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혼자 걷는 길 - 마음 푸근한 아주머니, 너무나도 차가운 리비냑
GR65 Conques - Livinhac-le-Haut 28.2km
오늘은 이상하게도 일어나고 싶지가 않아서, 눈을 떴는데도 천장만 가만히 보고 있었다. 새벽부터 사람들이 유난히도 부스럭대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 6시 45분에 기상. 7시 반 조식을 먹으러 내려간다.
식당으로 가는 길, 지트 마당을 보니 아직도 비가 세차게 내린다. 혼자 아침을 먹고 있는데 캐나다에서 온 부부가 너 어제 너무 힘들어 보여서 꽁끄 도착 못할 줄 알았다며 농담한다. 이 사람들이...^^.. 자신들을 소개하는데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프로덕트 디자이너라고, 한 팀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일 그만두고 길 전체를 걷는다 말하니 자기들은 일은 안 그만두고 왔다고 웃는다. 부러움이 밀려온다. 이 길을 걷게 된 계기를 묻길래 대답하니, 자신들도 예전에 산티아고 길을 걸었을 때 르 퓌부터 시작한 사람들이 기억에 남아 걷는 거라고 답한다. 내가 만난 프랑스 부부도, 그들이 만난 그 사람들도 이렇게 다른 이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걸 알고 있을까. 이 부부는 피쟉에서 멈추고 다시 캐나다로 돌아간다고 했다. 나중에 길에서 보기로 인사하고 먼저 나온다.
출발하자
안녕 꽁끄
마지막으로 돌아 나오는데 아쉬워서 한번 더 찍은, 생푸와 수도원 성당
안녕 꽁끄
비가 쉬지 않고 많이 온다. 돌아 나오면서 꽁끄의 모습을 찍는데 진심으로 속상하다. 내가 그리도 보고 싶어 하고 꿈에 그리던, 이 숲 속에서 수천 년간 모습을 숨겨온 마을은 끝까지 그 진면목을 내게 보여주지 않았다. 꽁끄를 나오는 길은 정말*1000 가파른 언덕길. 이제 어지간한 길이라면 익숙해져 있을 순례자들도 쭉쭉 빗물에 미끄러지면서 퓨탕퓨탕 하며 걷는다. 그 가파른 언덕을 올라 작은 성소에서 종을 딸랑딸랑 쳐 보고 꽁끄를 내려다보는데 끝까지 그 모습은 비구름에 가려져 있다. 너무나 속상하다.
그나마 꽁끄가 잘 보이는 사진이 이거다.
끝까지 구름에 끼어 보이지 않는 꽁끄.
잠깐 한 숨 돌리고 계속 언덕길을 오른다. 이제 고도가 높아지니 나무들이 낮아진다. 저 앞에 일본인으로 보이는 남성분이 계셔서 일본어로 말을 걸어 보았다. 그러더니 엄청나게 유창한 영어로 대답이 돌아온다. 미국에서 오셨단다. 동양인이라면 일본, 중국, 한국일 거라는 나의 편견이 여기서 한 번 더 깨졌다. 알고 보니 내 뒤에서 계속 낑낑대며 걸어올라오시던 백금발의 할머니가 아내분이셨다. 두 분, 캘리포니아에서 오셨단다. 여기서 헤어지고 한참 뒤, 이 분들을 꺄오르에서 만나게 된다.
순례길에서는 생작 성인을 모신 성당을 자주 만난다.
순례길에서는 생작 성인을 모신 성당을 자주 만난다. 그 성당 안의 스테인드글라스.
순례길에서는 생작 성인을 모신 성당을 자주 만난다. 그 성당 앞모습.
한참 언덕길을 걷는다. 비+안개+엄청난 바람에 모든 순례자들의 얼굴에 표정이 없다. 봉쥬- 하는데 얼굴들이 다들 까맣다. 순례자들을 위해 누군가 만들어놓은 꽤나 빈티지한 쉼터에서 점심을 먹는데, 드꺄즈빌을 들르지 않고 지름길로 가자며 에너지 넘치게 설명해주신 캐나다 아주머니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된다. 내 파테를 나눠드리고 버터를 받았다. 아주머니는 남편이랑 꺄오르에서 만나 보르도 갔다 루흐드에 갈 거라고 자랑하신다. 나도 루흐드 갈 거라니까 반가워하신다.(이 때는 내가 계획을 전혀 변경하지 않고 중간에 루흐드를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꿰벡꾸아인 아주머니는 내 루르드 발음을 루흐드로 교정해주시는 데 재미가 들리셨는지 식사 내내 흐ㅡ 발음 연습을 시켜주신다. 항상 느끼는 것이었지만, 다들 너무 친절한데 밥 먹을 때 발음 교정은 좀..
꽁끄 벗어난 뒤 한참 엄청 힘든 오르막이 있다가 이제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평탄한 고원지대가 나온다.
안개까지 자욱이 끼면, 내가 걷는 길이 맞는지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안개가 그쳐도 계속 비가 왔다.
갑자기 구름이 걷혀 멋진 풍경을 자아낸다.
비가 정말 계속 지겨울 정도로 온다. 드꺄즈빌을 가는 길 대신 아냑을 거쳐 리비냑으로 바로 향하는 지름길로 가는데 갑자기 구름이 걷힌다. 높은 곳은 올라올 때 화가 나지만, 내려다볼 때는 그 희열이 올라올 때의 괴로움을 잊게 만들어 자꾸 또 올라오게 만든다. 아냑 근처의 초등학교 수업하는 것도 구경한다.
잠깐 쉬며 숨을 돌렸던 아냑의 성당.
아냑에 다다르니 드꺄즈빌이 가까워서 그런지 갑자기 매일 2G 3G만 간신히 잡던 내 핸드폰에 LTE 표시가 뜬다. 신이 난다. 다리도 아프겠다, 중간 성당에서 잠깐 쉬면서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카톡을 열심히 보낸다. 쉬고 있는데 세 명의 순례자들이 들어와 함께 쉰다. 다들 비에 절어서 엄청 힘든 기색이 역력하다. 그때 한 순례자가 어떤 노래의 운을 띄우더니, 나머지 두 순례자가 화음을 넣어 아름다운 곡을 완성시켰다.
이 곡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프랑스 친구가 곡 제목을 알려주어 공유 해 본다.
비가 많이 오던 것이 무색하게 갑자기 해가 쨍 뜨기 시작한다. 리비냑을 가려면 강을 건너야 하는데, 바로 직전 마을인 ST. ROCH에서 갑자기 떠 오른 햇살에 목이 너무 말라 맥주 한 잔 할 곳을 찾는다. 화장실도 급하고. 어느 지트 앞 칠판에 어서 오세요 따뜻해요라고 한국어로 써져있어 홀린 듯이 들어간다. 바이자 기부제 지트. 인간미 철철 넘치는 인테리어라 너무 놀랐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인테리어가 아니었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따뜻한 주인 할머니가 나를 반긴다. 일단 급한 볼 일을 처리하고 맥주를 마신다. 내가 한국사람이란 얘기 듣고 북한 애가 준 책 있다고 한참 창고를 뒤지신다. 결국 못 찾으신 듯 아쉬운 표정으로 내려오신다. 쨍 하니 비치는 햇살을 보며 나 이외에 바에서 차를 마시던 순례자들이 행복해한다. 이때 쏠레이으-라는 단어를 배운다.
마음 푸근했던 바&지트. 인테리어가 어마어마하다.
마음 푸근했던 바&지트
마음 푸근했던 바&지트
쏠레이으-
맥주값이 얼마냐 여쭤보니 기부제란다. 남는 게 있을까 싶을 정도로 걱정이 되어서 다른 곳의 맥주값보다 조금 더 많이 기부하고 나오는데 저녁식사를 준비하던 주인 할머니가 기다리라고 애타게 부르신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으니, 갑자기 방금 튀겨낸 당면 튀김을 호호 불여 식힌 다음 손으로 먹여 주신다. 누가 나에게 음식을 먹여준 건 언제였던 건지 기억 조차 나지 않는데 말이다. 그리고 내 볼이 꾸우욱 눌릴 정도로 찐한 뽀뽀. 말로는 전해지지 않는 따뜻한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져서 왠지 마음이 다 찡했다.
이렇게 만난 천사는 오늘 후에 있을 안 좋은 일을 대비한 천사인가 보다. 리비냑 도착했는데 도착한 지트가 원래 소 외양간인 듯 동물의 냄새가 진하게 난다. 그래도 엄청 인간미 넘치고 친절한 주인이라 웰컴 드링크를 친절하게 권하고 한참 동안 '긍정적인 에너지'에 대해 이야기도 했다. 방에 들어와 보니 남자밖에 없다. 다른 방에 여자들이 몰리고, 내가 꼴찌로 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 방을 쓸 수밖에 없다. 하나밖에 없는 화장실이 방 안에 있는 터라 화장실 안에서의 온갖 소리들, 가령 인간이 혼자 있을 때 편안히 내는 소리들, 그런 것들이 여과 없이 생방송된다. 방이 너무 넓고 천장도 높아서 더 소리가 잘 울린다. 이런 맙소사. 팬티만 입고 돌아다니는 아저씨들이야 이제 익숙해졌다 해도, 내 모든 소리(!)들을 생방송하기 두려워서 몹시도 조심히 샤워를 마친다. 볼일 보는 것도 편치가 않다. 다행히 내 위장이 위기감을 느꼈는지 적절히 활동해 준다.
내가 묵었던 지트 앞.
마을 중심부에 있던 어느 지트 앞
마을 중심부에 있던 어느 지트 앞
장을 보러 가는 길에 아침식사를 함께 한 캐나다 디자이너 부부를 만난다. 자신들은 이탈리안이 운영하는 지트를 예약했다고. 거기 묵고 싶었는데 내가 연락했을 땐 이미 너무 늦었던 터라 아쉬웠다. 지트가 좋단다. 부러웠다. 이후 간식으로 먹을 초콜릿이나 사탕들을 산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두 개씩 파는 초콜릿도 내가 쓸어온다. 그 뒤 바게트, 떨어진 버터, 파테 등등 이것저것 장을 본다. 저녁으로 먹은 성당 앞 레스토랑의 오늘의 메뉴는 정말 맛이 없었다. 샐러드도 맛이 없었다. 맛있는 건 구운 고기뿐이었다... 정말 친절하고 사근사근했지만 음식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거기다 곧 시끄러운 순례단들이 몰려와 술이 거나하게 취해 즐겁게 떠들었다. 어제 꽁끄에서 보냈던 시간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오늘은 너무나도 차가운 날이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자주 전쟁 기념비를 볼 수 있다.
건물이 신기해서 찍어 본 사진
그렇게 꽁끄에선 비만 오더니, 리비냑 오자마자 하늘이 쨍하다. 야속하기 그지없다.
맛없던 레스토랑에서 눈길을 끄는 건 사뭇 오래된 그래픽의 패널들이었다.
지트로 돌아가는 길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한다. 공기가 싸늘한 것이 심상치 않았는데, 너무너무 춥다. 라디에이터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침낭에다 이불까지 둘둘 말고 잤는데 너무 추워서 계단 옆에 있던 이불을 또 끌어와 이불에 짓눌릴 정도로 무겁게 덮고 잔다. 새벽에 턱이 딱딱 부딪힐 정도로 추워 몇 번 깬다. 다들 이 추위에서 어떻게들 팬티만 입고 코 골며 잘들 자는지 신기하다.