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촌 기록 : 입이 먼저 아는 계절
사는 환경이 바뀌면 제일 먼저 변하는 것은 무엇일까? 잠자리가 바뀔 것이고, 창밖의 풍경과 코끝에 닿는 공기가 달라질 것이다. 날마다 마주치는 이웃이 바뀌고, 일의 호흡이 달라진다.
12년 전, 도시의 삶을 접고 구례에 터를 잡았을 때, 나의 일상도 달라졌다. 중학교 때부터 30년 동안 사용했던 알람 없이 아침을 맞이하는 일부터 바뀌고, 먹는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 ‘입’!
먹는 것이 달라지니 몸이 달라지는 신비! 먹는 것이 곧 나다라는 말을 몸으로 알게 됐다.
시골살이는 식습관의 혁명이다. 혁명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더 단순해지고, 더 근원적인 것을 향해 돌아가는 과정이다. 도시에서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주문을 하면 다음 날 아침, 문 앞에 식재료가 배달된다. 계절은 그저 뉴스와 사람들의 대화 사이에 흘러 다닐 뿐이었다. 하지만 이곳 구례에서 계절은 마트의 진열대가 아니라 흙의 온도와 바람의 냄새로 온다.
가장 큰 변화는 텃밭이다. 귀촌의 로망으로 시작한 작은 밭은 이내 나의 가장 정직한 냉장고가 되었다. 봄이 오면 모종을 심고, 햇빛을 먹고 자란 딸기를 딴다. 5월의 햇살 아래 자란 딸기는 크기도 작고 마트의 상품처럼 균일하게 예쁘지는 않다. 하지만 새콤달콤한 맛이 햇살아래 자란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흙이 묻고, 더러는 벌레가 먼저 맛을 본 딸기를 먹다 보면 자연과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이면 상추와 고추가 지천이다. 저녁 무렵 텃밭에 나가 갓 자란 상추를 몇 장 뜯고, 땡볕을 이긴 매콤한 풋고추를 딴다. 고등어 한 마리 굽고, 쌈장 한 숟갈 푹 떠서 차인 소박한 쌈밥. 이보다 더 건강하고 호사스러운 식사가 있을까. ‘유기농’이라는 이름표를 단 상품이 아니라, 나의 노동과 땅이 합작한 ‘생명’ 그 자체다. 스스로 기른 것을 먹는다는 행위는 나를 이 땅에 단단히 뿌리내리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행위가 된다.
내 텃밭이 자급자족의 공간이라면, 구례 오일장은 계절이 만들어 주는 잔치마당이다. 로컬 콘텐츠 기획자의 눈으로 볼 때, 시골 장날 펼쳐지는 모습은 그 지역의 정체성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다.
시골 오일장의 달력은 마트의 기획전이 아니라, 장터 좌판에 펼쳐진 할머니들의 일상이다.
“싱싱해! 오늘 새벽에 뜯었어. 사가~”
그 한마디에는 도시의 마트에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신선함과 생명력이 담겨 있다.
봄이면 지리산 자락의 온갖 산나물이 지천이다. 도시에서는 그저 ‘봄나물’로 뭉뚱그려 부르던 것들이 제각각 이름을 찾는다. 엄나무순, 옻나무순, 가죽나무순, 마트에서는 찾을 수 없는 봄나물. 시골 장터나 마당에서 직접 체취해야 맛볼 수 있는 귀한 봄나물과 말리지 않은 고사리, 책 속에서나 들어본 머위와 다래순, 가을이면 토란대와 늙은 호박, 겨울이면 시래기와 곶감이 그 자리를 채운다.
자연이 키운 식재료는 공장에서 찍어낸 상품이 아니라, 긴 시간 동안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호흡해 온 ‘먹는 문화’다
시골의 밥상은 텃밭과 시장에만 갇혀있지 않다. 때로는 자연이 아주 귀한 선물을 불쑥 내밀곤 한다. 도시의 고급진 식품관에서 조차 만날 수 없는 , 오직 이 계절, 이곳에서만 허락된 맛이다.
봄날, 지천으로 아카시아 꽃이 피면 그 향기로운 꽃을 따다 튀김을 만든다. 튀기는 솜씨는 필요 없다. 어설퍼도 한입 베어 물때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아카시아향은 1년 중 며칠만 누릴 수 있는 사치다.
가을 태풍이 지나고 나면 산으로 버섯을 따러 간다. 도시에 살던 우리에게는 어쩌다 만나게 되는 행운이 필요하지만 가끔 눈먼 능이버섯이나 송이버섯이 내 손안에 들어올 때가 있다.
아쉬울 때는 오래된 노포에서 각종 산버섯을 넣어 끓여주는 버섯전골로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 1년 내내 산이 키운 숲의 기운을 모두 품고 있는 깊은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섬진강,
맑은 물이 아니면 살지 않는다는 쏘가리는 미식가들이 꼽는 최고의 별미다. 취미로 섬진강에 낚싯대를 담가 잡은 쏘가리를 손질해 뽀얀 속살을 회로 뜨고, 남은 뼈로 맑은 탕을 끓인다. 쫄깃하면서도 담백한 그 맛은, 섬진강의 맑은 물결을 통째로 삼키는 듯하다.
이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맛’이 아니라 지리산과 섬진강의 청정함을 증명하는 ‘경험’이다,
시골의 식탁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를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나눔’을 택하겠다. 텃밭의 상추가 너무 많이 자라면 이웃집 대문에 한 봉지 걸어둔다. 그러면 다음 날, 그 집 닭이 낳은 따뜻한 달걀 몇 알이 내 문 앞에 놓여 있다.
“별거 아냐~ “
무심함 손길로 건네는 봉지 안에는 때로는 갓 짠 들기름이 들어 있기도 하고, 방앗간에서 뽑아온 따뜻한 가래떡이 들어있기도 한다. 이곳에서 먹거리는 화폐를 대신하는 따뜻한 인사이며, 관계를 끈끈하게 만들어주는 접착제다. 넘치면 나누고, 부족하면 채워주는 이 순환의 고리 속에서 ‘함께’ 먹고사는 법을 새롭게 배우게 된다.
구례에서의 12년
나의 몸은 이제 완벽하게 이곳의 시간에 맞춰졌다. 계절과 상관없는 과일보다는 햇빛과 바람에 맞춰 나오는 과일을 찾게 된다. 화려한 조미료가 아니라 흙의 향기와 물의 단맛, 그리고 정을 나누는 따뜻한 마음.
가을 짙어지는 이 계절. 구례의 색은 주황.
나는 잘 익은 단감과 홍시, 새로 말린 시래기가 지천인 가을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