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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 : 첫겨울

추위와 술로 기억되는 시골집의 첫겨울


“거기 추울 텐데…..”


구례에 내려와 기와집에 돌담이 있는 시골집을 사서 고쳐 살고 싶다는 내 말에 시골에 외갓집이 있는 친구가 혀를 차며 굳이 왜 시골에 가냐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도시에 살 때도 ‘바닥은 따뜻하게, 공기는 시원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했기에, 시골집도 좀 더 크고 낡은 아파트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따뜻할 거라는 오해, 냉혹한 현실


에어컨이 없는 여름을 보내면서도 크게 불편하지 않았고, 무모함과 낭만 사이에서 시골 생활을 즐기며 살았다. 12월이 지나도 마당에는 서리 맞은 국화가 피어 있었고, 눈이 와도 오전 10시면 녹을 만큼 구례의 초겨울은 따뜻했다. 그래서 겨울도 에어컨 없는 여름처럼 잠깐 불편하면 지나갈 거라는 오해를 했다. 낮 시간의 햇살은 우리가 임시로 쓰던 별채의 뼈 시린 냉기를 막아주지 못했다. 기와집의 멋진 모습 뒤에는, 노고단에서 내려오는 냉기가 겨울 내내 '나 여기 있어!' 하고 존재감을 과시하는 냉정한 현실만 있었다.


추위와의 사투: 별채의 한계와 단열의 중요성


임시로 사용하던 별채는 방마다 따로 보일러를 틀어야 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보일러는 소용이 없었다. 시멘트 블록 벽에 얇은 유리창, 잘 맞지 않는 창문 틈(외풍)은 보일러를 틀어도 열기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방 안의 온도는 5도 이하로 내려가기 일쑤였다. 가장 괴로웠던 건 샤워였다. 따뜻한 물이 나오긴 했지만, 몸에 닿는 아주 짧은 순간을 빼고는 온몸이 곤두서는 냉기에 집에서 씻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먼저 귀촌한 친구들이 “시골에서는 그렇게 자주 씻는 게 아니야. 며칠에 한 번씩 해줘야 하는 거지!”라고 했던 농담이 뼈저리게 와닿던 시간이었다. 시골집을 고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서까래의 낭만이 아니라 단열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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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겨울 생존 전략: 텐트 속 피난처


첫겨울의 생존 전략은 ‘집 안에 또 하나의 집’을 만드는 것이었다. 방 안에 캠핑용 텐트를 치고 그 안에 전기장판을 깔았다. 잠자는 동안만이라도 체온을 지키려는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다. 텐트 안은 그나마 살 만했지만, 그 겨울은 시골의 낭만은 없고, 오로지 ‘이를 악물고 버티는 시간’이었다. 플리스 집업 후드와 두꺼운 양말은 잠옷 대신 전투복이 되었고, 아파트에서는 상상조차 못 했던 ‘텐트 속의 전기장판’이라는 3중 방어막 속에서 밤을 보냈다. 집이 냉동 창고 같다면, 내가 운영하던 ‘카페 섬진강댁’은 유일한 피난처였다. 아침이면 얼음장 같은 방에서 뛰쳐나와 곧바로 수영장으로 향하는 것이 일과였다. 수영장의 따뜻한 공기와 온수로 샤워하는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사람답게 온기를 느끼는 순간이자, 호사스러운 행복이었다. 특히 멀리 노고단이 보이는 수영장에서 아침 해가 들어오는 시간 느긋하게 수영을 하는 시간은 치열했던 밤과는 다른 세상이었다.


추위를 잊게 한 술과 불안감


카페에 출근해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고, 해가 져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카페에 남아 있거나, 사람들을 만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시간의 대부분은 술과 함께였다. 술기운에 몸이 노곤해지고 감각이 무뎌져야만, 잠자리가 주는 추위의 고통을 잠시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 대학 새내기 때 매일 술을 마시며 방황하던 시절 이후로 이렇게 알코올에 의지했던 겨울은 처음이었다. 생각해 보면 술은 우리 부부를 추위로부터 보호해 주는 일종의 심리적 방한복이었다. 귀촌의 낭만이 깨진 현실을 덮어주는 두꺼운 담요 같았다. 내 집 같지 않은 시골집의 냉랭함은 몸을 춥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익숙했던 도시 생활과 우리의 선택이 도전이 아니라 무모함이었나 하는 불안감을 더욱 크게 했던 것 같다. 역설적으로 이 두 가지의 추위를 견디는 방법이 사람들과 떠들며 마시는 술이었던 것이다.


로망과 현실 사이의 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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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을 하며 가졌던 시골집을 고쳐 살겠다는 로망은 얼마나 달콤했던지….


마당에 잔디를 깔고, 텃밭에서 싱싱한 채소를 길러 건강한 밥상을 차리고, 저녁마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구들장이 뜨끈해진 아랫목에서 잠드는 꿈. 평상에 누워 구례의 별을 여유롭게 감상하는 꿈. 하지만 현실의 시골집은 그런 꿈과는 거리가 멀었다. 네모반듯하고 정해진 곳만 관리하면 됐던 아파트의 단순함과 달리, 시골집은 마당, 지붕, 구석구석 숨어있는 변수들로 가득 찬 복잡한 문제 덩어리였다. 집 전체의 단열 상태, 습도, 난방, 좌식과 입식의 구조, 심지어 자연과의 조화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로망과 현실의 차이 앞에서 멈칫! 대체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첫겨울이 준 깨달음과 현실적인 계획


추위와 술로 지나간 첫 구례에서의 겨울은 귀촌 생활 중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지만, 가장 많은 걸 배우는 시간이었다. 로망이 깨지니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어떤 집을 지어야 하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 "1년은 그냥 살아보자! 살다 보면 해결책이 생기겠지"라는 처음의 다짐은 냉동 창고 같은 방에서 텐트를 치고 후드티를 입고 꾸역꾸역 버텨내는 시간 속에서 귀촌 생활의 첫 단추를 채우게 됐다.


버티는 삶, 귀촌의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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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웠던 첫해 겨울 매일 밤 술잔을 기울이며 꿈꿨던 것은 뜨끈한 아랫목이 아니라, 다음 해의 겨울을 맞이하기 전에 이 집을 제대로 고쳐낼 현실적인 계획이 됐다. 이렇게 냉정한 구례의 겨울은 나에게 ‘버티는 것’이 곧 ‘사는 방법’ 임을 배웠다. 오자마자 로망에 따라 일을 만들지 않고 지역의 흐름대로 1년을 보냈던 시간이 현실의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는 귀촌 생활의 첫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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