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되고 항암치료도 어느새 4개월이 넘어가면서 엄마의 컨디션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통증의 횟수도 늘어나고 숨이 가빠지고 피곤해하는 날이 많아졌다. 짐작은 했지만 다음 진료 때 CT 검사 결과를 통해 암이 원래 크기를 넘어서 더 커졌음을 확인했다. 약의 내성이 생기면서 더 이상 약이 효과가 없어진 시점이 온 것이다. 다음 치료로 고려할 수 있는 선택지에는 첫 번째 약보다 독성이 강한 항암제와 새로운 기전으로 치료하는 신약인 ‘면역항암제'가 있었다. 우리는 고민 끝에 반응률은 낮지만 몸에 잘 맞으면 부작용이 거의 없이 치료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는 면역항암제로 치료하기로 결정했다. 현재까지 10% 내외의 반응률을 보인다고 알려진 터라 효과가 있을지에 대해서 불확실성이 컸지만, 이미 체력이 약해진 엄마가 독성이 강한 항암제로 더 큰 부작용을 감당하기는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 약이 엄마의 암에 반응하기를, 우리가 반응률 10프로 환자 그룹에 속하는 행운을 가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뿐이었다.
신약을 쓰기 시작하고서 몇 주가 지나자 엄마의 컨디션이 서서히 좋아지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 변화가 약의 독성이 없어서 부작용 반응이 없는데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약의 반응에 의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숨이 차던 증상이나 통증 같은 것들이 줄어들면서 조심스럽게 약의 효과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6 주가 지나고 CT 검사를 하던 날,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아주 환한 웃음으로 암의 크기가 거의 반쯤 줄어들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다. 아주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이 약이 반응이 한번 있기 시작하면 기존 항암제보다는 오래 지속되는 경향이 있으니 잘 지켜보자 하셨다.
너무 기뻤다. 엄마 컨디션이 좋아진 것뿐만이 아니라, 이제 3주에 한번 씩만 병원에 와서 30분 정도 소요되는 주사만 맞으면 되는 스케줄이라 엄마의 삶은 조금씩 정상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지나고 보니 그때의 우리는 ‘투병 중의 방학'을 누린 것 같다. 컨디션이 차차 거의 정상 수준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엄마는 이제껏 하지 못했던 엄마의 일상을 마음껏 누리기 시작했다. 친구들도 만나고, 취미생활 모임도 다시 나가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녔다. 무엇보다도 환자이기 때문에 꺼려졌던 것들을 할 수 있다는 게, 그 보이지 않는 장벽이 사라졌다는 게 엄마에게는 큰 행복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 가족 모두 어쩌면 전시상황과도 같았던 그 응급상황의 마인드를 잠시 접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나도 다시 홍콩으로 돌아와서 일상을 이어갔다. 그 사이에 언니는 예쁜 딸을 출산했고, 동생은 일본에 있는 대기업에 취업이 확정되었다. 엄마는 이런 좋은 소식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날들을 이어갔다.
어느 날 선생님과의 진료 중에 엄마는 조심스럽게 “선생님, 저 머리 염색을 해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엄마가 처음 항암치료를 시작하면서 화학 성분 때문에 치료 중에는 염색을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주의를 받아서 지금까지 반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흰머리 염색을 하지 않았던 터였다. 엄마는 반백 발이 된 머리를 늘 스트레스받아하면서 모자를 쓰고 다녔다. (엄마는 머리숱이 적어지긴 했지만 머리가 많이 빠지진 않았었다.) 언니와 나는 요즘은 강경화 장관처럼 흰머리가 멋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엄마를 위로하고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내내 그게 맘에 걸렸나 보다. 진료실에서 의사 선생님이 이번 치료약은 염색약의 성분에 영향을 받지 않아서 염색을 해도 된다고 하자, 엄마는 뛸 듯이 기뻐하며 진료가 끝나자마자 그 길로 바로 미용실에 가서 염색을 했다. 나는 그때 홍콩에 있었는데 엄마가 염색을 마치고 사진을 몇 장이나 찍어서 나에게 보내주며 너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엄마는 그 사진을 핸드폰 배경화면으로까지 할 만큼 되찾은 원래의 엄마의 모습에 행복해했다. 그때 언니와 나는 아차 싶었다. 우리 나름으로 엄마를 옆에서 챙긴다고는 하지만, 엄마의 입장에서 엄마에게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영양제를 찾아보고, 병행할 수 있는 한의원 치료를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엄마가 본인의 반백 발의 모습에 주눅 들고 슬펐다는 그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이자 본인의 아버지를 암으로 떠나보낸 보호자로서의 경험을 쓴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 (Being Mortal : Atul Gawande)라는 책을 보면 이 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 있다.
우리가 병들고 노쇠한 사람들을 돌보는 데서 가장 잔인하게 실패한 부분은 이것이다. 그들이 단지 안전한 환경에서 더 오래 사는 것 이상의 우선순위와 욕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A few conclusions become clear when we understand this: that our most cruel failure in how we treat the sick and the aged is the failure to recognize that they have priorities beyond merely being safe and living longer; that the chance to shape one’s story is essential to sustaining meaning in life; that we have the opportunity to refashion our institution, our culture, and our conversation in ways that transform the possibilities for the last chapters of everyone’s lives.
이에 덧붙여 마지막 순간을 보내는 환자에게 중요한 것은 좋은 죽음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마지막까지의 좋은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Our ultimate goal, after all, is not a good death but a good life to the very end.”) 환자의 본인의 존엄성을 지켜내는 삶, 본인이 원하는 삶의 질에 가까운 삶을 사는 게 중요하다고. 그래서 마지막 순간이 올 때까지 자신의 삶이라는 이야기를 스스로 써 나갈 기회를 갖고, 의미를 지속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그 날 미용실을 다녀와서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의 사진을 보면 내 부족함과 정면으로 마주한 그 순간이 떠올라 마음이 저릿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