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에서 보낸 12년의 편지를 마치며
마침표를 찍으려 책상을 정리하다 문득 창밖을 본다. 지리산의 능선은 12년 전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와 다름없이 의연하지만, 그 산을 바라보는 나의 눈동자에는 전과 결들이 촘촘히 새겨졌다. 1화부터 19화까지, 서툴렀던 귀촌 초기의 나부터 '로컬 기획자'라는 이름을 스스로에게 허락하기까지의 기록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것은 단순히 시골 적응기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찾아가는 긴 여행이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는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도시의 속도에 발맞추지 못해 뒤처진 것만 같았고, 낯선 시골 마을에서 이방인으로 떠도는 시간은 때로 불안하고 외로웠다. '무엇을 하며 먹고살 것인가'라는 생존의 질문보다 '나는 누구로서 이곳에 존재하는가'라는 정체성의 질문이 생기는 날은 섬진강변을 걸었다. 나를 부른 섬진강이 나를 혼란의 미망에서 중심을 잡아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렇게 자연은 도시의 습을 내려놓고 나다움을 찾을 수 있게 해 주었다.
하지만 12년의 세월은 내게 속삭여주었다.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나만의 길을 만들기 위해 잠시 멈춰 섰던 것이라고. 잡초를 뽑고, 무너진 담장을 세우고, 이웃의 투박한 사투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비로소 나만의 속도를 찾았다. 도시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계절마다 바뀌는 바람의 냄새, 비가 오기 전 낮게 깔리는 제비의 비행, 그리고 겉으로는 무심해 보여도 속 깊은 정을 건네는 이웃들의 진심 같은 것들 말이다.
그 억척스러운 시간 속에서 나는 '귀촌인'이라는 수동적인 틀을 깨고 나왔다. 지역의 빈집을 고치고 그곳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으며, 나는 비로소 이곳의 언어로 세상을 읽기 시작했다. '스테이 섬진강댁'은 그 치열한 읽기의 결과물이다. 이곳은 단순히 잠을 자는 숙소가 아니다. 내가 12년 동안 구례에서 배운 '머무름의 미학'을 공간으로 치환한 결정체다. 손님들이 묵을 방의 침구를 햇볕에 말리며, 나는 내가 받았던 위로를 그들도 느끼길 기도한다. 바스락거리는 면의 촉감 속에서, 지리산의 맑은 공기 속에서 그들이 잊고 지냈던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를 바란다. 그것이 기획자로서 내가 세상에 건네는 첫 번째 제안이었다.
이제 나는 이방인의 외투를 완전히 벗어던진다. 대신 '로컬 기획자'라는 조금은 무거운, 그러나 가슴 뛰는 명찰을 가슴에 단다. 로컬에서 무언가를 도모한다는 것은 결국 '나다움'을 회복하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 지역이 가진 고유함과 내가 가진 진정성이 만날 때, 비로소 대체 불가능한 가치가 만들어진다. 나는 이제 단순히 시골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시골의 가치를 재해석하고 연결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한다.
앞으로의 행보 역시 구례라는 단단한 토대 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새로운 기획들은 때로 거창한 프로젝트일 수도 있고, 때로는 마을 할머니의 소박한 지혜를 기록하는 작업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로컬의 지속가능성'과 '사람 사이의 온기'가 있을 것이다. 내가 재생한 공간이, 내가 쓴 글이 누군가의 삶에 작은 파동을 일으킬 수 있다면 기획자로서 그보다 더한 보람은 없을 것이다.
글을 쓰는 내내 내 마음을 가장 따뜻하게 데워준 것은 창밖으로 변함없이 자리를 지켜준 지리산의 능선이었다. 때로는 안개에 몸을 숨기고, 때로는 붉은 단풍으로 화려하게 자태를 뽐내며 산은 나에게 '존재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기록한다는 것은 지리산의 계절을 종이 위에 옮기는 일과 같았다. 한겨울 얼어붙은 땅속에서 생명을 준비하는 뿌리의 인내를, 그리고 봄날 기어코 꽃을 피워내는 나무의 정직함을 기록하며 나는 나 자신의 내면을 다듬었다.
12년의 시간을 20편의 글로 압축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웠으나, 그만큼 투명하게 자연의 리듬에 나를 맞추는 시간이었다. 산은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세상 어떤 조언보다 명확한 위로를 받았다. 자연은 서두르지 않아도 모든 것을 이룬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이 기록은 여기서 마침표를 찍지만, 우리의 삶은 각자의 로컬에서, 각자의 속도로 계속될 것이다. 나는 이곳 구례에서 여전히 아침 안개를 맞이하고, 섬진강의 흐름을 지켜보며 내 자리를 지킬 것이다.
'스테이 섬진강댁'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을 것이며, 나의 다음 기획들도 곧 여러분께 인사드릴 날이 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애쓰는 모든 분께 이 응원을 보낸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당신이 어떤 속도로 걷고 있든 진심으로 지지한다. 당신만의 '구례'를 발견하기를,
그리고 그곳에서 당신만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을 맞이하기를 바란다.
그동안 저의 12년 치를 함께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덕분에 외롭지 않은 긴 여행이었습니다.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단단하게 뿌리내리다 어느 좋은 날 다시 만납시다.
구례에서, 당신의 오랜 친구 섬진강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