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노브라

by Dㅠ

때는 바야흐로 지구온난화로 인해 최고 기온 40도를 찍었던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아니, 그 무덥던 8월의 여름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40도라니, 지구가 아주 아프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대한민국이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있다는 것은 부모님 세대에서 끝났다. 여름과 겨울만 남은 두 계절 국가가 된 지 오래다. 피부마저 녹아버릴 듯한 이 미친 더위는 마치 내가 열 살 무렵 엄마가 수학 못 한다고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렸을 때 만큼이나 아픈 더위였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오전 기온이 무려 20도다. 미쳤다. 눈 비비고 일어나면 온몸이 땀범벅으로 되어 있는 나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깔끔하게 자몽 향 바디워시로 온몸을 닦아내고 팬티와 브래지어를 새로 갈아입는다.

그러다 문득 저번 주 토요일에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가장 친하게 지내던 3명을 오랜만에 만나게 되어 너무나 기뻤던 하루였다. 리아는 3년 전 결혼해서 아이가 셋이나 있는 워킹맘이라고 했고, 루비는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고 했고, 혜진이는 작가 준비로 공모전에 출품할 소설을 집필 중이라고 말했다. 리아는 남편 호박씨 까기 바빴고, 루비는 새로 사귄 남자친구와 호캉스 즐긴 썰을 풀어 세 명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던 와중 혜진이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10월인데도 너무 덥지 않니? 나 오늘 브라자 안 했어." 그 말에 우리 세 명은 동공이 확장된 고양이 눈처럼 매우 커져서 놀랐다. "야 아무리 더워도 그렇지 안 하는 건 좀..." 루비는 굉장히 걱정스럽고 동정의 느낌으로 말했다. "평소에 브래지어 때문에 흉부 압박으로 숨쉬기 힘들고 자국 남는 게 싫어서 저번 주부터 안 하고 다녔는데 이렇게 편한 줄 알았으면 진작 안 하고 다녔을 텐데. 너희들도 노브라 해봐 진짜 편해~" 잠시 세 명은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5초가 지났을까, 리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애들 모유 수유 때문에 집에서는 노브라로 있는데 확실히 편하긴 하더라고, 근데 밖에서는 도저히 불안해서 못하겠더라고. 갑자기 유두가 딱딱해지는 느낌이 들면 사람들이 눈치챘는지 바로 보더라고 그 시선이 민망해" 이어서 루비가 맞장구치면서 "시선도 있고 만약에 그 모습을 보고 발정 난 남자가 겁탈하면 어떻게 하려고... 리아 말처럼 불안해서 못해" 그렇게 서로의 입장 차이만 이야기하고 다른 화젯거리로 넘어갔었던 기억이 났다. 이때 나는 '그래 너하고 싶을대로 해, 너 다 울 때 가장 아름다워'라고 말하며 적당하게 둘러댔고 취기가 오른 우리들은 각자의 사정으로 뿔뿔이 흩어지며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일요일, 중학교 친구 만나러 홍대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려고 걸어가고 있었는데 느낌상 러시아 국적인 것 같은 아름다운 천연 금발을 과시하며 파란 눈동자의 이국적인 여자가 걸어가는 여자 모습을 봤다. 근데 흰 티셔츠를 입었는데 유두가 솟아 있는 모습을 봤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순간 혜진이가 겹쳐지면서 그녀의 유두를 1초 정도 바라봤다가 시선을 회피했다. 이 모습을 보면서 느낀 건 자기가 노브라로 다니고 싶다는데 내가 굳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가려줘야 한다 시선보다는 자기 선택에 대한 자유로움, 당당함을 표현으로 박수 쳐줘야 하지 않을까. 내가 굳이 그녀한테 가서 (물론 나는 러시아어를 못 한다) '저기 유두가 신경 쓰이는데 제가 브래지어 사드릴까요?' 는 매우 과한 관심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그녀의 부모님도 아니고 잔소리할 이유는 전혀 없다. 내가 브래지어를 입을지 안 입을지는 사회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하는 것이다. 노브라는 관심종자가 아니라 자기선택권에 의해 결정한 것이고 사회는 그 결정을 존중해 줘야 한다. 물론 선택에 따른 책임은 당연히 본인에게 있으니 신중하게 선택 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지긋지긋한 월요일이 또 왔다. 오늘도 땀에 흠뻑 젖어 일어났고 오늘도 자몽 향 바디워시로 샤워를 하고 평상시처럼 팬티와 브래지어를 착용 하려고 했으나 순간, 혜진이의 말과 러시아 여자의 흰 티가 겹쳐지면서 귀여운 프릴과 리본이 달려 있는 브래지어를 차려고 후크를 몸에 연결했다가 풀고 다시 속옷 서랍에 넣었다. 사실 난 건전지 사이즈라서 브래지어는 항상 떠 있고 와이어가 받쳐줄 처질 가슴도 없고 뛰어도 흔들림이 없다. 크게 티 안 날 거다. 혹시나 해서 밴드를 붙였으니 도전해보자 노브라의 해방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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