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는 왠지 감정의 굴곡이 더 깊어진다. 즐거운 일에는 더 쉽게 마음이 들뜨고, 마음이 아린 일들은 여운이 더 오래 남는다.
얼마 전에는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아주 오랜만에 통화를 하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말들은 그저 겉돌고, 그래서 결국은 서로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진위를 알지 못한 채 통화는 끝이 났다.
아빠는 도덕책 같은 말들을 되풀이한다. 착하게 살아야 하고, 남에게 빚지지 않고, 욕심내지 않고. 그럴 때 나는 왜 아빠는 남에게 쉽게 상처를 주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지 묻고 싶어 진다. 무뚝뚝한 아빠가 표현을 하지는 않지만 나를 안쓰러워한다는 것도 안다. 내가 갈 수 있었던 길을 가지 않게 된 계기를 함께했던 사람들 모두가 그런 마음인 것처럼.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아빠의 목소리에서 나이 든 이의 미세한 떨림을 들으며, 세월 앞에서 한풀 꺾인 아빠가 낯설고, 아리다.
여름에 시댁에서 시부모님과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리면 더욱 그랬다. 여든이 넘으신 시아버지는 요즘 잠을 잘 주무시지 못한다고 했다. 딱히 편찮으시지는 않아도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아, 매일매일이 조금씩 불편한 날들이었다. 어느 날은 다 같이 가벼운 산책을 하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서 길 가에 앉아서 잠시 쉬어야 했다. 다른 어떤 날엔 아침에 일어났는데 유독 피로감이 느껴져서, 하려고 했던 일정을 취소하고 집에서 쉬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시어머니는 다정하게 시아버지를 위로하고, 괜찮다고 계속해서 말하면서 안심시키고는, 인터넷을 서치 해서 어떤 증상이 위험하고 위험하지 않은지를 알아두곤 했다. 나이 들어가면서 이렇게 크고 작은 일상의 불편함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 모든 일을 혼자 겪을 아빠를 떠올리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다 괜찮다고 센 척만 하는 아빠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타날 신체적 제약을 마주하면서 심란해지고 작아지는 마음을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늘 화가 나있었고, 쉽게 언성을 높였고, 내가 아는 누구보다 무서웠다. 아빠가 집에 있었던 시간은 늘 긴장이 됐다. 그래서 나는 방 안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중학생이 되고 나서는 독서실에 가는 편을 택했다.
이런 시간이 쌓여서 우리는 좁혀지지 않는 마음의 거리를 두고 있다. 나를 지킬 수 있는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아빠 곁에만 가면 자동적으로 입안이 바싹 마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무서워서 울고 싶었던 아빠의 존재와 우리들을 좋은 학군에 있는 학교에 보내려고 매일 2시간을 운전해서 통근을 했던 아빠를 겹쳐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보내는 메시지나 이메일에 아빠는 한 번도 답장을 한 적 없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메일함을 정리하다가 아빠에게 받은 이메일을 발견했다.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있었을 때 내 안부를 조잘조잘 써놓은 이메일에 대한 답장이었다. 늘 엄마가 답장을 했었는데, 분명 엄마가 아빠에게 답장을 쓰라고 압박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조금 어색한 짧은 답글이었다.
“네가 잘 지낸다니 다행이다. 나는 너처럼 글재주가 없어서 답은 잘 못하지만, 보낸 편지는 늘 잘 읽고 있다. 앞으로도 잘 지내라.”
자신의 글을 조금 부끄러워하는 아빠의 모습이 담긴 이 짧은 글을 몇 번이고 따라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빠의 모습에 조금 놀라기도 하면서, 왠지 모르게 가슴이 저릿하고 슬퍼졌던 기억도.
늘 내 가치를 의심하는 습관이 나를 부정당하는 것 같았던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이라고 아빠를 비난하고 싶으면서도, 삼사십 대의 아빠가 삶의 무게에 짓눌려서 허우적대며 불행함을 표출하는 방법이었다고 이해해보려고 하는 내가 있다. 폭력과 희생과 최선이 불분명한 경계로 그렇게 얽혀있다.
아빠가 도덕책 같은 말을 한참을 하다가 끊은 이유는, 아빠는 타인과 감정을 나누는 대화를 하는 법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아빠는 어쩌면 잘 지내냐고, 길을 잃은 것 같은 네가 신경 쓰인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언젠가 약해졌을 때 혼자일 아빠를 걱정한다고, 마음이 쓰인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처럼.
전해지지 않았을, 전해지지 않을 그런 말들을 곱씹어보게 되는 그런 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