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의 끝이 있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끝이 우리에게 너무 빨리 찾아온 것 같았다. 3개월이 흘러 추운 겨울을 맞으며 면역력이 떨어져서일지도, 혹은 엄마가 갖고 있는 암의 성격이 너무 공격적이라 일찍 내성이 생긴 것일지도 모르지만, 엄마의 컨디션이 조금씩 다시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이미 CT 검사를 하기 전부터 우리는 아마도 다시 암이 자랐다는 소식을 받을 거라는 걸 예상하면서 진료실에 들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은 굳은 표정으로 더 이상 약의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셨다. 엄마와 함께하는 진료가 끝나고 나서 선생님은 나만 따로 불러서 지금 짧은 시간 안에 암의 크기가 너무 크게 자란 것으로 봐서 앞으로 급격하게 나빠질 것으로 예상이 되니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조금 이르긴 하지만 호스피스를 알아보라는 말까지 덧붙이셨다.
항암제가 더 이상 효과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고 나서 엄마의 건강 악화는 생각보다 빠르고 급격하게 진행됐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삶의 시작이었다. 첫 시작은 엄마의 구토가 멈추지 않았고 그래서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급하게 병원에 입원했고 암의 진행 때문에 위에 구멍이 생겼다고 했다. 그 구멍을 메우는 수술을 했다. 수술 후에 엄마는 훨씬 나아졌지만 곧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이번에는 황달과 함께 간성혼수가 왔다. 신장의 기능이 저하되어서 몸의 독성을 해독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했다. 간성 혼수를 겪는 며칠 동안 엄마는 거의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할 만큼 혼수 상황이 심각했다. 그렇게 내리막 길은 한번 시작되자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수술을 하나씩 할 때마다 엄마의 몸에는 배액을 배출하는 주머니가 하나씩 늘어났다. 동시에 엄마는 먹는 양이 훨씬 줄어들어서 몸무게도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식사량으로 영양분이 충분치 않아서 영양제를 매일 주사로 맞아야 했다. 가정 방문 호스피스 서비스를 신청해서 일주일에 3번씩 간호사 선생님이 오셔서 영양제와 제반 필요한 점검을 해주셨다.
소화기 관련 문제가 제일 큰 일이었는데, 엄마가 잘 먹지 못하자 위액 때문에 속이 쓰렸고, 그 통증 때문에 밤에도 잠을 못 자고 아파하는 횟수가 늘어 갔다. 이렇게 위장약과 집에서 쓸 수 있는 진통제로도 통증 조절이 되지 않으면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최대한 집에서 지내고 싶어 하셨다. 우리들도 엄마가 하루라도 더 편한 곳에서 지내시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른 아침, 언제나처럼 일어나자마자 엄마한테 가봤더니 너무 아파서 안 되겠다고 병원에 가자 하셨다. 이 상황에 대해서 언니한테 들은 대로 바로 구급차를 불렀다. 엄마는 몇 주 전부터 다리에 힘이 없어서 걸어 다니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차가 있어도 우리끼리 이동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들것에 실려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갔다. 엄마는 이제 병원에 가면 이 지긋지긋한 고통이 해결될 거라는 생각 때문인지 벌써부터 얼굴이 편해 보였다. 언제나 그렇듯 전쟁통을 방불캐하는 혼잡한 응급실로 입원해서 몇 가지 절차를 밟고 엄마에게 필요한 진통제를 맞을 수 있었다. 그렇게 호스피스 병동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의 2 주 남짓의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평온한 시간이었다. 환자에게 필요한 마약성 진통제를 급한 통증이 왔을 때 제때 쓸 수 있어서 통증 조절이 쉽다는 가장 중요한 장점을 차치하고서라도, 전반적인 환경이 좋았다. 엄마가 계시던 병실은 하늘 정원 바로 옆에 있어서 엄마가 누워서 정원과 높은 하늘 전망을 볼 수 있었고, 휠체어가 있으니 걷지 못하는 엄마를 휠체어에 태우고 산책을 갈 수가 있었다. 우리는 3층 빌딩에 살고 있는데 엄마가 걷지 못하면서는 밑에 내려가지도 옥상으로 올라가지도 못해서 한동안 집안에서만 시간을 보냈기에 답답했을 터였다. 여기선 하루에 몇 번씩이나 산책을 갈 수 있었다는 게 좋았다. 엄마가 입원하고 첫 선책을 갔을 때 정원에 있는 꽃을 하나하나 보면서 “너무 예쁘다. 다시 만나서 너무 반갑다.”라고 꽃에게 인사했던 게 너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병원과 연계된 자원봉사팀들이 매일 머리 감겨주시거나 마사지해주시는 서비스를 해주셨던 것도 엄마가 기분 환기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실질적인 서비스도 좋았지만, 항상 밝게 웃어주시던 자원봉사자분들의 그런 밝은 에너지가 엄마에게도 우리 보호자들에게도 좋은 에너지로 와 닿았다.
호스피스에 입원하기 전까지는 엄마에게 호스피스라는 말을 꺼내기조차 꺼려졌다. 호스피스가 의미하는 것이 삶의 마지막의 순간에 받는 완화 치료이기에 그 시점에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힘들어서였다. 어떤 스테이지의 환자도 그렇겠지만, 정말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람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또한 정말 안 좋았다가 또다시 좋아지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이번에 문제가 있더라도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에 호스피스에 입원을 하면서는 우리가 그 마지막 시기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는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입원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 친구분에게 전화가 왔다. 안부를 묻는 엄마 친구에게 엄마는 담담하게 호스피스 병동으로 입원했다고 알려주었다. 한두 달 전까지만 해도 면역 항암제를 쓰면서 좋아지고 있었던 엄마를 아시는 분이었기에 아마도 그 소식에 놀란 반응이었던지 엄마는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그러게. 좋았다가 안 좋았다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통증 조절이 필요한 시점이 왔고 그래서 여기에 왔어. 여기에 있다고 해서 희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또 그렇지 않다고 해도 받아들여야지. 나는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좀 더 좋아져서 퇴원하면 연락할게." 하고 전화를 마친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밖을 한참 내다보았고, 나도 할 말을 못 찾고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엄마는 침묵을 깨고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마음이 편해졌어. 여기 오니까. 어떻게 되더라도 마지막까지 잘 지내면 될 것 같아. 나는 담담하게 잘 받아들이고 있으니까 너네도 너무 맘 아프지 말고.”라고 했다. 눈물이 났지만 내가 울면 담담한 척하는 엄마도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 씩씩한 목소리로 “알아 엄마. 우리도 엄마가 편안해 보여서 좋아. 우리도 엄마 반만큼이라도 마음이 큰 사람이 되어 볼게.”라고 했다. 속으로는 엄마가 말하는 것처럼 정말 마음 깊이 엄마에게 평온이 찾아왔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기도했다.
또 다른 날들엔 감정이 복받쳐 한참을 같이 울던 날도 있었다. 엄마는 “너네들을 두고 어떻게 가지” 하고서는 목놓아 울었다. 너네들을 다 키우지도 못하고 가는 게 너무 마음에 걸린다 했다. 나는 엄마를 위로하려고 “엄마 막내도 서른이 다 돼가고, 언니랑 나는 마흔에 가까워오는데 엄마 우리 충분히 많이 키워주셨어요. 우리 이제 어른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했다.
엄마는 “인생은 살아보니 마흔에도 쉰에도 또 그 이후에도 그 시기마다 오는 고유의 힘듦이 있어서 그때마다 인생의 어른이 필요한데, 너희한테 그런 사람이 없어진다는 게 너무 마음이 아프다.” 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엄마만이 할 수 있는 가슴 아픔이 느껴져서 마음이 아려왔다. 나는 엄마가 앞으로 더 오래 살며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하는 엄마 개인으로의 삶을 서글퍼했지 이렇게 남겨질 자식들을 생각하는 엄마로서의 걱정이 엄마를 제일 슬프게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호스피스 병실에서 엄마는 많은 시간 씩씩했지만, 뒤돌아보면 이런 식으로 조금씩 엄마가 남기고 싶었던 말을 우리에게 해주고 있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 손님들이 많이 오셨다. 점점 체력이 떨어지던 엄마는 많은 시간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손님들이 오시면 엄마는 에너지를 내서 최대한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하셨다. 그게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모습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반가운 얼굴을 봐서 에너지가 났던 것 반, 그리고 엄마가 갖고 있는 에너지를 다 써서라도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그런 의지가 반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나 역시 손님들이 오시면 눈물부터 왈칵 쏟는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다독이고, 오늘 있었던 재밌는 일화도 이야기하면서 밝은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했다. 그럴 때면 병문안 오신 분들은 그런 분위기를 짐짓 의아해하는 게 느껴졌다. 우리 가족 모두 슬픔에 빠져 눈물바람에 통탄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우리가 웃으면서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의외였을 것이다.
나도 이번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타인의 삶을 쉽게 일반화해서 짐작하고 오해하게 되는지 생각하게 됐다. 비극을 시간을 지나는 사람에게도 일상은 다양한 순간으로 구성되어서 그 안에는 슬픔이나 고통만큼이나 웃음도, 그 안에서의 어떤 행복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엄마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기력을 잃어가고, 엄마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일매일 익숙해지지 않는 가슴 저림을 불러왔지만, 동시에 이런 시간 중에도 편의점에서 엄마가 먹고 싶어 하던 김치말이 국수 찾아서 그거 먹어보는 소소한 재미도 느끼고, 잔잔하게 비가 오는 날에는 밖에 나가서 내리는 비를 보며 마음이 평온해지는 순간도 있고, 지나간 웃긴 일화를 떠올리면서 배꼽을 잡고 웃는 일도 있었으니까.
슬픈 상황이지만 그 안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시간에 씌워진 이름을 - 호스피스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는 시간 - 되뇌며 살지 않는다. 오히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맞이하는 하루가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인생이라는 생각에 그저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는 날들이 많았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내일이 있다는 것, 다음 달, 혹은 5년 후가 주어진다는 생각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오만이 아닐까. 예측 불가능한 일이 너무 많은 이 세상에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오늘만이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삶의 전부이고, 진짜 소중히 여겨야 할 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우리는 태어나고, 자라고, 상처 입고, 그러다가 결국 자기 주변 사람의 죽음을 알게 된다. 인간의 유한함을 알게 되는 이러한 성장과정은 무시무시한 것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 확장된 시야는 삶이라는 이름의 전함을 관조할 수 있게 해 준다.
김영민 교수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책의 이 구절이 많이 와 닿았다. 오늘을 언젠가 올 미래를 위한 도구처럼 살았던 나는 엄마를 통해 삶의 마지막을 경험하며, 인생에 대한 시각이 조금 확장되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