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 꿈꾸던 로망과 마주한 현실
시골살이에 대한 로망은 귀촌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품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돌담 아래 꽃밭을 가꾸고, 마루에 앉아 해 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새소리에 시끄러워 잠이 깨는 그런 삶을 꿈꿨다. 하지만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와 농부의 아들인 남편의 시골집에 대한 기준은 달랐다. 남편은 현실을, 나는 낭만을 꿈꿨다.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며 타협점을 찾은 끝에 우리는 몇 가지 기준을 세웠다. 임시거처에 머물며 카페를 준비하면서도 빈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하던 일을 접고 곧장 집을 보러 다녔다.
해가 오래 머무는 동네를 찾아라
시고집은 단열을 해도 아파트보다 훨씬 춥다. 때문에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려면 해가 오래 머무는 동네를 찾아애 한다. 해가 일찍 지는 곳은 집이 남향이어도 겨울에는 춥고, 그만큼 난방비가 많이 들 수밖에 없다. 또한, 햇볕이 잘 드는 집이어야 습기가 적고, 그래야 벌레가 많지 않다. 습기가 많은 집은 여름에 독이 있는 지네가 많아 물릴 수 있고,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은 입원하기도 하니 겨울에는 난방비를 줄이고 여름에는 습기를 피하기 위해 양지바른 집이 중요하다. 이사를 온 1월, 오후가 되면 차를 몰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누볐다. 어느 동네가 해가 빨리 뜨고 오래 머물렀다 지는지 기억하며, 빈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바로 달려가 확인하곤 했다
마을과 가까이 있을 것
두 번째 기준은 마을과 가까운 곳이었다. 아파트에 살면서도 강과 산이 보이는 곳에서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앞동과 뒷동 사이에서 산다. 나는 시야를 가리지 않는 풍경 좋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 살고 싶었지만 남편은 마을을 고집했다.. 상하수도가 잘 갖춰져 있고, 문제가 생겼을 때 가까이에서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안전하다고 말했다. 나이가 들어서는 외딴곳에서 살면 고립될 수 있으니 오래 살집으로는 마을과 가까워야 한다는 말도 했다. 남편의 현실적인 조언에 공감하면서도 나는 마을 안보다는 마을 끝자락에 위치한 집을 바랐다. 완전히 외따로 떨어져 있지는 않으면서도, 나만의 공간이 확보된 그런 곳을 찾고 싶었다.
집의 구조가 튼튼할 것
세 번째 기준은 집의 구조가 튼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렴한 시골집은 수리 비용이 더 많이 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골집을 수리하기 위해 뜯어보면 기둥이 썩어 보강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수리 도중 집이 무너지거나 벽을 다시 쌓아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돌담과 기와지붕이 있는 집
마지막으로 나의 로망을 포기할 수 없었다. 돌담과 기와지붕이 있는 집이었다. 돌담아래 텃밭을 만들고, 마루에 앉아 해가 저무는 모습을 바라보며 사는 것, 시끄러운 새소리에 잠이 깨는 집,
이 네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집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관리가 잘 된 집들은 이미 주인이 살고 있었고, 어르신들이 살던 오래된 집들은 전혀 손을 대지 않아 고치는 비용이 많이 들어 보였다. 먼저 내려온 귀촌 선배들은 집을 구하러 다니는 우리를 보고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은 다 임자가 있어” 라며
“땅에는 보이지 않는 이름이 써 있다. 다 임자가 있더라구, 조금 기다려봐” 라며 조언을 해주었다.
기다림 끝에 마주한 현실
그렇게 기다린 끝에, 마침내 운명처럼 ‘스테이 섬진강댁’을 만났다. 화엄사 아래 황전마을에 1945년에 지어진 오래된 기와집이었다. 80년대 화대종주(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의 출발지점이었던 이 마을에는 민박집이 많았고, 우리가 구입한 집도 건물만 5개, 방이 10개 정도 되는 미로처럼 복잡한 구조의 민박집, ‘겨레민박’이었다. 마루는 새시까지 되어 있어 튼튼해 보였고, 도배, 장판만 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아, 구례 평균 시세보다 50%나 비싼 가격에 구입을 했다. 하지만 막상 살아보니 도시 사람이 살기에는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떻게 고쳐야 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아 손을 대지 못하고 불편한 채로 1년을 버텼다. 봄, 가을은 괜찮았지만 에어컨 없이 여름을 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방충망을 설치하고 문을 모두 열어놓은 채 선풍기 바람에 의지했다. 열대야가 있는 밤에는 중간에 일어나 찬물로 목욕을 하고 겨우 잠을 청하고 했다. 겨울은 더 혹독했다. 방이 많았고, 방을 늘릴 때마다 보일러를 연결해 놓아 사용하는 방마다 보일러를 따로 돌려야 했다. 보일러를 3대나 돌릴 수가 없었기에, 결국 캠핑할 때 사용했던 텐트를 방안에 치고 온수매트를 켠 채 파카를 입고 잠을 자야 했다.
단열이 전혀 되지 않는 욕실에서 샤워를 할 수 없어 매일 군에서 운영하는 수영장을 다녔다. 수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목욕을 하기 위해 수영장을 다녔다. 아침에는 수영장에서 샤워를 하고 카페로 출근하고 퇴근 후에는 사람들과 저녁 겸 술을 마시고 술기운에 집에 들어와 텐트 안에서 잠을 자는 생활을 하며 버텼다.
첫해를 그저 버티는 것으로 지냈던 시간들은, 내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시골살이에 대한 로망을 모두 걷어내는 시간이었다. 낭만이라고는 찾아볼 수 있는 궁상스러운 살이었다. 그럼에도 도시에 사는 친구들은 내 삶이 마치 여행 같아 보인다고 했다.
“너무 낭만적이다~”라는 친구에게
“너는 내 궁상이 낭만으로 보이냐?”라고 되묻곤 했다. 하긴 우리 부부도 첫해 겨울, 가끔 멍해지는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낄낄거리곤 했다.
“망해서 이러고 있으면 진짜 죽고 싶겠다!. 이게 사서 하는 고생이지 원!”
시골살이도 결국 사람이 사는 곳인데, 불편할 거라는 건 생각도 없이 여행에서의 설렘만 기억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의 시골살이는 낭만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