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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른왕자 Nov 26. 2023

울긋불긋 물들다

어제저녁에 사 온 콩나물 한 봉지를 꺼낸다.


며칠 전부터 콩나물 볶음이 먹고 싶었다.

아내가 유부초밥을 만드는 사이 콩나물 볶음을 한다.

콩나물을 가볍게 씻은 후 움푹 파인 웍에 넣고 소량의 물과 함께 가볍게 데친다.

숨이 살아 있는 듯 아닌 듯 헷갈리는 정도가 딱 좋다.

양파와 마늘을 함께 넣고 기름과 함께 볶을 것이다.

간장, 굴소스, 고춧가루를 넣고 재빨리 볶아낸다.

설탕을 조금 넣어 아이들 취향도 저격한다.

시골에서 가져온 통깨를 뿌려주면 콩나물 볶음 완성!




아침 식사를 한다. 유부초밥과 콩나물 볶음, 배추김치와 파김치가 전부다.

우리 아이들은 매운 것을 잘 먹는 편이다. 해물찜, 김치찌개, 추어탕을 특히 좋아한다.

아들과 딸이 유추초밥에 콩나물 볶음을 올려서 입으로 한가득 넣고 있다.

아이들은 알고 있을까? 오늘은 고춧가루를 평소보다 훨씬 많이 넣었다.


"으아아아~~"

"아빠! 119 불러 주세요."


아들이 입에 불이 났다며 물을 가지러 달려간다.

딸은 하나도 안 맵다며 아무렇지도 않다고 한다.

그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을 가지러 간다.


"누나도 맵지?" 

"안 매워."


"매운데 안 맵다고 하는 거지?" 

"진짜 안 맵다니까."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니 이 아이들도 현실 남매다.

흔한 남매다.   




오전에 셋이서 우리가 살았던 시골집에 가기로 했다.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 정기적으로 찾아가 집상태를 점검하고 관리해 주어야 한다.

오늘은 마당 잔디를 깎고 텃밭 정리를 할 예정이다. 실내 청소도 해야 한다.

아이들이 주섬주섬 뭘 챙긴다. 책 두 권과 리코더, 고무공과 인형을 품에 안고서 졸졸 따라나선다.

아내는 집에 남아 밀린 집안일을 하기로 했다.




시골 마을에 문화 센터 건물을 짓고 있다. 와! 좋다.

친절한 토리 카페 사장님은 여전히 친절하겠지?

아들이 그리워하는 학교가 보인다. 

맨날 놀고 숙제도 없어서 예전 학교가 많이 생각난다고 한다.

황토단감로를 달리고 있다. 늦가을이 되니 길 양쪽으로 황톳빛 단감이 즐비하다.

누가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도로명을 기가 막히게 잘 지었다.

나무에 달린 채 홍시가 되어 가는 감이 수두룩하다.

일손이 없나? 감 값을 제대로 못 받나?

농사짓는 동네 분들 걱정이 앞선다.




반갑다. 잘 있었니? 집 한 바퀴를 돈다.

얼마 전에 고양이가 왔다 갔나 보다. 꼬들꼬들한 똥이 달맞이꽃 옆에 예쁘게 피어있다.

너 여기서 뭐 하고 있니?

달맞이꽃 한 송이가 우리 집을 지키고 있다. 몇 달 전 이곳을 떠난 우리를 대신해.

이제 가도 돼. 곧 겨울이잖아. 

혼자 피어있는 당찬 모습이 눈치 없는 아내를 많이 닮았다. 

예쁘다. 고맙다.




마당을 정리한다. 

아이들은 집 안에서 우리가 즐겨했던 놀이를 하고 있다.

저녁이 되면 늦은 밤이 될 때까지 우리는 항상 같이 놀았다. 

지쳐 쓰러질 정도가 되어야 놀이를 멈췄다. 

시끌벅적 떠들어도,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해도 

이곳에서는 누구도 방해하지 않았다. 

여기는 시골 of 시골, 완전 시골이다.


리시브! 토스! 스파이크! 

슛! 골~인! 을 외치는 아이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나란히 앉아 리코더를 연주하는 아이들.


이제는 추억이 되어 버린 아쉽고 소중한 광경들.

'아빠, 우리 여기에서 다시 살면 안 돼요?' 

소리 없는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온다.




도시 속에 묻혀 살면 계절이 오는 지도 가는지도 잘 모른다.

가을이 왔었구나! 가을이 벌써 가려 하네!

괜히 억울하다.

집을 둘러싼 산이 온통 물들었다. 울긋불긋.

지금 여기에서 이럴 게 아니라, 더 늦기 전에 가을산을 올라야겠다.

얘들아, 가자! 축령산으로!




숲은 언제나 좋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좋다.

숲은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이유를 굳이 찾지 않아도 좋다. 

가을 숲은 예쁘다. 예쁘지만 슬프다. 슬프지만 아름답다. 아름답지만 아프다. 아프지만 기쁘다.

숲길을 따라 단풍 구경을 한다. 나무에도 단풍 하늘에도 단풍 길바닥도 온통 단풍이다.

딸아이의 얼굴도 단풍 내 마음도 단풍이다.

예쁜 빛깔, 슬픈 빛깔, 아름다운 빛깔, 아픈 빛깔, 기쁜 빛깔로 울긋불긋한 내 마음.

누가 나를 물들게 했을까? 무엇이 나를 물들게 했을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곰곰이 생각해 본다.




울긋불긋 물든 마음이 도저히 가시지 않는다. 

초등학교가 보인다. 알록달록한 학교 건물이 날 끌어당긴다.

시골 작은 학교이지만 놀이터가 기똥차게 좋다. 없는 게 없다. 학교가 키즈카페다.

정작 놀이터가 심심해한다. 이곳에도 아이들이 많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숨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그걸 지켜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선생님.

나의 어린 시절이 불쑥 튀어나온다.


축구공 하나가 운동장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다.

어린 시절, 나는 밥보다 축구를 좋아했다.

시간과 공간은 결코 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엄마 몰래 벽과 공을 주고받았다.

방 문 두 개를 열어 골대를 만들고 거실에서 혼자 축구 시합을 하기도 했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동생들과 형들을 모아 우리 집 좁은 마당에서 공을 찼다.

주말이면 학교 운동장에서 살았다.

점심과 저녁은 초코파이 1개로 때우고 걷지 못할 정도가 될 때까지 공을 찼다.

학교 유리창 맞추기와 우리 집 화분 박살 내기가 내 특기였다.


아들이 축구 시합을 하자고 한다.

아들! 아빠는 봐줄 수가 없어. 축구만큼은 진심이거든.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니까.




10-0, 


단 한 골도 내주지 않고 이겼다. 아들 마음이 박살이 났다.

결국 울음을 터트린다. 울고 있는 아들 얼굴이 울긋불긋 단풍이다.

가장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애기단풍. 미안해, 아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들을 딸이 다가와 안아준다. 다독여준다.

아빠 너무했다는 표정으로 남매가 매섭게 날 노려본다.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손을 꼭 잡고 미끄럼틀로 간다.

그네로 간다. 시소로 간다. 철봉으로 간다. 그물을 잡고 하늘로 오른다.

언제 그랬냐는 듯 아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아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어른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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