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필 Feb 12. 2024

편견의 오해

자기 합리화와 편견

자기 합리화와 견해

자기 합리화를 하지 않거나 견해가 없는 것은 직감, 감각, 지각, 직관이 없거나 자신의 의견, 주장 등이 아예 없는 상태가 되어서 내적욕구 합리화 자체가 없게 되는 유사한 공통점이 있다. 만약 내적욕구 합리화가 없는 상태로 의미부여만 하는 경우라면 '덥다'혹은 '춥다'라는 자신의 기준이 없는 상태로 '덥다', '춥다'라는 용어적 개념만 있는 상태로 타인이 덥다고 하면 덥고 춥다고 하면 추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맹목적 합리화가 형성된다. 결국 자기 합리화를 하지 않는다는 것, 자신의 견해를 갖지 않는 것은 생각, 사고를 하지 않는 무감각한 상태에 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감각한 상태에서는 습득한 정답형 의미부여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인식할 수 있으나 자신이 어떻게 인지해야 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자기 합리화와 견해가 없다는 것은 존재함에도 존재의 의의를 가질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자기 합리화와 견해의 공통점을 보면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견해는 자기 합리화를 하는 과정 중에 생기는 하위 개념이며 어떤 자기 합리화를 하느냐에 따라 같은 맥락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자기 합리화를 하는 과정 중에 생기는 하위 개념을 견해와 편견으로 구분 지어보면 자기 합리화 자체가 객관적인 의미부여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라서 온전한 과정을 거쳤을 때는 견해가 형성되는 반면 객관적이지 않은 의미부여를 통해 자기 합리화를 하는 과정에서는 편견이 형성된다. 그리고 가 습득하는 의미부여가 객관적일 거라는 보장은 없어서 습득한 의미부여를 일반화하지 않고 객관적인 의미부여인지를 구분하는 논리적 추론을 거쳐야지만 올바른 견해에 도달할 수 있다. 결국 온전한 과정을 거쳤을 때만 자기 합리화와 견해가 같은 맥락이 된다. 

자신만의 주관, 사고, 관념등이 자기 합리화의 하위개념인 만큼 편향된 사고, 고정관념, 선입견등 반의어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것도 자기 합리화에서 파생된 하위개념이기에 내적욕구인 합리화는 모두가 하고 있으나 어떤 합리화가 더 도드라지는지 정도의 차이만 있다고 규정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내적욕구 합리화를 방어기제 합리화로 인식해서 정당화하는 것을 포괄적 합리화에 포함시킨 사회의 의미부여에 가스라이팅 당해서 자신의 견해를 갖지 못하게 되는 상황처럼 자기 합리화에서 견해, 편견등이 파생되는 과정을 생략하고 자기 합리화, 견해, 편견의 경계를 무너트려 생긴 오해 또한 자신의 견해를 갖지 못하게 만들거나 자신의 생각이 견해인지, 편견인지를 헷갈리게 만든다. 

자기 합리화, 견해, 편견의 경계가 무너진 것은 본래의 편견과 현재의 편견의 뜻이 달라지면서 생겨났다. 뜻이 달라지고 경계가 무너지면서 생긴 혼동은 자기 합리화가 부정적인 인식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데 현재의 편견은 견해와 제대로 구분되어 사용되지 않아서 견해에 해당하는 의견을 편견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자기 합리화, 편견, 견해등 모든 사고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문제제기를 하는 꼴이 된다. 이 문제는 정확히 공정, 규범에 해당하는 기본전제가 있어야 성립하는 본래의 편견공정, 규범이 해당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두루 사용되는 현재의 편견을 구분 짓지 않아서 생겨난 오해와 혼동이기에 견해와 편견이 자기 합리화에서 파생된 개념이라는 것을 인지한 후에 본래의 편견과 현재의 포괄적 편견도 구분지어서 생각해야 한다.


본래의 편견

본래의 편견은 공정성과 중립이 정해져 있는 규범이 기본전제가 된다. 그래서 본래의 편견에서는 편견이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공정성이 어긋나기에 문제시하는 것이고 규범이 기본전제가 되지 않고서 한쪽으로 치우쳐진 것은 편견이 아닌 견해 혹은 고집, 아집, 옹고집에 가깝다고 본다. 고로 본래의 편견에서 말하는 '편견이 없다'라는 말은 정해진 공정성과 규범에 대한 중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이거나 공정성과 규칙을 올바르게 지킨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공정과 규범이 기본전제가 되지 않는 상황일 때 견해, 의견, 주장, 선입견 등을 없애고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은 본래의 편견에서는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그리고 사회의 변화에 따라 공정과 규범의 기준이 변하기에 본래의 편견에서 말하는 공정과 규범 또한 절대적이지는 않다. 결국 편견이라는 말은 사회의 변화에 따른 전에 있었던 기준,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새로운 사회의 기준에서의 공정성과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기 위한 용어로도 사용될 수 있다. 본래의 편견이 올바르게 없다면 새로 바뀌는 공정과 규범에 대해서도 중립을 잘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고정관념? 편견?

고정관념 자체를 무조건 문제라고 볼 수는 없지만 고정관념이 있는 사람이 편견이 없어야 하는 일을 맡으면 문제가 발생한다. 고정관념에 해당하는 편견을 형성하는 것이 의미부여 조기교육 단계에서 직관적 합리화를 지배하면 고정관념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잘못된 고정관념이 있는 사람이 고정관념을 개선하지 않고 공정과 규범에 해당하는 일을 맡게 되면 편견은 피해 갈 수가 없다. 다수가 만들어낸 고정관념이 사회의 문화처럼 자리 잡으면 정답형 의미부여인지 고정관념인지 헤아릴 수 없는 상황도 연출되기에 고정관념을 개선하려면 고정관념을 사회의 정답형 의미부여가 아닌 의문형 의미부여로 인지하고 감각적 합리화와 지각적 합리화를 거쳐 의미부여를 재구성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편파? 편견?

본래의 편견과 편파를 헷갈리는 경우도 있는데 본래의 편견편견에 의한 편파편견이 없는 편파를 스포츠 경기에서 생길 수 있는 예시로 보면 몸싸움이 일어났을 때 심판이 몸싸움에 대한 규칙, 규범과는 다르게 개인적인 잣대로 모두에게 전체적으로 후하거나 반대로 스치기만 해도 제재를 하는 것은 본래의 편견에 해당한다. 그리고 몸싸움이 일어났을 때 심판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한쪽 편에 서서 판정을 내리는 경우 그 이유가 인종차별이라면 편견에 의한 편파가 되고 그 이유가 승부조작이라면 편견이 없는 편파가 된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해서 규범에서 어긋나는 판정을 하는 것이 편견에 의한 편파라면 자신이 그렇게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닌 목적성이 있어서 한쪽으로 치우친 판정을 하는 것은 편견이 없는 편파다. 만약 본래의 편견편견에 의한 편파편견이 없는 편파가 헷갈린다고 해서 모두 같은 것으로 보고 구분 짓지 않는다면 스포츠경기에서 편견에 의한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가 생겼을 때 인종차별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하지 않고 관점을 달리해서 편견이 없는 승부조작을 문제로 삼아서 실질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인종차별은 편파뒤에 숨어 해결되지 않는 오류를 범하게 될 수 있기에 편견에 의한 편파판정편견이 없는 편파판정은 다르게 구분되어야 한다. 

편견이 없는 편파를 인종차별과 엮어서 볼 수도 있으나 목적성이 인종차별이었다면 편견에 의한 편파가 되었을 것이다. 편견이라는 단어가 수용되는 것은 인권에 대한 공정성이 어긋 났을 때이고 공정성이 기본전제가 되지 않는 모든 인과관계를 편견이라는 단어로 수용할 수는 없어서 인권에 대한 공정성과 규범이 지켜진 상태의 편견이 없는 편파에서는 인종차별이라는 조건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현재의 포괄적 편견과 그에 따른 오류

현재의 포괄적 편견은 공정과 규범이 기본전제가 되지 않아서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 고정관념, 선입견 등 모든 것을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혼용해서 발생하는 오류는 '나는 견해 너는 편견'이라는 아시타비적 사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상대방에게 무차별 비난, 한쪽으로 치우친 올바른 견해가 개선되었을 때 편견이 없어졌다고 표현등으로 다양하다. 여기서 견해를 비난하기 위해 편견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보면 편견이라는 단어에는 부정적인 인식이 담겨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으며 포괄적 편견에서 말하는 '편견이 없다'라는 말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중립의 의미보다는 '나와 생각이 일치한다'라는 의미로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본래의 편견과 포괄적 편견은 의미자체가 달라졌으며 여기서 생기는 오류와 오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본래의 편견을 포괄적 편견으로 이해하고 주장하는 오류를 바로잡아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오류 1) 매운 것을 편견이라고 말한다.

감각, 직관적 합리화를 통해 붉고 매워 보이는 음식에서 코를 찌를듯한 매운 향을 느껴서 매울 것이라고 의견을 주장했을 때 포괄적 편견의 관점에 따라서는 의견을 견해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편견, 선입견등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편견이라고 생각한다면 매워 보이는 것을 맵다고 의견을 주장한 사람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오류가 발생하는데 맵다는 의견을 주장한 사람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던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를 이용해 편견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 정당성이 생긴다. 여기서 매운 향이 나면 매웠던 경험을 통해 미리 판단을 내린 것을 고정관념과 선입견이라고도 볼 수 있기에 맵다는 의견을 낸 당사자가 그러한 방식으로 가스라이팅을 당하면 자신의 견해를 편견이라고 착각하기가 쉽다. 이렇게 포괄적 편견에서는 편견과 견해가 같은 의미로 사용돼서 오류가 발생하고 견해와 편견을 구분 짓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 오류가 심해질수록 사람마다 맵다고 생각하는 정도가 다른 것을 이해하는 것은 고사하고 모두에게 매운 것이 아닌 자신에게 매운 것을 맵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편견으로 자리 잡게 된다.


오류 2) 짜장면을 먹는 것을 편견이라고 말한다.

짜장면을 먹고 싶어서 먹는 것은 포괄적 편견의 관점에 따라서는 먹고 싶어서 먹는 견해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편견, 고정관념등이 된다. 회사에서 다 같이 점심을 먹을 때 짜장과 짬뽕 중에 하나를 골라도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을 편견이라고 비난할 수 있다. 그리고 이삿날에 짜장면을 먹는 것, 비 오는 날 파전에 막걸리를 먹고 마시는 것도 자신과 의견이 같으면 견해이고 다르면 고정관념이라고 비난, 비판을 할 수 있다. 심지어 그 외의 다양한 문화나 전통에 대해서도 자신이 하지 않으면 문화와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구시대적 유물이라이라거나 편견이라고 비난, 비판을 할 수 있다. 이렇게 공정성과 규범이 기본전제가 되지 않는 포괄적 편견에서는 특정 음식을 먹는다는 것만으로도 언제든지 편견이 되고 심지어 자신이 따르지 않는 문화와 전통마저 편견이 된다.


자기 합리화와 편견

포괄적 편견은 관점에 따라서 견해라고 지칭할 수도 있고 편견이라고 지칭할 수도 있는 등 모든 것이 해당한다. 그래서 본래의 편견과 포괄적 편견을 구분하지 않으면 편견의 무분별한 남용이 견해에 해당하는 개인의 주장과 의사결정권까지 억압하는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러한 억압은 자기 합리화를 부정적으로 여기게 하는 방어기제 합리화의 일반화로 자기 합리화를 하면 안 된다고 여기는 악영향과 같다. 이에 따른 억압의 부작용으로 자신의 견해를 강압적으로 주장하지 않으면 서로의 의견이 다른 것이 아닌 잘못된 것, 틀린 것이라는 인식을 만들어 편협한 사고를 고착화시키며 자기 합리화를 하는 과정에서 생긴 견해를 포괄적 편견과 구분하지 못하는 오류가 발생한다. 이러한 악영향과 부작용을 미루어보면 관점에 따라 편견의 기준을 달리하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은 무조건 비난, 비판할 수 있으니 포괄적 편견이 일반화됨에 따라 자신은 언제나 옳다고 주장해야만 하는 상황과 환경에 노출되는 것이 일상이 된다.

본래의 편견에서는 의미부여를 자기합리화하는 과정에서 견해와 편견이 파생되는데 포괄적 편견에서는 역으로 편견 안에 자기 합리화와 견해등 모든 것이 포함된다. 그래서 포괄적 편견은 자신과 반대의 견해, 상황, 생각, 의견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입장만을 고려하고 때로는 실제의 사실, 진실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믿는 것을 사실과 진실이라고 지나치게 믿고 긍정하는 편협한 사고를 형성하는데 정당성을 부여한다. 

현재 편견이 포괄적 편견으로 대중화되어 사용되는 것의 일부는 남을 비난, 비판하는 용도로 적합하다는 것과 비난과 비판을 하는 자신이 우월하다고 믿는 것의 영향이 있다. 그러나 비난과 비판의 여지가 없는 상황, 공정성의 규범이 기본전제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편견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본래의 편견과 포괄적 편견을 구분 짓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포괄적 편견을 비난과 비판의 용도로 사용하는 사람은 되려 아둔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포괄적 편견이 옳지 않다고 배제하고 없애자는 것은 아니며 없애는 것보단 공정성과 규범이 제외된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에 해당하는 적절한 용어가 견해도 편견도 아닌 다른 적절한 용어로 대중화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기 합리화를 마무리하며

자기 합리화는 자신이 긍정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을 나누는 시작점이기에 자기 합리화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사라진다고 해서 모두가 편협함 없이 관대하고 너그러워지거나 사리분별을 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 합리화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사라지면 사리분별을 잘하거나 못하게 될 수 있는 시작점에 놓이는 반면에 자기 합리화를 부정적인 방어기제 합리화로 인식하고 멀리하면 사리분별을 할 수 없는 편협한 사고가 고착화된다. 그러니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자기 합리화의 시작점에서 스스로 어떤 합리화를 할 것인지가 선택사항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자기 합리화를 통해 정답이 없는 의문형 의미부여에 자신만의 정답이나 기준을 정하면 같은 상황에서도 긍정으로 볼 것인지 부정으로 볼 것인지는 자신의 선택사항이 된다. 그리고 자신의 기준으로 선택해서 정답을 정하는 과정을 긍정적 합리화를 통한 낙관, 부정적 합리화를 통한 비관으로 보면 자신이 긍정으로 보거나 부정으로 보는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긍정적 합리화와 부정적 합리화 중에 어떤 것이 더 좋은지, 낙관, 비관, 낙천, 염세, 현실적 등 어떤 자기 합리화가 더 좋은지는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합리화하는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기에 정답은 없으나 어떤 자기 합리화를 하는지에 따라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수 있다는 것도 변함이 없다. 그래서 의문형 의미부여를 자신의 기준에 맞춰서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사리분별은 잘하고 편협함을 줄이기 위해 모두가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음에도 올바른 혹은 자신이 원하는 자기 합리화를 해야 한다고 소리 내야만 한다. 자기 합리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올바른 자기 합리화를 통해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들어도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사리분별,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하며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해야 한다.


당신은 어떤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는가?

어떤 합리화를 선택하는지에 따라 받아들이는 상황이 변한다면 당신은 어떤 합리화를 선택할 것인가?

이전 06화 자기 합리화의 일반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