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내딛는 발걸음만 생각하면 되니까
어제는 부슬부슬 비가 왔다. 그래서 한참을 쉬었던 달리기를 다시 시작했다. 적당히 내리는 비를 맞으며 뛸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부슬부슬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끼며 뛰는 즐거움을 알게 된 지 오래되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거나, 혹은 햇볕이 타들어갈 듯 강하면서 습한 그런 날씨가 대부분이다. 그런 날씨에 달릴 때는 수건을 목에 걸고 뛰지 않으면 땀이 시야를 가려서 난감하다. 평생 게으름을 포용하는 삶, 어떤 뚜렷한 목적이 있지 않는 한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삶을 살았던 내가 달리는 일을 자발적으로 하기 시작한 건, 엄마의 투병을 함께 하면서부터였다.
좀 더 정확히는 그보다 몇 년 전 조깅을 해보려는 시도는 했었다. 나는 지독한 불면증을 겪고 있었고, 의사 선생님의 권유로 인생 처음으로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새벽 4시가 넘어서야 잠에 들고, 두세 시간쯤 눈을 붙이고서 힘겹게 눈을 떠 회사를 가야 하는 일상이 두 달이 넘어갈 무렵, 이대로는 정말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면증이란 그런 것이다. 뚜렷한 이유가 없이 찾아오고, 이겨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면 할수록 더 잠을 자는 것이 어려워져서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것. 그래서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길을 잃는 것. 무엇이든 해야 했다. 우리 같은 지식노동자들은 머리만 지쳐있는 것이니, 몸을 피곤하게 해 보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눈을 떠있는 시간 대부분이 멍하고, 피곤했지만 저녁에 30분씩 뛰어보기로 했다. 열흘쯤 뛰었지만, 불면에는 별 효과가 없기도 하고, 체력적으로 너무 지쳐있던 나에겐 뛰는 게 너무 버거웠다. 힘듦에 힘듦을 더하는 무모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뛰지 않았다.
엄마의 투병기간, 힘들었던 위기의 순간들은 자주 찾아왔다. 그중의 어떤 날, 불현듯 달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건강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그때는 뛰는 일의 상쾌함을 알기도 전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내가 찾고 있었던 건 무언가 발산할 창구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집 앞에 강변을 따라 조깅할 수 있는 길이 있었는데, 거긴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었다. 아프기 전의 엄마는 아침저녁으로 적게는 하루에 한 시간, 많게는 두 시간씩 걷고 운동했다. 분가해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 집에 내려갈 때마다 아침마다 자는 우리를 깨워 엄마의 운동복을 입혀서는 운동을 따라나서게 했다. 우리 중에 체력이 제일 좋은 엄마는 30분도 못 가서 피곤해하는 우리를 비웃으며 엄마가 갔던 제일 오랜 시간 걸어 닿았던 곳의 자랑하기도 하고, 앉아쉬기 좋은 벤치를 소개해주곤 했었다.
엄마와 함께 걸었던 그 강변에 섰다. 근육도 하나 없는 흐물흐물한 몸으로 과연 몇 분이나 버틸까 싶었다. 첫날 15분을 연속으로 달렸던 걸 기억한다. 물론 아주 천천히 느린 속도로 달렸지만.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데, 멈출까 말까 그만할까 말까 내적 고민이 되었지만, 동시에 한 발짝만 더- 조금만 더- 를 반복했고, 극한으로 나를 몰아가 보고 싶은 그런 낯선 마음이 들었다.
숨이 차올라서 뛰는 동안 지속되던 힘듦이, 최대한 버티다가 뛰는 걸 멈추었을 때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으로 변하는 걸 경험했다. 한참 동안 달리고 나서는 내 몸의 에너지를 다 소진하는 것 같다고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가벼워지고 상쾌해진 느낌을 처음으로 느꼈다. 힘들 줄만 알았는데 이상했다. 몸이 힘들어지는 일을 하는데, 힘듦 뒤에 왜 상쾌함이 따라오는지, 이 알 수 없는 공식이 신기했다. 매일매일이 피곤하고 힘들었던 그때의 나에게 왠지 내 안에 내가 몰랐던 힘을 찾아주는 그런 느낌이 있었다.
지쳐간다 다리가 아프다 얼마나 더 가야 해 잠깐 쉴까 그만할까...내 머리를 가득 채우는 복잡한 생각을 하다가 생각의 고리를 멈추고, 그저 내 다음 발걸음만을 생각했던 고요했던 달리기를 기억한다. 그게 얼마나 평온하게 느껴졌는지.
그리고 그렇게 연습한 마음이 이후에 다른 어려운 순간에도 얼마나 유용했는지도. 수만 가지 복잡한 문제 사이에서, 그저 나는 다음 내딛을 발걸음만을 생각해서, 벅차 하는 나를 무너지지 않게 해 주었던 순간이 있었다.
어제오늘 달리면서 그때가 떠올랐다. 여전히 기본적으로는 운동을 멀리하고 싶은, 게으름이 더 좋은 나이지만, 그래도 달리기를 하면서 고요하고 좋았던 순간을 경험해서 다행이다.
기댈 수 있는 것이 많아지는 것. 인생에서 모으고 싶은 것은 나에겐 그런 경험이다. 통장의 잔고는 자꾸 줄어가지만, 미래는 불투명하지만, 이런 경험은 막연하게나마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준다. 그 힘에 기대어 또 한걸음 내딛으면 될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