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새벽 한 시가 되기 전이다. 어제 10시쯤 잠들었으니 세 시간도 채 못 잔셈이다. 피곤하고 눈꺼풀은 아직 무거운데, 심상치 않은 바람소리와 빗소리에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와서 기어이 잠을 몰아내고 말았다.
이런 날씨에 비행기는 얼마나 흔들릴 거야. 나는 왜 기어코 비행기를 타고 어디론가 가려는 거지. 집 나가면 다 고생인데 왜 그걸 사서 하고 있나.
혼자 가는 거였다면 당장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숙소도 위약금을 감수하고서라도 취소했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아침에 이성을 찾고 다시 생각하면 비웃을만한 사고의 흐름이지만, 밤의 생각은 늘 극단적이고 진지하고, 비극으로 치닫는다.
잠들지 못하는 여행 전날의 밤에는 주로 이런 생각을 한다. 별 특별할 것 없는 우리 침대가 너무도 포근하게 느껴지고, 10년간 업데이트가 안된 인간적인 느낌의 우리 집이 너무도 훌륭한 공간같고, 이 집을 떠나겠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가장 멍청한 행동처럼 느껴진다. 반면에 나에게 익숙한 공간을 벗어난 모든 장소가 위험한 것 같다. 왜 비수기의 이탈리아를 가려는 거지. 거긴 따뜻한 날도 있겠지만, 비가 오고 바람도 많이 불고 날씨가 오락가락이라는데.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내가 거기 가서 잔뜩 우울하기만 하다가 올지도 모른다.
<이탈리아 기행>에서 괴테는 이탈리아의 연중 따사로운 날씨와 밝음을 극찬했지만, <먼 북소리>의 하루키는 이탈리아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말은 “재밌다" 정도라고 했다. 뭐 하나 되는 게 없고, 사람들은 쓸데없이 여유롭기만 하고, 그래서 모든 게 불편하다고. 본인에게 거기서 살고 싶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아니라고 말이다.
가야 할 이유는 흐릿해지고, 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넘쳐난다. 두 시간쯤 진지하게 이 여행이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 었는지 생각을 하다가, 더 나아가 내 삶은 왜 이렇게 무모하지를 한탄하다가 겨우 다시 잠에 들었다. 세 시간쯤 더 자고 일어나서, 잠을 설친 멍한 두뇌를 최대한 잘 구슬려가며 짐을 싸고 있다.
여행 가방을 싼다는 건, 미래의 여행지에서 나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가를 예측하는 일이다. 신기하게도 여행지에서 다시 보면 내 짐가방은 늘 필요 없는 것들로만 가득한 것 같다. 이상하게도 늘 그렇다. 혹시 우리는 국경을 넘으면서 조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는 건 아닐까. 낯선 장소의 기운의 힘을 빌어 나의 새로운 면이 나오면서, 집에서와는 조금 다른 물건과 옷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는 걸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