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6 타워

질문이 돌아온 밤

by 오필

불면증

지루할 정도로 규칙적인 나날, 특별할 것 없는 밤이었다. 등불을 모두 끄고 몸을 누운 지 이미 한참이 지났는데, 눈꺼풀은 내려앉을 듯 말 듯 감기지 않았고, 일정한 리듬은 숨은 오래가지 못했다. 피곤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머릿속에서는 오늘 결제한 문서들의 숫자와 문장들이 희미하게 스쳐 갔다가 불현듯 다른 생각들로 이어지고 흩어지기를 불규칙적으로 반복했다. 평소 같으면 잠이 들 시간, 이 정도면 잠들 만도 했다. 그러나 찾아오지 않는 무의 상태의 편안함은 오지 않았고 잠을 청하지 못하는 시간이 지속됨에 따라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 답답함은 이내 조용히 잠을 재촉하던 어둠을 조금씩 물러나게 할 정도의 낯선 온기로 바뀌었다. 어둠 속에 찾아온 온기는 마치 나의 몸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이것이 그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생긴 병인지, 의관이 건강을 챙기라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어둠이 깊어짐에 따라 점점 더 선명해지는 감각은 어디서 불어왔는지 모를 선선한 바람과 함께 과거의 향수에 도달했다. 기억 속의 향수에는 기름 먹인 목재의 냄새, 오래된 서류와 잉크의 냄새, 정제된 향의 옅은 잔향이 담겨있다.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들이켜 잔향을 느끼기를 반복하자 어릴 적의 기억, 아스테라. 자유와 그녀의 희생. 그 안에서 어리광 아닌 어리광, 엄마를 의지하며 평안함을 느끼던 내가 떠올랐다. 왜 잊고 지내야 했는지, 왜 잊었는지 모를 어머니의 모습을 형상이 없을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그리며 아무런 의식 없이 눈물만 흘렀다.


세르바부스에 다가왔는지, 나타났는지 모를 불면증이 찾아왔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불면이 매일 찾아오지는 않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더 성가시고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며칠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며칠은 불면이 처음 다가온 날과 비슷한 상태로 새벽을 맞았다. 하루 건너 하루일 때도, 보름 건너 보름일 때도, 하루 건너 보름일 때도 있듯이 규칙적이지 않았고, 예측할 수도 없었다. 마치 잊은 줄 알았던 무언가가 기억나는 날에만 문을 두드리는 것처럼. 그런 밤의 연속, 상황이 지속되자 세르바부스는 잠을 청하지 않는 낮에도 설명하기 어려운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다. 정무는 여전히 정확했고, 결정은 이전과 다르지 않게 내려졌다. 그러나 판단과 판단 사이의 간격이 아주 미세하게 늘어졌다. 문서를 읽다 말고, 이 문장이 왜 이런 어조로 쓰였는지를 한 번 더 보게 되었고, 형식적으로 넘기던 보고의 말미에서 시선이 뜻하지 않게 멈추는 일이 잦아졌다. 이는 그가 만든 권력을 위한 자유, 권력에 의한 자유, 권력 속의 자유에 반하는 행동이었다. 특히 어느 날엔 오래 쓰이지 않던 회랑을 지나던 중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한때 기록과 설계가 함께 다뤄지던 공간이었으나 정무의 흐름, 황궁의 흐름에 맞춰 자연스럽게 발길이 끊긴 장소였다. 왜 그 공간이 눈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여기에 무엇이 있었지?'를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분명 중요한 것이 있었지만 놓치고 있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이름은 잊었지만, 역할은 아직 몸에 남아 있는 것처럼 선명하지 않은 기억 속에 의미와 다짐이 느껴졌다. 그는 길지 않은 시간을 그곳 서서 머물렀으나 평소의 그와 비교하면 굉장히 긴 시간을 할애했다. 생각을 마치고 느낌을 뒤로 한채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기자 서서히, 그리고 갑자기. 오로지 자신을 위한, 사색할 수 있는 공간, 침실 한편에 만들어 두었던 간이 서재가 떠올랐다.

'나는 왜 여기 서있는가, 내가 서려던 자유는 이곳인가. 내가 닫아두었던 그 공간을 내가 다시 열어야 한다.'


그는 스스로에게 과거의 물었어야 할 물음은 이제서야 묻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했다. 황제로서의 권력을 품고 있던 눈빛 위로, 어릴 적 책방의 먼지 속에서 자유를 꿈꾸던 소년의 시선이 겹쳐졌다. 두 시선은 서로를 부정하지도, 밀어내지도 않은 채 잠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지금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을 다시 호출한 것처럼. 아니면, 과거의 자신이 지금의 자리를 조용히 시험하는 것처럼. 세르바부스는 그 교차를 아직 변화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되돌아온 질문이라고만 여겼다. 황제로서의 권력을 품고 있던 눈빛이 묘하게 어린 시절 자유를 꿈꾸던 책방 소년일 때의 눈빛과 교차되듯, 합쳐지듯 보였다.


세르바부스의 변화와 루카르의 관측

세르바부스가 스스로 자신의 변화를 명확히 인지하기 전부터 루카르는 이미 그의 변화를 알고 있었다. 변화에 불면증 같은 특정 상징이나 언어를 부여하지는 않았으나 결제 시간의 미세한 지연, 문장 끝에서 생기는 짧은 정적, 보고를 받던 중 한 번 더 머무는 시선만으로도 그의 리듬이 달라졌다는 것을 정확히 감지했다. 대부분이 알아차리지 못할 변화임에도 가장 먼저 미세한 흔들림을 발견한 것이다. 이런 변화가 전에도 몇 번 있었으나 권력을 위한, 권력에 의한, 권력 속의 자유가 완성된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과거에 변화가 있었을 때와 유사한 방법으로 원인을 추측하고 어떻게 다시 권력의 황제, 포르투나 엘렉티오의 일인자로 군림하게 만들지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세르바부스가 먼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거나, 선택이 옳았는지 묻거나, 왜 이 자리에 서 있는지를 묻기 전에 어떻게 하면 지금의 감각을, 변화를 과도한 피로와 책임의 무게로 치환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루카르에게 이 상황은 위기가 아닌 자연스러운 상황이자 관리해야 할 변수였고 정리해야 할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가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번 흔들림은 이전과 달리 세르바부스가 누군가에게 일절 묻지 않고 스스로에게만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 물음은 누군가에 의해 닫힐 수 있는 질문이 아닌, 스스로 답을 찾기 전까지 닫히지 않을 질문이었다.


전과는 다른 변화를 깨닫는 데에는 루카르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세르바부스는 불면증이 찾아온 날이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불면증에 대해서 겉으로는 아무 말도,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전과 같은 자리에서, 이전과 같은 결정을 내리면서, 결정 사이의 침묵만을 평소와 다르게 짧거나 길게 가져갈 뿐이었다. 루카르는 그 침묵을 처음에는 정무의 과중함이라 해석했다. 황제가 감당해야 할 무게가 일시적으로 감각에 영향을 주는 경우는 흔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하던 방식으로 접근했다. 어느 날 저녁, 루카르는 평소와는 다른 조금 늦은 시간에 세르바부스를 개인적으로 찾았다.

“폐하, 요즘 대륙의 밤이 길어졌습니다.”

관측을 질문처럼 포장한 말투와 문장이었다. 세르바부스는 루카르를 응시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런가."

“이 시기엔 늘 그렇습니다. 제국이 안정될수록, 황제의 부담은 눈에 보이지 않는 쪽으로 옮겨갑니다.”

루카르는 말을 멈추고 잠시 반응을 기다렸다. 늘 그랬듯, 세르바부스는 바로 의사표현을 하지 않았다. 그 짧은 정적 속에서 루카르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폐하께서 느끼시는 피로는 흔들림이 아니라, 제국이 폐하께 온전히 의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말은 안심을 주기 위한 말이었고, 동시에 질문의 방향을 바꾸는 말이었다. 루카르의 말이 끝나감에 따라 세르바부스는 잠시 창 너머,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느끼는 이 감각이 대륙의 무게일 뿐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느끼시는 모든 감각은 이 자리가 요구하는 필연입니다.”

계산에 의한 루카루의 말은 언제나 통했었다. 그러나 평소와 다른 세르바부스는 계산 밖의 행동을 했다. 웃음을 지은 지 오래된 그가 미소를 살짝 머금으며 물었다.

"나는 왜 여기 서있는가?"

루카르는 그 미세한 반응을 놓치지 않았고 이상함을 감지했다. 당황한 그는 흔들림이 없는 척을 했으나 평소와 다르게 말이 길어졌다.

“지금의 대륙은 폐하의 방향 아래 안정적으로 서 있습니다. 굳이, 그 자리에 서 있는 이유를 다시 확인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나친 자문은 지도자를 내부로 붕괴시킵니다. 폐하께서 흔들리시면, 그 흔들림은 곧 질서 전체로 번집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숨을 한 번 고른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폐하께서 힘드신 것은 폐하의 잘못이 아니라, 이 자리가 요구하는 무게 때문입니다. 그 감각은 폐하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이미 증명하셨습니다. 더 증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루카르는 말을 하는 와중에 생각을 정리했다. 세르바부스가 스스로 그 질문을 사소한 것으로 여기도록 환경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회의의 간격을 조정하고, 보고의 밀도를 낮추고, 결정의 책임을 황제 개인이 아닌 체제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분산시키려 했다. 그는 그 정도면 충분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했다. 그 질문이 이미 세르바부스의 안쪽에서 하나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것을 놓쳤다. 루카르는 스스로 생각을 정리한 채 한발 물러서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아직, 강하게 붙잡을 때가 아니다. 질문을 억누르면 오히려 질문은 더 선명해진다.'

"폐하, 이 자리는 늘 그랬습니다. 개인의 감각이 아니라, 구조가 요구하는 역할이 앞서는 자리입니다."

루카르의 모습을 보며 세르바부스는 확신했다.

'진실과 멀어진 정의는 올바른 길이 아닌 자신의 길을 걷는다. 진실만을 쫓던 루카르가 정의에 의한 진실을 쫓으며 균형을 이루었다면, 그 균형 속에서만 완성될 수 있는 황제라면, 나는 이제 그를 놓아줄 때가 되었다.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선 그를 놓아야 할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루카르."

낮고 중엄하게, 가장 중요한 안건을 뱉는 듯한 황제의 음성이 루카르의 이름만을 부르고 공백이 만들었다. 그러자 둘의 시간의 흐름이 붕괴됐다. 1초가, 0.1초가 10초가 된 것인지 100초가 된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루카르의 심장박동의 요동침은 멀리 있는 사람의 귀에 전달될 것만 감각이 되었다. 세르바부스의 심장박동도 똑같이 요동치기는 했으나 평안한 희열과도 같았다. 누가 입을 열기에도, 열지 않기에도 적합하지 않은 짧은 적막 속의 긴 시간이 흐름이 흘러가자 루카르는 입을 열지 않은 채 자신의 이로 입안의 살갗을 찢어지지 않을 선에서 강하게 깨물었다. 그는 마음과 다르게 이성이 마비되는 감각으로 끝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입 안쪽의 살갗에 스며드는 감각만이 그를 지금 이 자리에 붙들어 매고 있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세르바부스는 그 침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루카르를 바라보며, 그를 느끼며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순간, 어떤 설명도 자신이 던진 질문에 닿지 못하리라는 것을 말이다. 세르바부스가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 시선을 루카르가 정면으로 받아내지 않았음에도 온전히 전달되었다. 세르바부스는 루카르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캐치했다. 황궁에 들어와 자신을 마주할 때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던 루카르였다. 그 흔들림을 본 순간, 세르바부스는 확신의 답을 내렸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정의를 대표하는 자가 아니라, 정의에 매달린 인간이다. 마을의 헌 책방. 그곳에서 꿈을 나누던 소년은, 소년들은 어디로 갔을까?'


세르바부스의 '나는 왜 여기 서 있는가.' 이 질문은 누군가의 언어로 덮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책임으로도, 무게로도, 황제라는 이름으로도 완전히 치환될 수 없었다. 루카르가 이를 이해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현재의 탑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누군가의 손으로, 자신의 손으로 지탱할 수 있는 단계는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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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 키워드 - 붕괴, 통제 상실, 급변

그날의 대화는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충돌도 남기지 않았다.

다만 이후 세르바부스는 자신이 품었던 의구심이 스스로

자신의 문제로 규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루카르는 이 대화가 무언가를 무너뜨릴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자신의 계산으로 다시 원상 복귀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공든 탑의 무너져 내리는 신호는 균열의 시작으로 미리 예견되었다.

그 시작을 가늠하지 못하는 것은 그저 당사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제삼자의 입장에선 이미 붕괴되기 직전의 모습을 모두가 알 수 있어도

당사자의 입장에선 감각이 둔해져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은 허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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