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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 Oct 08. 2022

그녀가 엄마를 기억하는 방법

아니 에르노 에세이 <한 여자>


아니 에르노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으며 올여름 만났던 그녀의 작품이 떠올랐다.


<한 여자>는 아니 에르노가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 쓴 에세이로, 치매에 걸린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상실을 감당하기 위해 “써야만 했던 글”이라고 말한다.


이번에는 내가 어머니를 세상에 내어놓기 위해서 그녀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가 보다.


아니 에르노는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그려내면서도, “개인성의 함정에 매몰되지 않고” 사회적인 문맥 속에서 엄마의 삶을 엮어내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상실을 치유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어머니의 폭력, 애정 과잉, 꾸지람을 성격의 개인적 특색으로 보지 않고 어머니의 개인사, 사회적 신분과 연결해 보려고 한다.

그러한 글쓰기 방식은 내 보기에 현실을 향해 다가서는 것이며, 보다 일반적인 의미의 발견을 통해 개인적 기억의 고독과 어둠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돕는 것이다.


그래서 에세이지만 실제 인물이 아니라 마치 소설 속의 캐릭터처럼 느껴져서 더 속도감 있게 읽히고, 그녀가 엄마와의 관계에서의 경험한 복잡한 감정이 더 깊게 와닿았다.



그녀는 엄마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어떤 환경에서 자라나, 성인이 되고, 또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는지를 그리고 있다. 가장 좋았던 부분은 어린 시절의 그녀가 기억하는 엄마를 묘사하는 부분에 이르렀을 때였다.


어린 시절의 우리가 - 엄마라는 한 인간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기 전의 우리가 - 엄마가 세상의 전부였던 그 시절에 갖는 특별한 친밀감에 대해 읽으며 잊고 있었던 감정이 많이 떠올랐다. 엄마의 냄새, 옷차림, 미소, 손짓 모든 것을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보는 그녀를 보면, 속수무책으로 엄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그녀는 일요일 오후면 스타킹에 슬립 바람으로 낮잠을 즐겼다. 내가 옆에 가서 누워도 내버려 뒀다. 그녀는 잠이 빨리 들었고, 나는 그녀와 등을 맞대고 웅크린 채 책을 읽었다.


우리 사이에는 독서, 내가 그녀에게 읊어주는 시, 루앙의 찻집에서 파는 케이크를 둘러싼 은밀한 공모의 느낌이 있었고, 그(아버지)는 거기에서 제외되었다. 그는 축제와 서커스, 페르낭델의 영화로 나를 이끌었고, 자전거 타는 법과 채마밭의 야채들을 구별하는 법을 가르쳐 줬다. 그와는 재미나게 놀았고, 그녀와는 ‘대화들’을 나눴다.


그리고 청소년기에 이르면, 이 관계는 막이 내린다.


청소년기에 들어선 나는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왔고, 우리 둘 사이에는 투쟁만이 존재했다.


우리는 둘 다 서로의 속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녀, 남자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나의 열망을, 나, ‘내게 불행한 일이 닥치고 말 거다’, 그러니까 아무 하고나 잠자리를 같이 하고 임신이 될거다라는 어머니의 강박관념에.


그것들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열여섯 살때 꼭 그랬듯이 여전히 의기소침한 기분을 느끼고, 내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던 그 여자와 함께 시술사가 클라토리스를 절제하는 동안 등 뒤로 어린 딸아이의 팔을 꼭 붙들고 있는 아프리카의 어머니들을 순간적으로 혼동한다.


청소년기의 투쟁 속에서도 엄마에 대한 원망만이 있는 건 아니다.


나는 그녀의 사랑에 대해 확신했다. 또한 그녀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감자와 우유를 팔아 댄 덕분에 내가 대형 강의실에 앉아 플라톤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있다는 그 부당함에 대해서도.


대학에 가고, 부모님의 집을 떠나면서 엄마와의 관계는 오묘하게 달라진다. 오랜만에 보는 만큼 예전만큼 싸우지 않지만, 동시에 매일매일을 함께하는 사이에서 오는 친밀감, 공동의 느낌은 사라진다.


그러고는 <빨랫감이 있으면 내놓으렴, 네가 떠난 뒤로 신문들 다 모아놨다.>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더 이상 함께 살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이는 친절, 거의 수줍음이라고 할 만한 것들. 여러 해동안 나와 그녀의 관계는 떠났다가 돌아감의 반복에 머물렀다.

 

우리 둘의 숟가락, 구입할 냄비 세트, <중대한 그날의 준비물>들을 둘러싸고, 훗날에는 아이들을 둘러싸고 새로운 형태의 은밀한 교감으로 묶였다. 우리 사이에 더 이상 다른 형태의 교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대학 교수가 된 딸의 세계를 보며, 교육을 받지 못한 노동자 출신인 엄마는 두 세계의 괴리감과 불편함을 느끼고, 그녀는 그런 엄마가 측은하다.


자신의 딸이 그 세계의 일부가 되는 것을 보며 느끼는 자부심과, 겉으로는 절묘한 예의범절을 보여 주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경멸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게 될까 봐 계속 마음 쓰기 등(웃음조차 이런 잔 근심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자신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나머지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함. 그것은, 한쪽으로는 자신을 받아들이면서 다른 쪽으로는 자신을 내쫓는 세계 속에서 사는 것.


내가 청소년기에 <우리보다 더 나은 환경>에 놓였을 때 느꼈던 불편함, 그 감정을 그녀가 내 집에서 느끼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이후 엄마가 알츠하이머에 걸리고, 엄마라는 사람이 사라져 버리고 다른 ‘정신 나간’ 사람이 되어버린 이후의 시간에 대해서도 쓴다. 그리고 그녀는 이 부분을 쓰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도 고백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세상에 그녀의 자리가 있었던 시기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멈춘다. 그녀가 정신이 나갔다. 그것은 알츠하이머병이라고 불린다.


이 순간에 결코 도달하지 않기를 바라서이리라. 하지만, 나이 들어 노망난 여자와 젊어서 힘차고 빛이 났던 여자를 글쓰기를 통해 합쳐 놓지 않고서는 내가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녀. 치매로 더 이상 그녀가 아는 엄마가 아니었음에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는 더 의미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내게 말했다. ‘그런 상태로 여러 해를 사신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모두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더 나았다. 그건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의 문장, 하나의 확신이었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를 잃어버렸다.



한 개인이 엄마와 겪는 아주 사적인 역사의 궤적을 따라가며, 엄마와의 관계가 사적이면서도 얼마나 보편적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이 굉장한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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