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한강, 헬레나 본햄 카터, 태국어 선생님, 카드
https://www.youtube.com/watch?v=U8XHwiMOyWQ
(오늘의 BGM - 죠지의 '바라봐줘요')
1.
듣고 보는 것, 짧은 호흡의 글을 읽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세상이지만 긴 호흡의 문장을 읽는 일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긴 글을 따라가며 그 안에서 설득당하기도 하고, 또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내 안의 어떤 것을 이해받기도 하는 일. 그 과정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서 아마도 우리는 늘 책을 곁에 두고 살아가겠지.
소설가 한강의 인터뷰 중에서 이런 류의 이야기를 했는데 공감이 됐다.
책을 많이 읽고 나면 강해졌다는 느낌이 들어요. 바쁘고 해서 책을 많이 못 읽는 시기에는 약간씩 사람이 희미해진달까, 뭔가 좋지 않아요. 나 자신이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 느끼게 돼요. 책을 읽어야만 한다는 허기가 느껴져서 며칠 동안 몰아서 정신없이 읽을 때가 있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다 충전됐다,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나 좀 강해졌어. 씩씩해졌어,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거든요. 개인적인 필요, 허기, 갈망 때문에 읽게 되는 것 같고요. 책을 읽지 않고 살아갈 때는 부스러질 것 같고, 몇 줄을 읽더라도 읽어야 부스러지지 않고, 부스러졌더라도 다시 모아지는, 그런 느낌이 있어요.
요즘 가장 뜨거운 매체가 유튜브라고 하잖아요. 전 유튜브 다음엔 종이책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너무 낙관적이지 않느냐고 해요. 사람들이 지금은 아날로그에 너무 굶주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에 배고파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앞에 존재하는 어떤 이미지들의 총합이 아니라 손으로 만질 수 있고 일정한 크기와 무게, 감촉이 있는 매체를 우리가 그리워하고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2.
태국어 수업에는 선생님이 만든 예문이 담긴 연습 노트를 받고는 하는데
예문 중간중간에 그녀의 이야기나 철학을 담고 있는 것들이 있어서 그걸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오늘의 발견은,
ยิ่งคาดหวังน้อย ยิ่งมีความสุขมาก
조금 덜 기대하면, 좀 더 행복해지기 쉽다.
ทุกครั้งที่เห็นดอกกุหลาบสีขาวฉันจะนึกถึงแม่
하얀 장미를 볼 때마다 나는 엄마가 생각난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엄마를 잃은 그녀는 이렇게 종종 엄마의 이야기를 이곳에 남기곤 한다. 선생님이 엄마를 애도하는 방식을 엿보는 느낌.
3.
영국배우 헬레나 본햄 카터의 인터뷰 중에서 좋았던 말.
"나이를 먹는다는 건
우리 몸 안의 장기의 기능이라든가 얼굴에 생기라든가 점점 잃어가는 것 투성이지만,
그래도 인생의 경험에서 오는 자신감은, 늘어간다고 생각해요.
인생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자신감이 높은 시기도 있고, 한없이 낮아지는 시기도 있지만,
크게 봤을 때 자신감이라는 건 시간이 갈수록, 인생의 경험이 쌓일수록,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거든요."
그러니 나이 먹는 것에 대해서 조금쯤은 기대하는 마음을 가져도 좋다는 그녀의 귀여운 조언.
맞다. 나이가 들면서 그전엔 가능하지 않았던 것들이 가능해지기도 하니까.
나에겐, 연민과 이해와 용서가 그런 것들 중 하나.
4.
생일이라는 것에 '전혀'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나이지만,
매년 받는 그의 카드는 좋아한다.
함께 걷고 있는 연속적인 우리의 삶에서 '지금'을 규정하는 표현을 마주하는 느낌이랄까.
영원히- 라는 말을 들으면
영원을 믿지 않는 시니컬한 나조차, 왠지 희망적이 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