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에서 매실향이 나요!
도시에서의 계절은 늘 숫자로 확인하는 것이었다. 옷장의 옷을 바꾸는 것은 오로지 온도계의 눈금이었다. 그러나 구례에 와서는 온몸의 감각으로 계절을 느낀다. 지리산의 옷이 바뀌고, 섬진강에 실려오는 바람이 달라지면, 그때 비로소 새로운 계절이 왔음을 알게 된다. 귀촌 첫해, 그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큰 감동을 준 것은 바로 구례의 봄이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땅이 서서히 녹기 시작하는 2월의 어느 날, 아침 산책길에 숨을 들이마셨다. 뼛속까지 시리던 공기 사이로 따뜻하고 싱그러운 기운이 스며들었다. 흙냄새였다. 겨우내 잠들어 있던 작은 생명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하고, 땅이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알리는 냄새. 도시에서는 경험해 본 적 없는 생생한 봄의 신호였다. 그제야 비로소 계절의 시작이 단순히 달력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숨결을 통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농부들에게 대보름이 설날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곳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도시에서 대보름은 그저 부럼을 깨고 오곡밥을 먹는 날이었다면, 구례에서 대보름은 한 해의 농사를 시작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넓은 들판에 달집을 세우고,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깃발을 꽂았다. 낮부터 시작된 마을 잔치에는 흥겨운 농악대가 울리고, 아이들은 쥐불놀이를 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해 질 녘, 달이 떠 달집에 걸리는 시간이 되자 마을의 어른들이 한해의 풍년을 비는 제문을 읽는다. 자연과 조상들에게 술을 올리고, 달집에 불을 붙였다. 붉은 불길이 밤하늘로 치솟는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특히 소원을 담은 풍등이 어둠 속으로 솟아오르던 순간은, 마치 지리산이 나를 품어주는 듯한 따뜻한 느낌을 받았다. 이 불꽃이 꺼지고 나면, 비로소 새로운 봄이 시작되고, 나의 귀촌 생활도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중에 알았지만 풍등은 내가 내려왔던 첫해만 했던 행사였다.
경칩이 지나자 봄은 더 이상 냄새와 소리만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햇살이 잘 드는 언덕을 따라 노란 산수유꽃이 봉오리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혹독한 심술을 부리는 꽃샘추위에 매화는 냉해를 입기도 하였지만, 성질 급한 꽃들은 이미 가지를 내밀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 와서야 매화와 매실이 한 나무에서 나는 가족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른 아침 섬진강을 따라 달릴 때면 멀리서 실려오는 매화 향기는, 이곳에 살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장에 나가 봄나물을 구입했다. 대형마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싱싱한 머위와 달래, 냉이, 쑥, 돌미나리, 두릅 등 제철 나물들을 만났다. 살 것이 없어도 3일과 8일이 되면 장구경을 나섰다. 도시에서의 장보기와는 다른 여행 같은 느낌이 귀촌 생활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사람들과 정겹게 인사를 나누고, 덤으로 얹어주는 나물 한 움큼에 마음까지 풍요로워졌다.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이 되면 일교차가 심해지면서 구례에는 아침 안개가 짙어진다. 이 시기에는 해가 중천에 떠오르며 안개가 사라질 무렵 사성암에 올라야 한다. 진안에서 출발해 곡성을 지나 구례를 통과하는 섬진강과 멀리 보이는 지리산, 그리고 구례 들판을 감싸고 있는 운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솔솔 부는 봄바람에 밀려가는 구름 사이로 보이는 구례의 모습은 꼭 눈에 담아야 하는 장관이었다.
산수유꽃이 노랗게 핀 산동 마을들은 자연이 선물해 주는 찰나의 장관이다. 산동이 산수유로 유명한 것은 알았지만, 마을 전체가 노란 산수유로 가득할지는 몰랐다. 노랗게 핀 산수유는 그 자체로 다른 세상에 들어와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특히 지리산에는 하얗게 눈이 내리고 마을에는 노란 산수유가 피어 있는 모습은 잠깐 지나가는 풍광이라 구례에 살아야 만날 수 있는 선물이다. 이른 아침 사람이 없는 시간을 골라 걷다 보면 몸이 얼어 으스스할 때, 산동 입구에 있는 온천에서 언 몸을 녹이고 돌아오는 것. 오는 길에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은 느긋한 시골살이에서만 할 수 있는 호강이었다.
매화와 산수유가 질 무렵, 구례는 섬진강을 따라 벚꽃으로 온통 뒤덮였다. '구례 300리 벚꽃 축제'라는 이름에 걸맞게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낮에 보는 벚꽃도 아름다웠지만, 나를 가장 설레게 한 것은 밤에 보는 벚꽃이었다. 짙은 밤하늘 아래 하얗게 빛나던 벚꽃은, 마치 오직 나만을 위해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듯 보였다. 짧은 시간 피었다 지는 꽃은 수정을 위해 가장 내밀한 부분을 드러내고 유혹하는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밤 벚꽃은 가장 섹시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밤 벚꽃길을 걷는 동안 마음은 설렘을 넘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구례에서의 첫 봄은 그렇게 나에게 매일이 새로운 선물처럼 다가왔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깨닫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매일 옷을 갈아입는 듯한 지리산과 섬진강을 바라보며, 앞으로도 이곳에서의 삶을 소중하게 기록해 나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