용한 그의 걸음은 황궁의 긴 복도를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그는 매일 지나던 길을 그대로 걸었을 뿐인데, 그의 이동은 이미 여러 사람의 동선을, 행동을 바꾸고 있었다. 서기관들은 그가 지나기 전에 서류 묶음을 정리해 그의 책상 위에 올려둘 준비를 마쳤고, 관리들은 그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자신들이 다뤄야 할 보고의 우선순위를 다시 정리했다. 어떤 이들은 그를 보며 고개를 숙였고, 어떤 이들은 숨을 고르며 자세를 바로 했다. 누구도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루카르가 왔다는 것만으로 황궁의 흐름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루카르는 늘 그렇듯 필요한 것만 보고, 필요한 말만 했다. 그는 보고를 받던 도중 서류에서 문제를 발견했는지 일정을 검토한 후 곧장 문제가 생긴 서류실 쪽으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이 사라지자 보고를 올릴 서류를 나르던 서기관들의 조심스러운 대화가 시작되었다.
“역시 대신관님은 참 대단하셔.”
“그러게 말이야. 문제가 생긴 걸 그냥 넘어가시는 일이 없어. 무조건 찾아내신다니까. 심지어 확인하고 오라고 시켜도 될 일을 직접 나서서 문제를 확인하러 가시는 모습은 정말 못 따라간다니까."
"참.. 황궁 안에 거처를 두셔도 되는 분이 일부러 밖에서 출퇴근까지 하신다니, 말 다 했잖아. 황궁에 거처를 둘 수 없는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기 위한 거겠지.”
“그뿐인가. 소문으로는 집에서는 아주 따뜻하시다더군. 일할 때는 무섭게 정확하신데, 가정에서는 아이들한테 그렇게 다정하시다잖아. 화목하기로 유명하다던데?”
“귀족 가문도 아니고, 뒷받침해 줄 배경도 없으셨는데, 착실한 노력으로 여기까지 오르신 거니까. 본받을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
“맞아. 대신관님 같은 분이 있으니 황궁의 분위기도 이렇게 잡히는 거지.”
그들의 대화는 점점 멀어지는 발걸음에 묻혀 복도 어딘가로 잦아들었다. 누구도 크게 떠들진 않았지만, 황궁은 루카르의 공기로 채워져 있었다.
하루가 닫히는 자리
루카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 안은 이미 하루를 정리하는 저녁의 냄새로 채워져 있었다. 은은한 수프의 향과 조용한 등불의 빛이 아침과 거의 같은 정돈된 구조를 이루었다. 그는 외투를 벗어 제자리에 걸고 문간에 잠시 선 채 집 안의 흐름을 읽었다. 아이들의 방에서 들려오는 작은 웃음소리, 부인이 정리하는 그릇이 서로 부딪히는 일정한 간격, 바닥에 아직 남아 있는 희미한 온기들, 하루의 마무리를 위해 집 안의 요소들이 어디에 놓여 있어야 하는지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집은 그의 통제 아래 있진 않았지만, 그가 세운 질서가 스스로 굴러가는 작은 구조물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카르부스가 먼저 방에서 고개를 내밀었다가 아버지를 보자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책을 읽어달라는 말을 굳이 할 필요도 없었다. 카르세르가 조심스럽지만 기쁜 마음으로 책을 내밀며 “어제 이어서요.”라고 한마디 던지자 루카르의 발걸음은 이미 아이들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등불을 조금 낮은 밝기로 조절한 뒤 늘 앉던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들은 침대 위에서 각자의 자세를 잡고 앉았다. 카르세르는 다리를 모아 담요를 덮고, 카르부스는 졸음과 기대감이 섞인 얼굴로 고개를 올렸다. 그가 책을 펼치자 마지막으로 읽었던 페이지의 얇게 눌린 자국이 거의 흐트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그는 기억을 되짚지 않았다. 책의 위치와 순서가 이미 그의 손끝에 기억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는 이 집에서 가장 부드럽게 들리는 음악 중 하나였다. 너무 감정을 담지 않은 목소리, 그러나 너무 건조하지도 않은 톤으로 그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호흡이 그의 읽는 속도와 맞아떨어지는 순간을 그는 매번 정확히 인식했다. 카르부스가 졸기 시작하는 지점, 카르세르가 다음 내용을 기다리며 살짝 숨을 고르는 지점, 그 모든 리듬은 매일 다르면서도 일정한 패턴을 만들어냈다. 그는 그 패턴을 건드리지 않았다. 잠시 쉬어야 할 때 멈추고, 이어야 할 때 이어갔다. 아이들이 잠들기를 바라는 것도, 오래 듣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 집의 하루가 닫히는 방식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카르세르가 이불 속으로 천천히 몸을 말아 넣고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을 때, 루카르는 소리를 크게 내지 않고 책을 덮었다. 카르부스는 이미 누운 채로 잠꼬대하듯 “내일도 이어서 읽어주세요.”라고 조용히 말했고, 그는 고개를 아주 작은 각도로 끄덕였다. 방을 나오는 순간, 그는 등불이 일정한 밝기로 유지되는지, 창문 틈새가 너무 차갑지는 않은지, 아이 둘의 숨소리가 규칙적인지를 확인했다. 부드러운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의 움직임은 누구보다 섬세했다. 부인이 거실에서 정리를 마치고 돌아섰을 때, 루카르는 그녀에게 오늘 하루의 피로가 남아 있는지를 말로 묻지 않고 동선으로 읽었다. 그녀의 손동작이 평소보다 조금 느리면 그는 대신 조용히 촛대나 책을 제자리에 옮기곤 했다. 이 집의 저녁은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주도하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자리가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그는 마지막으로 등불의 심지를 너무 밝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게 조금 다듬었다. 이것이 이 집이 하루를 닫는 방식이었고, 그는 그 구조의 중심에서 조용히 흐름을 조율했다. 그는 누구보다 이 집의, 이 가정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흐트러짐 없이 반복되는 행동의 누적을 통해 표현되는 종류의 사랑이었다.
집의 지하, 루카르의 첫사랑
집이 완전히 잠잠해진 뒤, 루카르는 마지막 등불을 점검하고 문가의 기척이 남아있지않은 것을 확인했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었다. 거실의 의자 각도, 아이들 방에서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숨소리. 그는 그 질서를 천천히 뒤로 한채 거실의 한 켠, 겉으로 보기엔 장식처럼 보이는 나무조각을 조작해 밀어내렸다. 장식은 부드럽게 움직여 제자리를 찾은 듯 했다. 오로지 그만이 아는 방식으로 윤활된 구조였다.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의문에 공간, 지하로 내려가는 좁고 깊은 계단이 등장했다. 그가 발걸음 하나를 내디딜 때마다 위층의 질서와는 다른, 조금 더 고요하고, 조금 더 개인적인 공기에 도달했다. 비밀스러운 지하공간은 누군가를 맞이하는 공간이 아닌 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공간이었고 집과 완전히 다른 온도를 갖고 있었다. 그가 정해진 위치에 도달한 후 불을 켜자 작은 등불의 빛이 벽면을 따라 조용히 번졌다. 그곳엔 수천장의 종이들이 다양한 위치에 특이한 규칙으로 나무판위에 붙어 있었다. 습기가 닿지 않도록 천으로 감싼 나무판 위의 종이에는 온통 세르바부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의 말, 그의 걸음, 그가 황궁에서 보였던 아주 작은 행동들, 타인이라면 기억조차 못 할 순간들이 이 공간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가 걸음을 옮기며 스쳐 지나가듯 보이는 기록들엔 오래전 과거, 헌 책방의 기록도 있었다. 그리고 하나의 문구가 띄었다. '첫사랑'. 그는 서랍을 열어 새로운 종이를 꺼냈다. 오늘 황궁에서 본 세르바부스의 표정 변화, 목소리의 음감, 회의 중 잠깐 침묵했다가 말문을 여는 리듬, 그와 관련된 수많은 내용의 핵심적인 부분까지, 그 모든 요소가 정확한 순서로 적히기 시작했다. 루카르의 첫사랑은 세르바부스였으며 그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었다. 처음엔 홀로 불타는 사랑을 했으며, 지금은 세르바부스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방식으로 불씨를 유지하는 사랑을 했다. 자신의 계획대로 세르바부스를 이끄는 방향성이 현재의 사랑이며 사랑의 구조였다. 세르바부스를 이루는 모든 요소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록하는 것은 그 계획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을 계산으로 맞추려는 그의 병적인 집착이였으며 첫사랑에 대한 집착이었다. 루카르는 세르바부스가 걸음을 멈추는 지점, 대답을 하기 전 아주 짧게 눈을 가늘게 뜨는 버릇, 누군가에게 질문을 하기 전 손가락을 책상 위에 한 번 가만히 얹는 습관 등 모든 패턴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패턴을 마음속이 아닌 실체로 만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그의 사랑을 가장 정확하게 보존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루카르의 계획은 완전무결한 황제 세르바부스를 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이번에도, 늘 그랬듯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기록을 정리한 뒤 벽의 비어있는 부분을 바라보았다. 세르바부스의 변화, 아직 오지 않은 순간을 위한 공간이었다. 루카르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듯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곳에서의 그는 가족의 가장도, 황궁의 대신관도 아니었다. 오직 한 사람을 향한, 흐트러지지 않는 마음의 구조만이 남은 존재였다. 그는 마지막 등불을 끄고 기록들을 확인한 뒤, 집으로 다시 올라갔다. 거실의 한 켠 장식장을 지나오며 그는 다시 가장의 얼굴을 가져왔다. 지하에서 있던 도파민에 빠진듯한, 미친듯한 그의 표정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지하의 공기만큼은 그의 시선 깊숙한 곳에 미세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악마 키워드 - 직찹, 욕망, 쾌락
루카르의 사랑은 광기이며 집착이었다.
세르바부스를 위협할만한 사람이라면 죽음이든, 추방이든
언제나 루카르의 계략으로 황궁, 대륙, 세상에서 사라져갔다.
사랑하는 당사자에겐 순수한, 순결한 사랑이었을지라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느냐에 따라 의미는 달라진다.
그리고 그 사랑을 다른이가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사랑은 해서는 안될 사랑, 혹은 사랑이 아닌 집착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