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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팔룡 Jan 04. 2021

코로나 핑계로 지구를 망가뜨려서야

자본론의 개념을 적용한 생활경제(9)

최근 가정에서 세탁기를 교체하였다. 내구연한을 따져보니 11년차가 되었는데 고쳐 쓰면 조금 더 사용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기존 제품은 잔 고장 없이 묵묵히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다가 우리 곁을 떠나갔다. 제품을 잘 만들어놔서 회사 제품이 덜 팔렸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정들의 평균 세탁기 수명이 두 배로 늘어나면 세탁기 회사의 평균 매출은 절반으로 떨어질 것이다. 오히려 2년, 3년 만에 고장이 나는 제품을 만들었더라면 세탁기 회사들은 참 신나게 제품을 팔았을는지도 모른다. 


세탁기 브랜드들이 최소한의 경쟁을 한 덕분에 소비자들이 어느 정도의 편익을 얻은 것은 사실이다. 소비자들이 가전회사들을 믿게 되는 중요 근거 중에 하나는 역시 경쟁이 빚어내는 기능적 발전이라 하겠다. 소비제품 세계에서 이제 혁신이라는 것은 어렵다. 세상이 크게 바뀌고는 있다고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 눈에 띄는 가전 기술 혁신이라는 것은 없었다. 스마트폰의 등장은 그 예외라 할 것이다. 가전회사들은 고만고만한 기술이나 서비스를 가지고 경쟁을 한다. 그네들끼리 대단한 경쟁을 하는 것 같지만 최근 페이스북과 구글의 광고시장 담합 사례를 살펴보면 경쟁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공룡 같은 기업들도 이윤 창출이라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는 모양이다. 


우리 사회에서 기업의 최대 사명은 이익극대화에 있다고 한다. 봉사단체도 아닌데 이익 없이 기업 노릇을 할 리가 없다. 제대로 된 이익도 없이 기업을 끌고 나간다면 그것은 좀비일 뿐이지 진짜 기업은 아닐 것이다. 개별 기업들이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경쟁을 하다 보면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원리에 따라 질서를 만들어간다는 것이 지금 주류 경제학자들의 기본 주장이다. 문제는 개별 기업들의 이익극대화는 결코 다수 대중의 이익에도 부합하지 않고 경제적 질서를 자동적으로 만들어가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개별 기업들은 반드시 이익극대화까지 추구할 필요는 없으며 사회적인 필요에 따라 이윤의 폭을 결정하되 최소한 손익분기점 정도만 달성하면 된다. 때에 따라서는 그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사회가 용인할 수 있다. 최근 상황에서는 이마저도 어렵다는 것이 진짜 문제이긴 하다. 


나의 페친 Insook Lee는 미국에 살고 있는데 상황이 매우 어렵다고 한다. 한국도 그렇지만 미국도 소비를 부양하기 위해 온 사회가 안간힘을 쓰는데 잘 안 되고 있다. 그는 공구 드릴핀을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직원 이야기를 한다. 그 직원은 수학을 전공한 사람인데 제품의 내구성을 인위적으로 조정하기 위한 수학 계산 임무를 담당한다고 한다. 제품을 너무 무르게 만들면 제품 경쟁력이 떨어져 뒤처지고 제품을 너무 튼튼하게 만들면 수명주기가 길어져 회사의 매출 손실로 이어지기 때문에 적당한 품질을 계산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충분히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서 소비자의 편익을 높여줄 수 있지만 그런 것은 자본주의 회사가 추구하는 바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제품의 품질을 낮추기 위해 고급 인력을 사용하는 사회에 대해 Lee의 한탄이 이어진다. 자원 낭비, 환경오염까지 모든 오명에도 불구하고 개별 기업들은 자기 이익 추구에만 급급한다. 나는 그의 한탄에 동의한다. 


다만 내가 더욱 걱정하는 것은 개별 기업들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코로나를 핑계로 어마어마한 플라스틱, 비닐류가 쏟아지고 있는데 얼마 전까지 환경부에서 이런 것들을 줄여보려는 시도를 했던 것마저 우습게 만드는 정도가 되었다. 코로나19는 정녕 만능 핑계인가? 사회를 온통 전복시킬 정도로 무서운 질병이라는 데에도 동의할 수 없지만, 우리가 살아갈 이 땅을 플라스틱과 재활용품의 산으로 만들고 1회용 마스크 수 억 개를 만들어서 대충 버리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에는 더욱 동의할 수 없다. 개별 질병을 다루는데 온 사회적 자원을 탕진하여 사회적 재생산 자체를 위험하게 만들어도 상관없다는 논리는 종말론적 파괴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눈앞의 안전을 지키겠다며 만년 살아갈 강토를 오염시켜도 된다는 생각은 도둑놈 심보에 불과하다. 대통령이 공영방송을 동원하고 흑백 광고 같은 것을 찍어 탄소중립 사회를 만들겠다는데 이런 조건에서는 전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페친 Lee의 하소연처럼 현존하는 대안 사회에서도 공구 드릴핀을 ‘무조건 만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지는 않는다. 재료비와 인건비 등을 고려한다. 또한 상품의 도덕적 수명이란 게 있다. 기술 발전에 따라 새로운 제품이 도입되는 것을 고려하여 제품의 품질을 결정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Lee가 말하는 미국 기업의 품질과 비교하면 어떨까? 역동적이라 자부하는 경쟁 환경의 장점에 가점을 준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자원 절약, 환경 문제 대응 측면까지 봤을 때 미국 기업은 패배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수익극대화와 보이지 않는 손의 승리만 외치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 그들은 알고 있을까? 


자본론에서는 19세기에 사는 당시 인류가 잠시 지구를 빌려 쓰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다고 했는데 21세기의 한국인은 사과나무는커녕 질병의 위험을 핑계로 자기가 살아갈 터전을 플라스틱 공해로 완전히 망가뜨릴 작정을 한 것 같다. 하루 빨리 이성을 찾아야 한다. 당장의 문제가 급하다고 균형과 절제를 잃어버리면 그 문제 자체도 해결하지 못하게 된다.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침착하게 과학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가려는 사람들이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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